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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평점 :
*출판사 인플루엔셜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숨쉬는 것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쉴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은 어느 곳을 떠돌다 마침내 흘러가는가.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는가? 어느 밤 갑작스러운 총소리, 비명과 흐느낌만을 남기고 영영 자취를 감춰버린 이들은 이름과 몸을 박탈당하고 어디에 버려졌을까? 만일 생전의 삶 이후에 아주 조금의 기회를 얻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해원(解冤)은 무엇으로 성취될 수 있는가.
p.35 너는 보통 사람보다 시체를 많이 보았고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도 늘 알고 있었다. 촛불을 눌러 끌 때 불꽃이 가는 곳,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 말이 가는 곳이다. (…) 그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있었다가, 그저 없어졌을 뿐이다. 각자의 초에 심지가 다할 때 우리 모두 그럴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졌던, 청산되지 않은 역사를 배경으로 했다고 한다. 그 또한 한국의 존재를, 기적으로 불린 변화를 알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빈국으로 조롱당하는 그 나라에서 얼마 전까지 한국은 가난의 상징과도 같았다고 한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안타까워한다. 내전과 부패, 독재로 파괴된 사회에 혀를 찬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 그들과 우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우리에겐 작가가 그려보이는 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있었다 한들 지나간 이야기라고 털어버릴 수 있는가.
작중 사건들이 오롯이 허구가 아님에 기가 막혀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읽는 내내 사람이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쉽게 죽고 사라져도 되는 존재가 있다고 믿어지는 참상에 화가 나서 이를 악물지 않을 수 없었다.
p.279 "우리는 저 사람들보다 정부군이 더 무서워요. 정부군이 우리 마을을 불태웠어요." 이제 학교를 갓 졸업한 것 같지만 소년병으로 분류되기에는 커버린 소년이 말했다. (…)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거다. 너는 마을 사람들이 총 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문득 정신이 들었는데, 내가 죽었단다. 그건 알겠는데 당신은 누구...인지도 알겠는데, 그래서 여긴 어디인가요. 나는 어떻게 되나요.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밑도끝도 없이, 당황스럽게, 내던져진 것처럼 무력하고 혼란스럽게.
분노와 절망 앞에 (살아있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유령이 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체념하고 등을 돌리기도, 원한에 잡아먹히기도, 정의와 복수라는 이름으로 또다른 학살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 앞에서 주인공은 이야기의 시작처럼 혼란스럽고 무력할 따름이다.
점점 드러나는 죽음의 진상, 주인공 말리 알메이다의 삶, 그의 깊숙하고 진실된 면모를 따라가는 여정에서 독자는 기쁨보다 막막함을,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악은 건재하다. 권력을 등에 업어 힘이 세다. 살아있는 이들은, 나처럼 죽어 잊혀지게 될 이들은, 미처 끝맺지 못한 일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p.331 한때 가슴이 있던 자리에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밀려오고, 눈에 보이지 않는 팔이 쑤신다. '10점 만점'이라는 제목의 봉투 안에 든 모든 사진이 떠오른다. 남이 훔칠 가치는 가장 적으나 그 어떤 사진보다 더 보호해야 할 사진, 네게 그 사진들은 그런 것이다.
이따금 말한다. 난세의 영웅이 기껍지 않다고. 모든 것을 짊어진 한 인간과 무너져내리는 세계에 가득한 고통은 아름답지도, 행복하게 끝나지도 않는다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저버리지 못하는 마음, 울며불며 돌아서는 나약함, 오직 그 가능성만을 믿을 수 있을 뿐이라고.
수많은 영화나 활극에서와는 다르게 그는 무결하지도, 상냥하고 건실하지도 않다. 오히려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구질구질하고 조금은 치사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정의로웠다. 자신이 목도한 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쉬이 사라질 목소리를 결코 잊지 않았다.
골치아프고 제멋대로에 가볍기 짝이 없었던 난봉꾼, 타고난 승부사, 뻔한 패배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기 자신마저 판돈으로 내거는 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 끔찍하고 서러운, 진창 한가운데 더렵혀지고 찌들어있는, 누구보다도 인간이었던 말리. 그가 존재했음을 이다지도 찬란하게 보여줄 일인지.
p.366 게다가 퓰리처 상은 미국인에게만 수여한다. 인도네시아 대학살을 후원한 CIA의 모국, 몰디브 남쪽에 해군기지를 가지고 있는 국가, 이 낙원이라는 땅의 소위 궁전이라는 곳에 심문관 훈련 조교를 보내 주는 국가의 국민에게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처럼 묻혀 잊혀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더는 숨길 수 없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독자는 다시금 주인공을 마주하게 된다.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럽게 웃는 그, 익명의 원혼들에게 비로소 약속할 수 있게 된다. 산 사람이 살아서 해야할 일을 하겠다고. 잊지 않겠다고.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그리하여 이 조각난 기억과 간접진술로 가득한 이야기의 의미를 마주한다. 무명의, 사라진, 알지 못하는, 불완전한 이들을 향한 애도, 살아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상실의 고통에 대한 위로이다. 그들이 이곳에 존재했으며 우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최후이자 최초의 선언.
p.507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바칠 쓸데없는 명분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조차 없다면 왜 굳이 숨을 쉬는가? 돌아보면, 일단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의 색깔을 알아보고 공기를 맛보고 (…) 우리가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말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