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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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소개에 앞서, 습관을 하나 고칠 필요가 있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대개 앞쪽 책날개에는 저자나 작품 소개가 들어간다. 표지나 띠지, 뒷면의 추천사보다 조금 더 정돈되고 간락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소개고 뭐고 뒤로 하고선 냅다 본문으로 뛰어들어가는 독자는 딱히 숨기려던 의도가 없었을 저자를 향해 "이게 이런 내용이었어?!"라며 전방에 서프라이즈 발사를 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다. 띠지의 홍보문구는 저자 안드레 애치먼의 히트작을 거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띠지와 뒷표지의 홍보문구까지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는 나보다 딱 세 걸음 앞서가는 내 운명이었다.", "그는 젊고 서툰 나를 보아준 단 한 사람이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단박에 '옳거니! 이건 아주 화끈한 로맨스다!" 함성을 지르며 냅다 뛰어든 독자가 있었으니, 그래. 내가 그랬다.
반이 넘어가도록 둘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에서 보여준 말랑말랑 끈적끈적 로맨스를 보여줄 기미가 안 보이니 대체 이 남은 분량을 어떻게 수습하려는 작정인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이 어린양이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결국 (아마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잘 살고 있었을) 저자를 향해 '이녀석 날 속이다니!'라는 노성을 지르고야 말았다는, 그래놓고 곱씹어보니 지나친 문장들이 떠오르면서 결국 앉은 자리에서 밤을 새워가며 다시 한 번 읽었다는, 그런 후기입니다. 애꿎은 저자만 욕을 먹었다는 이야기.

혼자만의 배신과 혼란으로 점철된 초회독은 뒤로 하고, 줄거리도 역시나 뒤로 하고, 개인적인 감상을 나누고 싶다. 전작 『파인드 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그러했듯 애치먼은 독자를 화자의 추억으로 끌어들이는 재주가 아주 탁월한 작가이다. 마치, 독자를 그 때 그 장소에 함께하는 것처럼. 때로는 관객으로, 때로는 이웃한 좌석에 앉아 등장인물의 만담인지 다툼인지 장광설인지 모를 대화를 엿듣는 사람들로 만든다. 그 추억이 허구이든 사실이든 간에.
으레 추억이라 함은 어딘지 모르게 달콤하고 아련하고 그리워 소중하게 품고싶은 무언가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치먼이 그리는 추억은 아련하고 그립기는 하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곱씹자니 고통스러우면서도 놓을 수 없어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 성질의 것에 가깝다. 그것을 지난 날에 대한 애정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나는 그것을 회한 섞인 향수라고 부르고 싶다. 초회독에 지나쳤던, 책날개의 소개글처럼,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뒤섞인 청춘의 회상은 숨막히는 날씨의 여름, 홀로 취기 오른 밤처럼 고통스럽고, 새로운 질서에 편입해 어서 털어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영영 그 때 그 시간, 그 감각에 머물고 싶어지는, 모순적인 경험이다.

(자꾸만 거론하게 되는) 전작에서 그러했듯 주인공 '나'를 포함해 등장인물 모두는 각자의 결함, 각자의 열등감과 불안을 가지고 있다. 불안한 유학생 신분인 '나'와 택시운전사 '칼라지' 뿐만 아니라 무슨 이유로 잠시 들여보내 준 지는 모르겠으나 용건을 마친 후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가 닿을 수 없는 기득권, 상류사회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교수 부부 까지도. 그렇기에 읽는 내내 고통스럽다. 누구에게나 열등감과 불안과 막무가내로 치닫고픈, 히스테리에 가까운 파괴적 충동이 휘몰아치는 때가 있다. 혹자에게는 현재,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땐 그랬지'라고 회상할 수 있는 아련한 과거일지도 모른다. 누구의 언제가 되었든 간에, 자전소설에 가까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통스럽지 않을 이는 없으리라, 있다면, 필시 고통스러웠을 누군가를 떠올리리라.
두 번을 연달아 읽고나서야 뒷표지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서로에게 무엇이 될 수도 없었던, 다신 돌아갈 수 없어 아름다운 시절에 대하여..." 돌이킬 수 없어 잔인할만큼 그리운 시절이 있다. 어쩌면 풋내가 난다고 할 수 있는 전작들에 비해 헐씬 원숙미가 돋보이기도, 그러면서 역시 설익은 과일처럼 뜨겁고 아리고, 또 아름다운 청춘에 대한 회상이 아주 절정에 이르렀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시대의 젊음과 젊은이였던 모두에게 권햔다. "인플루언서의 브이로그" 속 정돈되고 화려한 삶이 아니라 냄새나고 구질구질하고 두렵고 또 불안한, 그렇지만 찬란하기 그지없는 현재와 기억을 눈부시게 비추는 경험을 할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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