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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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부터 속도감 넘치는 전개에 정신을 차리는 것 조차 어렵다. 대체 어느 동네 작가가 4부 짜리, 그것도 연작도 아닌 작품을 시작부터 이렇게 몰아친단 말인가? 어이가 없다 못해 난감하기까지 한 기분이 들자마자 저번에도 안 읽어 냅다 매운맛을 봤던 그것, 작가의 전작 이력을 뒤졌으나...
국내 번역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지? 나만 빼고 서로 다 아는 사이인 이 기분? 뭐지? 작가부터 캐릭터까지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하는 이 분위기?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 1장을 읽다보면 정의롭고 냉철한 주인공에서 벗어나 현실성있게 부패한 인물과 어딘지 모르게 헐렁헐렁한, 세간에선 나사빠졌다(...)고 일컬어질 인물을 비중있게 내세움으로써 식상함을 탈피하는 작가에게 이유모를 애정같은 것이 솟구쳐오른다. 그래, 추리소설은 이래야지.
그러나? 그 애정은 1장과 함께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는 작가에게 편지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대체 4분지 1을 이렇게 끝내버리면, 나는 어떡해? 나는 어떡하고 당신들끼리만 사이다야? 나도 데려가!
걱정 마세요. 다음 주자가 나를 내다버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각 장 별로 서술자가 다른 만큼 분위기도, 서술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모두가 기발하고 완벽한 추리를 빛내지만 그 모두가 완전하지도, 끝까지 치밀하지도 못하다. 서로가 서로의 뒤통수를 치는 뒤통수 타격 맛집으로 초대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그것이 도리어 매력이랄까.

2장을 마친 나는 또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이 작가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길래 이 야심한 시각에 나를 고민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가... 뒤통수 스코어 2:0. 1장에서의 고민을 되새겨보자. 대체 이 작가는 남은 분량을 어쩌려고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가? 물론 앞사람 가면 뒷사람 온다고, 1장의 해답은 2장에서 얻을 수 있다. 그걸 동치미 국물마냥 홀라당 집어삼킨 범인이 접니다. 전데요. 아니 그치만 들어보세요? 저 작가가 먼저?
폭포처럼 쏟아지는 추리의 달달한 맛에 눈이 돌아가 2장을 해치우고 대가로 얼얼한 뒤통수를 얻어가며 3장을 마친 제 소감은요. 나의 뒤통수 오목거울이 되었다. 작가는 이 한반도 한구석에 놓인 독자의 뒤통수를 물어내라 물어내라.
당신이 누구든, 어떤 추리를 펼치며 각 인물의 행보와 추리에 얼만큼 고개를 끄덕였든 그것은 높은 확률로 뒤통수를 향해 날아온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배신과 충격만을 굳게 각오하고 전진하십시오. 그것만이 당신과 함께할테니. 네, 각오해도 소용 없다는 뜻이지요. 이제사 말하지만 이건 추천글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숨도 못 쉬고 완주했다는 평을 남기려고 쓴 글입니다.

