불확실한 걸 못 견디는 사람들 - 가장 큰 두려움을 가장 큰 힘으로 바꾸는 법
아리 크루글란스키 지음, 정미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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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지 않다는 건 무엇인가? 이렇게 서두를 여는 것 자체가 확실과 불확실을 나누는 경계를 확실하게 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은 반대다. 여러 상황에서 불확실과 모호함, 딱 떨어지게 정의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혹은 견뎌야 하는지 말해온 것의 연장이다.

여기서 물어야 한다.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음'인가? 아니면 그로 인한 불안감인가? 불확실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불확실한 것은 미지 혹은 그에 준하는 위험으로 간주되는 탓에 쉬이 불려나와 몰매를 맞는다. 명쾌한 결단보다는 우유부단에 대한 부정적 수사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동질 집단, 나 아니면 너, 아군 아니면 적군, 영웅 아니면 죄인, 이른바 "세 줄 요약"까지. 현대인은 컬러미디어를 넘어 전감각적 차원 미디어의 시대에 어느때보다 흑백, yes or no의 기준을 들이대고 있으니, 우리는 가히 '불확실의 거세'가 대두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세계에 살고 있다.

p.56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해 확실성을 추구할 경우, 확실성을 얻으려는 노력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다만, 확실성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할 경우에는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 때로는 실수를 걱정하는 것보다 확실성을 갈망하는 마음이 더 강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정보를 얼마나 모아야 할지 제대로 파악할 방법이 없는 탓에 인지적 종결 욕구, 즉 '충분하다'고 말하는 머릿속 속삭임에 기댈 수밖에 없다.


사회는, 사실 그렇지 않았던 적이 드물지만, 좀처럼 통합될 수 없는 다양성의 총체가 된지 오래다. 명쾌하게 이해되는 정답의 신화는 존재한 적도 없는 고향 행세를 하고 있어,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아무튼 돌아가야 한다고 우겨대는 탓에 이상향의 역사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로 인한 문제가 반복되고 또 재현되는 식이다.

그렇다면 다시, 인간은 어째서 불확실한 것을 불편해하는가? 그를 넘어, 어째서 유례없이 다양화되고 변화의 연속인 현대 사회에는 "불확실한 걸 못 견디는 사람들" 투성이인가? 그에 앞서, 불확실은 필연히 위험으로 연결되는가? 아니, 우리의 삶에는 조금의 미지와 위험, 그를 향한 도전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

어째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가, 어째서 인간은 흔들리는 희미한 포용과 관용 대신 굵고 힘차게 뻗어나가는 혐오에 의지하는가. 우리는 왜 스스로 생각하는 민주주의 대신 안락한 독재에 기대고자 하는가?

p.150 불확실하거나 불안감을 일으키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쉽게 사람들의 자신감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사람들은 안정된 기반과 사회적 지지를 느낄 때 자신감을 되찾는다. 또한 안정감은 대개 자신이 속한 문화의 가치관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자신이 속한 문화의 가치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을 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느끼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보자. 이것은 개인의 기질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저자는 반대의견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정치인사와 그에 휩쓸리는 여론, 극단을 향해 치닫는 소수자 혐오와 이민자 배척, 황당할 정도로 거친 논리를 내세우는 각종 폐쇄집단의 부상 등, 여러 사회 문제에는 불확실함을 견디지 못하고 명확한 정답과 빠른 종결에의 욕구가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한다.

역으로, 그런 심리적 특성이 형성되는 데에는 애착관계와 소속집단이 추구하는 가치, 그가 속한 사회적, 개인적 환경의 안정성 등이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이것은 더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끝없이 단결과 정답을 찾아 분열되고 파탄으로 나아갈 것인가.

p.194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상황에 놓이면 규범이 비교적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민주주의 사회를 못 견뎌 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확고한 지침을 제공하고 자신 있게 견해를 밝히는 리더를 선호한다. 사고가 유연하고 반대 의견에 소신이 쉽게 흔들리는 리더는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확실성을 주는 근원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내집단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집단 안에서 '피할 곳을 찾아' 달려간다.

p.270 사람에 따라 불확실성을 느끼는 상황에 두려움과 공포로 반응하기도 하고, 희망과 기대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반응을 결정짓는 주된 정신적 특성은 낙관주의와 끈기다. 이것은 어느 정도 유전적인 영향을 받지만 스스로 키울 수도 있다. (...) 실패의 원인을 일시적 요인(불운이나 노력의 부족)으로 돌리면 실패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니 다시 일어나진 않을 거라는 낙관주의로 연결된다.


이것은 좌절이 아니다. 인간은 양육되고 형성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파악하고 내면세계를 재구축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미지,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들의 총체인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유를 알면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서로에게 덜 공격적이고 덜 경쟁적인 사회, 이질적 구성원을 마주할 환경을 형성하고 장려하는 분위기, 보다 포용적인 관계를 안전하게 학습하도록 하는 사회 전체의 노력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지지 관계를 구축하고 상황을 낙관적으로 대하려는 태도가 있겠다.

이 모든 것은 일시에 형성되지도, 개인의 노력 여부에만 좌우되지도 않는다. 다만 '저건 대체 왜 저러는가'의 차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지 않은가. 이 불확실하고 불가해한 사회에서, 정답이 아니더라도, 헤매고, 낯설어하며. 내 탓도 네 탓도 아닌 동시에 모두의 책임인 세상에서,

p.19 우리에게 불안감을 유발하는 것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떠올리게 되는 '부정적인 생각'이다. 이 점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유용한 일이다. 우선, 어떤 사람이 불확실성을 건설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 알 수 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이 불확실성에 완전히 압도당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 이유까지 짐작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불확실성을 다루는 요령을 익히고, 불확실성을 침착하게 직면하고, 불확실성에 숨겨진 잠재성을 찾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을지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도서제공: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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