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유명한 작품이니 해석이나 줄거리 설명은 이른바 "찐팬"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개인적 감상을 써보기로 했다.
제목부터가 참 인상적이다. "전지적 독자"라, 전지적이면 전지적이고 독자면 독자지, 전지적 작가도 아니고 전지적 독자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의문은 첫 챕터를 시작하는 순간 바로 해결될 것이다. 이 작품의 소재이자 세계관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속칭 멸살법의 (아마도) 유일한 완주 독자인 주인공 김독자만이 한순간에 뒤엎어진 새로운 현실에 대해 전지적 존재라고 불릴만한 인물이다. 등장캐릭터-인물이라고 하기엔 사람이 아닌 게 너무 많지 않은가- 중 거대하고 엄청난 위력을 가진 이들도 한낱 화신, 즉 인간 김독자보다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제목은 그 자체로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전지적인 독자"와 "전지적인 캐릭터 김독자"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지와 전능은 흔히 함께 부여되는 속성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을 전지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서사의 탄생 전부터 결말에 대한 결정권을 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 과연 전지전능한 작가란 존재할 수 있는가? 위대한 성좌와 성운 그 너머의 "강력한 존재"가 강대한 힘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사인가, 아니면 존재의 긍정과 부정인가? 작가에게서 창조되어 독자에게 읽히는 소설은 작가의 손 안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주인공 김독자를 포함해 스트리머, 즉 진행자인 도깨비와 인간을 관람과 유희의 대상으로 보는 성좌와 성운들까지 작품 내 그 누구도 전능하지 않다. 모두가 운명과 개연성이라는 거대한 구조 내의 일부일 뿐이며 그 누구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개중 스스로를 독자이자 하나의 존재라고 끊임없이 되뇌는 김독자만이 그나마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끊임없이 판을 벌이는, 유능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김독자는 변함없이 말한다. 나는 독자일 뿐이라고.
"가장 못생긴 왕"이 메시아의 칭호를 얻은 김에 익숙한 메시아, 예수의 예를 들어보자. 흔히 예수를 절대선이라고 한다. 천상의 뜻을 받들어 무려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하러 왔다지 않는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예수는 지고한 선역이다. 그러나, 예수는 선역일지는 몰라도 사회에서 말하는 모범적인 시민이 아니다. 오히려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 미제라블』의 대표적인 악역, 자베르 경감이 모범시민에 가깝다. 그는 소속된 사회와 집단에서 옳은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규칙과 규율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규칙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를 악으로 규정에 처단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비록 흔들리는 면은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행위만은 "정의"라고 이름붙여진 질서에 한 치 어긋남이 없다. 대중적인 정의와 규칙은 사회의 권력구조를 포함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는 모범시민이다.
주인공 김독자는 선역인가? 그의 신념과 행동은 선과 악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의 극단적인 자기희생과 끊임없는 투쟁의 기저에는 분명 세계에 대한 대의가 있다. 작가는 주인공 김독자를 선역으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자고로 빠그러진(말이 좀 심하긴 하지만 유중혁 심성이 썩 고운 편은 아니지 않나...) 인성의 유중혁을 포함해 얼마나 피가 흐르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든 간에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영웅이란 선역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쯤해서 다시 물을 수 있다. 김독자는 선한 인물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에게는 분명한 대의가 있다. 어쩌면 이미 멸망해버린 이전 세계의 일상을 되돌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지나칠지는 몰라도 타인을 부러 죽음으로 밀어넣느니, 부활할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는 하나 자신의 죽음마저 기꺼이 불사하는 인물이다. 이쯤되면 김독자의 본성은 매우 이타적이라는 평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모두에게 다정한 이는 누군가에게는 끝없이 잔인한 존재이기도 하다. 자비와 선은 분명 같은 영역을 공유하지만 같지 않다. 또한, 선하다는 것이 곧 다정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김독자의 "동료"들에게 김독자는 선역일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은 아니다. 함께를 말하며 홀로 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잔인하다'고 말한다.
진실의 눈이나 원작 줄거리에 대한 기억과 다르게 인간은 물론 도깨비와 성좌, 성운조차도 갖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김독자만의 스킬이있다. 제 4의벽이다. 이것(어쩌면 이 놈)은 새로운 세계의 물리적, 심리적 충격에서 김독자를 유리해 보호함과 동시에 현실을 비현실로, 타인을 등장인물, 즉 배경의 일부로 보게 한다. 이는 단어의 본래 의미처럼 현실과 비현실, 주체와 대상이라는 존재의 장벽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꺾이지 않고 나아가 타인과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마주친 현실과 타인을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앞의 문장을 다시금 말할 수 있겠다. 김독자는 말한다. 자신은 독자일 뿐이라고.
그들과 김독자 자신의 생명의 가치에서 스스로를 항상 뒷전으로 미룬다. 정리하자면 그는 선역으로 등장해 극단적인 이타주의자의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기에 타인의 감정과 자신의 안위를 극단적으로 경시하는, 잔인한 면모가 있다. 선역이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쩐지 자꾸만 생사를 넘나드는 우리의 주인공 김독자는 소시민이다. 사회의 당당한 산업역군! 이 시대의 젊은이! 라고 하기엔 그의 삶은 너무나도 소소하고 눅눅하다.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인물이었고 멸살법이 재현되는 세계에서는 자의반 타의반 영웅으로 여겨진다. 예수로 자주 일컬어지는 구원자 서사와 김독자의 활약은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다시 빠그러진(...)영웅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길이 남는 미담 속의 영웅은 극단적인 이타주의자다. 이타심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타자,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을 구분해야한다. 분명 멸살법의 유중혁은 영웅이다. 가장 못생긴 왕, 메시아, 구원자 김독자는 영웅이다. 영웅의 제1미덕은 비정함이다. 정의롭다는 것은 곧 구분하는 것이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용사, 영웅이 나아가는 길에 즐비한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비참하지 않은 자는 없다. 그 누구도 피해입지 않는 전쟁은 없다. 삶은 전쟁이고,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있고, 상아에겐 상아의 삶이 있어요."라는 말처럼. 영웅은 대의를 위한 전장에 선두로 서는 존재다. 영웅은 자신의 의무를 피하지 않는다. 가야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정의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내하는 것이 바로 영웅이다. 비록 그 희생이 "우리"의 것보다 많고 처참할지라도. 소심한 영웅은 영웅으로 기억되지 못한다. 평생을 소심하게 살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어 희생을 이끈다. 나. 혹은 타자와 함께. 끌려가는 타자나 남겨지는 이들에게 그 희생이 달가울지는 글쎄, 자고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판타지 소설이다. 가상세계에서 펼쳐지는 주인공과 동료들의 이능력 전투물이다. 동시에 상처받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그동안의 시간을 지탱해온 삶을 필사적으로 지켜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영웅의 특징은 "용사"에 더 가까운 의미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김독자는 용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쉬울지도 모르겠다. 다만 용사는 태생부터 고귀한 존재가 대의를 위해 무력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짚어본다면, 역시나 김독자는 영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태생부터 전개까지 전형적인 영웅서사이다. 과연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결말까지 영웅으로 부를 수 있을지. 그것은 이어질 이야기를 기대해볼 수 있겠다.
p.s. 우리 독자 잘생기기만 했는데 왜 자꾸 못생겼다고 노래까지 부르고 그러냐! 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후반부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해요. 스무권이 넘는 종이책을 보관할 공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