매번 신간이든 구간이든 소개글을 쓸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어떤 작품은 단 하나의 단서도 커다란 스포일러가 되어 읽는 사람의 김을 빼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과 앞둿면 표지는 작가와 편집부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독자에게 전하는 최고의 단서이자 간절한 힌트이기도 하다. 인터스텔라의 책장 너머 외침처럼. 변방의 일개 독자인 저도 딱 한 마디만 보태겠습니다. 표지에서 느껴지는 모 영화의 기운이 있지요? 분명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표지 귀엽네~하고 넘겼지요? 바로 그것때문에 오목통수 클럽에 회원 하나 늘어났습니다. 축하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선 편지에 추신을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님께. 당장 차기작을 내놓으십시오. 재밌는 책은 무슨무슨 법에 의해 한 번에 두 권씩 내야합니다. 아무튼 그런 법이 있습니다. 당장 차기작을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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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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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소개에 앞서, 습관을 하나 고칠 필요가 있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대개 앞쪽 책날개에는 저자나 작품 소개가 들어간다. 표지나 띠지, 뒷면의 추천사보다 조금 더 정돈되고 간락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소개고 뭐고 뒤로 하고선 냅다 본문으로 뛰어들어가는 독자는 딱히 숨기려던 의도가 없었을 저자를 향해 "이게 이런 내용이었어?!"라며 전방에 서프라이즈 발사를 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다. 띠지의 홍보문구는 저자 안드레 애치먼의 히트작을 거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띠지와 뒷표지의 홍보문구까지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는 나보다 딱 세 걸음 앞서가는 내 운명이었다.", "그는 젊고 서툰 나를 보아준 단 한 사람이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단박에 '옳거니! 이건 아주 화끈한 로맨스다!" 함성을 지르며 냅다 뛰어든 독자가 있었으니, 그래. 내가 그랬다.
반이 넘어가도록 둘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에서 보여준 말랑말랑 끈적끈적 로맨스를 보여줄 기미가 안 보이니 대체 이 남은 분량을 어떻게 수습하려는 작정인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이 어린양이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결국 (아마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잘 살고 있었을) 저자를 향해 '이녀석 날 속이다니!'라는 노성을 지르고야 말았다는, 그래놓고 곱씹어보니 지나친 문장들이 떠오르면서 결국 앉은 자리에서 밤을 새워가며 다시 한 번 읽었다는, 그런 후기입니다. 애꿎은 저자만 욕을 먹었다는 이야기.

혼자만의 배신과 혼란으로 점철된 초회독은 뒤로 하고, 줄거리도 역시나 뒤로 하고, 개인적인 감상을 나누고 싶다. 전작 『파인드 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그러했듯 애치먼은 독자를 화자의 추억으로 끌어들이는 재주가 아주 탁월한 작가이다. 마치, 독자를 그 때 그 장소에 함께하는 것처럼. 때로는 관객으로, 때로는 이웃한 좌석에 앉아 등장인물의 만담인지 다툼인지 장광설인지 모를 대화를 엿듣는 사람들로 만든다. 그 추억이 허구이든 사실이든 간에.
으레 추억이라 함은 어딘지 모르게 달콤하고 아련하고 그리워 소중하게 품고싶은 무언가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치먼이 그리는 추억은 아련하고 그립기는 하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곱씹자니 고통스러우면서도 놓을 수 없어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 성질의 것에 가깝다. 그것을 지난 날에 대한 애정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나는 그것을 회한 섞인 향수라고 부르고 싶다. 초회독에 지나쳤던, 책날개의 소개글처럼,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뒤섞인 청춘의 회상은 숨막히는 날씨의 여름, 홀로 취기 오른 밤처럼 고통스럽고, 새로운 질서에 편입해 어서 털어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영영 그 때 그 시간, 그 감각에 머물고 싶어지는, 모순적인 경험이다.

