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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은행나무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인생사 본질적으로 구질구질하고 못나기 마련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예, 제가 했습니다.
사람 사는 일이 환희와 완벽의 순간으로 가득할 수는 없다고, 결국 사는 일에는 근원적으로 구차한 면이 있다고 말해왔으나 사실 또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는 일에는 고통이 수반되나 고통스러워야만 삶인 것은 아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어쩔 수 없는 고통, 겪지 않아도 되거나 마땅히 처해도 될 이는 없는 고통. 전자가 삶의 본질적 요소로 불리는 고통에 속한다면 후자는 사회의 일면이다. 떠넘겨지는 고통이다.
구조의 틈새에 끼인 존재들, 시스템의 부산물, 제거보다 월등히 저렴한 방임에 의해 유지되고 당연시되는 고통.
우리의 주인공, 전혀 easy하지 않은 인생, 안이지씨의 여정은 그야말로 딱, 궁상맞음이다. 구질구질하고 짜증스럽다. 그의 취급 또한 그렇다. 그는 예술가인 동시에 노동자다. Mass, 대중이다.
그는 많은 경우에 존중받는 사람이 아니다. 지도 위의 파란 점, ‘담당자’의 사정에 따라 미뤄지고 잊혀지는 짐,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동시에 파격적으로 타오를 것을 요구받는 생산자.
가난한 예술가와 그의 열정이 사회의 냉대와 가난에 좌절되는 이야기야 속된 말로 ‘쌔고 쌨으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딱히 달라진 점은 없다. 오히려 예술과 자본의 촘촘한 결탁으로 더 많은 것, 더 높은 강도의 노동, 더 파격적일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모를까.
p.170 내가 거쳐온 동네들이 모두 값이 뛴 것은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값이 뛰었기 때문에 더 싼 곳으로 밀려났던 거니까.
‘굶어죽어도 예술이 좋은’ 이가 아닌, 평범하게 살아온 이상 ‘굶어죽을 각오’를 해야만 시작이라도 해보는 것이 작금의 젊은 예술인 아닌가. 우리의 안이지씨처럼.
그저, 점. 그의 가치는 사회의 하층, 우매한 대중이며 그의 고통은 어깨 한 번 으쓱이는 사이에 말끔히 무시된다. 제자리로, 마땅히 있어야 할... 그의 자리로. 어쩌겠어요. 안그래요?
p.38 그가 내민 휴대폰 화면 속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두 발… 어떤 이동 수단을 사용하든 나는 그저 동그랗고 파란 점으로 요약되었다.
p.112 이렇게 모든 것의 제자리가 있는데 정작 내 자리는 아주 희미해 보였다. 방이 나를 뱉어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진 건 곳곳에서 사소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그러나 사소한 게 아닌) 무신경의 흔적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처량하고 궁상맞은 데다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으며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어긋난다. 엇갈리고 뒤처진다. 숭고한 이상과는 영 거리가 멀다. 형식의 미와 정신은 커녕 선택된 자만이 초대되는 자리에서도 고상한 냉소와 경멸에 시달리고는 야밤에 즉석밥 돌릴 전자레인지를 찾아 헤맨다.
속 시원한 부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전무하다. 끝까지 그는 무시된다. 마지막까지 그는 그 자체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한다. 딱 한 순간, ‘그것’의 공모자가 되는 것만 빼면.
끝끝내 기만적이고 냉소적이다. 작품 내내 독자는 초대받은 불청객, 미덥지 않은 ‘하층민’, 경박한 소비자와 무력한 방관자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그와 우리의 잘못인가? 이건 아마 우리의 잘못이 아닐거야. 맞아. 다 니 잘못이야...
p.273 금기 혹은 생략, 그 둘에 대해 헤아리다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들어왔고 이 전시회의 주인공이 내가 아님이 자명해졌다. (…) 전시 기간 동안 고용된 경호 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보호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린 작품들보다도 한참 뒤에 있었다.
시작부터 결말까지 단 한 순간이라도 통쾌한 부분이 있었다면,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무시되지 않았다면, 상여가 현대 슈퍼카로 와전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멸과 경멸까지도 닿지 못한, 인간의 바운더리에서 밀려나 잊혀지는 인간들. 매캐한 연기와 진짜를 모방한 가짜-진짜, 여전히 지지리 궁상인 몸과 알 수 없는 영혼에 박수를 보낸다. 타오르는 불길에서 감히 살아남아 더이상 진짜가 아니게 된 가짜-진짜에 눈부신 조소를 보낸다.
별 것 아닌 인생, 그 이상의 예술을 위하여. 라이더님, 당신을 위한 스페셜!
p.186 "의미 없어요." "네?"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을 로버트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작가가 사랑하게 되는 구조겠죠. 어떤 경우에든 작가는 사랑하는 걸 불태울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당신은 결국 그것과 사랑에 빠질 겁니다."
p.341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