(자꾸만 거론하게 되는) 전작에서 그러했듯 주인공 '나'를 포함해 등장인물 모두는 각자의 결함, 각자의 열등감과 불안을 가지고 있다. 불안한 유학생 신분인 '나'와 택시운전사 '칼라지' 뿐만 아니라 무슨 이유로 잠시 들여보내 준 지는 모르겠으나 용건을 마친 후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가 닿을 수 없는 기득권, 상류사회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교수 부부 까지도. 그렇기에 읽는 내내 고통스럽다. 누구에게나 열등감과 불안과 막무가내로 치닫고픈, 히스테리에 가까운 파괴적 충동이 휘몰아치는 때가 있다. 혹자에게는 현재,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땐 그랬지'라고 회상할 수 있는 아련한 과거일지도 모른다. 누구의 언제가 되었든 간에, 자전소설에 가까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통스럽지 않을 이는 없으리라, 있다면, 필시 고통스러웠을 누군가를 떠올리리라.
두 번을 연달아 읽고나서야 뒷표지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서로에게 무엇이 될 수도 없었던, 다신 돌아갈 수 없어 아름다운 시절에 대하여..." 돌이킬 수 없어 잔인할만큼 그리운 시절이 있다. 어쩌면 풋내가 난다고 할 수 있는 전작들에 비해 헐씬 원숙미가 돋보이기도, 그러면서 역시 설익은 과일처럼 뜨겁고 아리고, 또 아름다운 청춘에 대한 회상이 아주 절정에 이르렀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시대의 젊음과 젊은이였던 모두에게 권햔다. "인플루언서의 브이로그" 속 정돈되고 화려한 삶이 아니라 냄새나고 구질구질하고 두렵고 또 불안한, 그렇지만 찬란하기 그지없는 현재와 기억을 눈부시게 비추는 경험을 할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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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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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애착. 생애 초기에 부모를 비롯한 가까운 이에게 형성하는 강한 감정적 유대를 말한다. 표준국어사전에서는 "몹시 사랑하거나 끌리어서 떨어지지 아니함. 또는 그런 마음"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나운 애착". 단어의 의미를 따지자면, 아주 모순적이면서 동시에 단박에 이해하게 되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부모는, 특히나 엄마는 자녀에게 언제나 죄인이라는 말을 한다. 해주고 또 해줘도 미안하다고, 자신도 서투르고 힘들어 상처를 주고 최고를 최선으로 해주지 못해 미안하기만 하다고. 많은 경우에 딸은 엄마에게 죄인이다. 특히나 "착한 딸" 내지는 "착하려고 애썼던 딸"이라면 더더욱. 인간은 자주 접촉하는 타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생애 초기의 세계와 타인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는 양육자라면 부정할 수 없는 영향이 생애 전반을 뒤덮는다. 그저 기억으로만 남지 않고 결국은 그토록 싫어했던 말과 행동, 사고를 답습하게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 비비언 고닉의 기억과 현재를 오가는 서술에서 유별나게 이례적인 특징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답은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가정에서 어디서나 들어본 그런 가족과 함께 자라났다. 그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쏟아지는 폭력과 지긋지긋한 애증이 낯설 것 없는 세상을 살아온 이들이 수두룩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많은 경우 딸은 엄마에게 죄인이다. 엄마의 고통과 죄책감을 자기 것처럼 흡수한다. 밀어내다가도 끌어당기고, 내쳐지다가도 끌어당겨지는 비난과 사랑과 '너는 나처럼 살지 말기를'과 '네가 뭔데 내 뜻을 거부하고 감히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가'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처럼 처절하게 분열된 삶에 당신의 모든 감정을 쏟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무슨 수로 엄마의 감정에 감정을 쏟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p.26
혹자는 작중의 엄마를 딱 잘라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걸 몰라서 모든 딸들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증오하는 엄마-를 말했을까. 자식이 소유물이 될 때, 독립된 인간이며 나의 젊음과 희생을 먹고 자라 나를 그저 그런 늙은이,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볼 때의 분노와 공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일테다.
"엄마를 분노로 떨게 하고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건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p.166

비단 "엄마와 딸"의 지지고볶는 관계-만을 푸념처럼 늘어놓는 내용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자유와 혼란을 오가는 세상의 모든 여성에 대한 고백과 성찰이기도 하다.
"이제 갓 엄마가 된 이들은 그저 어디선가 본, 배워야 한다고 주입받은 다른 여자들의 행동과 습관을 모방하면서 어떻게든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소망할 뿐이다."
-p.75
"삶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약할 수록 자기 방식이 옳다고 독단을 부리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더 숭고한 목적에 헌신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서로를 분리시키면서 연민도 함께 거둔다."
-p.177
작중 저자와 모친의 행적을 모두 긍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도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옳은 선택만을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니 더더욱 그랬구나, 이 사람의 삶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그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시간을 겪어 지금에 도달했구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연대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을, 그 사람을 그이의 시간 안에서 이해하는 것.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
-p.301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건 불쾌한 일에서 벗어나는 엄마만의 방식, 당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방법, 옳고 그름을 아는 법, 당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의 이해되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p.309

근래에 이렇게 힘들었던 책이 없었다. 싫었냐고 묻는다면, 아니요. 정말 좋았어요. 선명하고 커다란 거울이 내 삶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 같아 너무나도 괴롭고 너무나도 좋았어요. 딱 한 가지 우려를 덧붙이자면, 앞서 말한 이례적이 않다거나 특별하지 않다거나 하는 말들은 그것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말해도 어 맞아맞아, 나도. 라고 한다는 건, 그러면서도 폭력과 애증이었음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 점에 유념하여 저자의 시간과, 고백과, 사납고도 잔인한 애착에 대한 기록을 마음 단단히 먹고 읽으시길 권합니다.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사납고도 끈질긴 애착관계에 놓인, 혹은 놓였던 모든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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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1~08 세트 - 전8권 전지적 독자 시점 1
싱숑 지음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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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유명한 작품이니 해석이나 줄거리 설명은 이른바 "찐팬"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개인적 감상을 써보기로 했다.
제목부터가 참 인상적이다. "전지적 독자"라, 전지적이면 전지적이고 독자면 독자지, 전지적 작가도 아니고 전지적 독자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의문은 첫 챕터를 시작하는 순간 바로 해결될 것이다. 이 작품의 소재이자 세계관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속칭 멸살법의 (아마도) 유일한 완주 독자인 주인공 김독자만이 한순간에 뒤엎어진 새로운 현실에 대해 전지적 존재라고 불릴만한 인물이다. 등장캐릭터-인물이라고 하기엔 사람이 아닌 게 너무 많지 않은가- 중 거대하고 엄청난 위력을 가진 이들도 한낱 화신, 즉 인간 김독자보다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제목은 그 자체로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전지적인 독자"와 "전지적인 캐릭터 김독자"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지와 전능은 흔히 함께 부여되는 속성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을 전지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서사의 탄생 전부터 결말에 대한 결정권을 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 과연 전지전능한 작가란 존재할 수 있는가? 위대한 성좌와 성운 그 너머의 "강력한 존재"가 강대한 힘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사인가, 아니면 존재의 긍정과 부정인가? 작가에게서 창조되어 독자에게 읽히는 소설은 작가의 손 안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주인공 김독자를 포함해 스트리머, 즉 진행자인 도깨비와 인간을 관람과 유희의 대상으로 보는 성좌와 성운들까지 작품 내 그 누구도 전능하지 않다. 모두가 운명과 개연성이라는 거대한 구조 내의 일부일 뿐이며 그 누구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개중 스스로를 독자이자 하나의 존재라고 끊임없이 되뇌는 김독자만이 그나마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끊임없이 판을 벌이는, 유능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김독자는 변함없이 말한다. 나는 독자일 뿐이라고.

"가장 못생긴 왕"이 메시아의 칭호를 얻은 김에 익숙한 메시아, 예수의 예를 들어보자. 흔히 예수를 절대선이라고 한다. 천상의 뜻을 받들어 무려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하러 왔다지 않는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예수는 지고한 선역이다. 그러나, 예수는 선역일지는 몰라도 사회에서 말하는 모범적인 시민이 아니다. 오히려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 미제라블』의 대표적인 악역, 자베르 경감이 모범시민에 가깝다. 그는 소속된 사회와 집단에서 옳은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규칙과 규율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규칙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를 악으로 규정에 처단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비록 흔들리는 면은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행위만은 "정의"라고 이름붙여진 질서에 한 치 어긋남이 없다. 대중적인 정의와 규칙은 사회의 권력구조를 포함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는 모범시민이다.
주인공 김독자는 선역인가? 그의 신념과 행동은 선과 악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의 극단적인 자기희생과 끊임없는 투쟁의 기저에는 분명 세계에 대한 대의가 있다. 작가는 주인공 김독자를 선역으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자고로 빠그러진(말이 좀 심하긴 하지만 유중혁 심성이 썩 고운 편은 아니지 않나...) 인성의 유중혁을 포함해 얼마나 피가 흐르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든 간에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영웅이란 선역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쯤해서 다시 물을 수 있다. 김독자는 선한 인물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에게는 분명한 대의가 있다. 어쩌면 이미 멸망해버린 이전 세계의 일상을 되돌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지나칠지는 몰라도 타인을 부러 죽음으로 밀어넣느니, 부활할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는 하나 자신의 죽음마저 기꺼이 불사하는 인물이다. 이쯤되면 김독자의 본성은 매우 이타적이라는 평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모두에게 다정한 이는 누군가에게는 끝없이 잔인한 존재이기도 하다. 자비와 선은 분명 같은 영역을 공유하지만 같지 않다. 또한, 선하다는 것이 곧 다정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김독자의 "동료"들에게 김독자는 선역일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은 아니다. 함께를 말하며 홀로 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잔인하다'고 말한다.

진실의 눈이나 원작 줄거리에 대한 기억과 다르게 인간은 물론 도깨비와 성좌, 성운조차도 갖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김독자만의 스킬이있다. 제 4의벽이다. 이것(어쩌면 이 놈)은 새로운 세계의 물리적, 심리적 충격에서 김독자를 유리해 보호함과 동시에 현실을 비현실로, 타인을 등장인물, 즉 배경의 일부로 보게 한다. 이는 단어의 본래 의미처럼 현실과 비현실, 주체와 대상이라는 존재의 장벽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꺾이지 않고 나아가 타인과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마주친 현실과 타인을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앞의 문장을 다시금 말할 수 있겠다. 김독자는 말한다. 자신은 독자일 뿐이라고.
그들과 김독자 자신의 생명의 가치에서 스스로를 항상 뒷전으로 미룬다. 정리하자면 그는 선역으로 등장해 극단적인 이타주의자의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기에 타인의 감정과 자신의 안위를 극단적으로 경시하는, 잔인한 면모가 있다. 선역이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쩐지 자꾸만 생사를 넘나드는 우리의 주인공 김독자는 소시민이다. 사회의 당당한 산업역군! 이 시대의 젊은이! 라고 하기엔 그의 삶은 너무나도 소소하고 눅눅하다.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인물이었고 멸살법이 재현되는 세계에서는 자의반 타의반 영웅으로 여겨진다. 예수로 자주 일컬어지는 구원자 서사와 김독자의 활약은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다시 빠그러진(...)영웅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길이 남는 미담 속의 영웅은 극단적인 이타주의자다. 이타심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타자,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을 구분해야한다. 분명 멸살법의 유중혁은 영웅이다. 가장 못생긴 왕, 메시아, 구원자 김독자는 영웅이다. 영웅의 제1미덕은 비정함이다. 정의롭다는 것은 곧 구분하는 것이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용사, 영웅이 나아가는 길에 즐비한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비참하지 않은 자는 없다. 그 누구도 피해입지 않는 전쟁은 없다. 삶은 전쟁이고,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있고, 상아에겐 상아의 삶이 있어요."라는 말처럼. 영웅은 대의를 위한 전장에 선두로 서는 존재다. 영웅은 자신의 의무를 피하지 않는다. 가야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정의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내하는 것이 바로 영웅이다. 비록 그 희생이 "우리"의 것보다 많고 처참할지라도. 소심한 영웅은 영웅으로 기억되지 못한다. 평생을 소심하게 살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어 희생을 이끈다. 나. 혹은 타자와 함께. 끌려가는 타자나 남겨지는 이들에게 그 희생이 달가울지는 글쎄, 자고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판타지 소설이다. 가상세계에서 펼쳐지는 주인공과 동료들의 이능력 전투물이다. 동시에 상처받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그동안의 시간을 지탱해온 삶을 필사적으로 지켜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영웅의 특징은 "용사"에 더 가까운 의미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김독자는 용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쉬울지도 모르겠다. 다만 용사는 태생부터 고귀한 존재가 대의를 위해 무력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짚어본다면, 역시나 김독자는 영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태생부터 전개까지 전형적인 영웅서사이다. 과연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결말까지 영웅으로 부를 수 있을지. 그것은 이어질 이야기를 기대해볼 수 있겠다.

p.s. 우리 독자 잘생기기만 했는데 왜 자꾸 못생겼다고 노래까지 부르고 그러냐! 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후반부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해요. 스무권이 넘는 종이책을 보관할 공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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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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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것도 허리까지 쌓이는 눈은 여행지에서나 본,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말인즉슨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극한의 추위와 눈보라는 영화에서나 봐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언젠가 이 책을 집어들 미래의 나와 또다른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영화처럼 보라고, 그러는 편이 좋을거라고.

장르에는 문법이 있습니다. 일종의 통용되는 룰처럼요. 예를 들면, 로맨스소설에는 사랑에 빠지는 계기가 등장한다든지, 서로로 인해 낭만적인-피폐물의 지옥같은 사랑도 아무튼 사랑이긴 하지요?- 순간을 경험한다든지,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에는 영웅적인 주인공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기적같은 조력자들 같은, 그런 필수아이템들이 아, 이게 이런 장르구나, 하고 작품을 이해하고 몷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제부터 소개할 책인 『내 동생의 무덤』 같은 스릴러에는 등장인물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폐쇄적인 배경이나 사건이 필요합니다. 당연하잖아요? 제일 중요한 용의자나 악당, 사건에 휘말린 주인공이 밑도끝도 없이 냅다 해외로 가버린다면? 사건의 전말을 독자에게 알려줘야 할 시점에 자기들까리 메시지나 주고받으면서 온갖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판을 짜서 빠져나간다면? 남겨진 독자는 솜사탕 잃은 너구리처럼 나도...! 나도 데려가...! 하며 울부짖을 수 밖에 없다구요. 여기서는 재난을 넘어 재양에 가까운 폭설과 눈폭풍이 그런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해줍니다. 쥐구멍은 이 폭설맨이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구!
책을 읽다보면, 읽기 좋은 책은 그 이유가 대체로 비슷하고 대단치 않지만 읽기 힘든 데에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요. 이번에는 내내 말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 감정들이 휘몰아쳐 당장이라도 덮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치만? 절로 코끝을 문지르고 이불을 뒤집어쓰게되는 추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음이 궁금해 책장을 멈출 수 없게 하는 필력이 어우러저 아주 괴로웠어요. 언젠가 작가에게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읽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재주라고 하겠습니다... 용서못해... 그치만 재밌었어요 또 써주세요 차기작 언제 나오지요?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가 있고 제각기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겠지만 과연 서로를 완벽하게 아는 사이가 있을까요? 평생을 함께해온 가족? 마찬가지로 나고 자란 마을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맞댔던 이웃들? 당신은 그들을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나요? 만일, 내 가족이 죽었는데, 살해당했는데, 믿고싶지 않았지만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나는 그 애를 반평생 찾아왔는데. 범인으로 지목된 자가 그 과정도 이유도 여전히 미심쩍다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찾아간 고향의 이웃은 어딘가 의심스럽고 나를 적대하는 것만 같다면? 게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까지도?
한치앞도 모르는 눈보라속에서는 길을 잃기가 쉽지요. 엉뚱한 길로 가기도, 제자리에서 맴돌다 파묻히기도, 제대로 나아가는 줆로 알았지만 실은 죽을 길을 찾아가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표지와 작중배경, 주인공 트레이시가 처한 상황을 폭설로 엮어낸 작가의 솜씨가 아주 놀랍습니다. 막다른 곳에서 길잃은 자의 절망이란, 아물지 못한 상처를 비밀로 후벼가며 끌어안고 사는 마음이란 대체 얼만큼의 무게로 삶을 짓누르는 걸까요.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스릴러입니다. 법정스릴러, 추리소설. 거칠고 축축하고 진창같은 피로에 절어버린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것처럼 작은 마을의 눈보라, 도망칠 수도, 그래서도 안되는 곳. 숨죽이는 긴장감으로 그치지 않고,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야만 했던,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제목의 "내 동생의 무덤"은 과연 어디일까요.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곳? 평생을 담고 살아왔던 주인공과 아버지, 동생 세라를 사랑했던 이들의 마음? 아니면 누구도 몰랐던, 아이처럼 웅크려 파묻힌 그 곳? 어디로 읽어내느냐에 따라 각자가 생각하는 장르가 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을 에이는 바람에 쏟아질 것만 같은 구름이 몰려오고 세상이 눈으로 덮여 숨죽이는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긴 겨울밤을 함께할, 페이지터너. 로버트 두고니의 『내 동생의 무덤』입니다.

좋은 책을 함께할 기회를 주신 출판사 비채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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