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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드는 세계 ㅣ 위대한 도시들 2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끔찍한 일이다. 현실 너머의 것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현실 그 자체를 마주한다는 것은. 은유가 아닌 사건 그 자체의 투영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 자신도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겠지만...
하기사 지옥을 그려내는 이는 있어도 지옥 그 자체에 살기를 바라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도시가 된다』 국내 출간으로부터 제법 시간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 년 반 남짓, 그동안 정말이지...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세계는 점점 나빠지기만 할 뿐, 이전의 평범한 삶은 다음 세대에게는 헛꿈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동안 세계는 팬데믹으로 몸부림을 쳤고, 다시금 멀어졌으며, 환상은 무너졌고 적대와 혐오는 일상의 곳곳에 침투해 또다른 대안현실을 형성했다.
그 결과 지금의 우리는 이전의 우리가 남긴 똥(이보다 더 고상한 표현이 가능할 리가?)을 주워담거나, 슬쩍 떠넘겨버리고 모른 척 고개를 돌리거나, 급기야 나만 당할 수 없다며(그나마 태평한 축인데도 엄살은!) 온 사방에 흩뿌리는 중이다.
작중 도시의 화신들, 도시의 생동하는 힘을 끌어모아 파괴에 대항하는 능력을 갖게 된 불완전 초인들은 모두 사회의 주류에서 조금씩 비껴난 존재들이다. 비-백인, 여성, 이민노동자, 비정규직, 탈가정청소년.
어째서 그들은 그들 자신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어느 부분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누군가는 당연히 도시가 자신들의 것이며, “이물질”을 추방함으로써 “순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가?
어쩌다 혐오는 놀이가 되고 군중의 유희가 되었는가? 무엇이 비합리의 끝을 달리는 헛소리들을 단단한 현실로 만들어내는가?
작중 세계는 끔찍하기 짝이 없다. 절망과 공멸로 성큼성큼 나아간다. 성원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은 폭력에 가담한다. 선거유세는 혐오발언의 나열과 다를 것이 없으며, 숫제 콘서트를 방불케 한다.
일상이 재난이 될 때, 사회의 성원이 동등한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할 때, 폭력이 권력과 한 몸이 될 때, 증오가 쾌락과 유희의 광란이 될 때 우리 사회는 꼭 그런 꼴일 것이다.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다. 현실이 끔찍한 상상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셈이다.
p.92 외부인이 주민들을 공격했는데, 그들을 지키고 수호해야 할 경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 아직도 부글거리고 있다. (…) 흑인 여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권리인 정당한 분노를 똑같은 방식으로 표출할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p.174 "하지만 넌 타협하고 싶지 않지? 평등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인데 넌 우리를 평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으니까. (...) 너희의 우월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나 할 수 있는 짓이지. 그래서 우리가 공존하지 못하는 거야. 너희의 그 빌어먹을 오만함 때문에!"
작가는 말한다. 정신차리라고. 당신의, 너의, 나의, 그들의 살갗에서 살랑이는 “안내선”을 보라고. 그 촉수를 보라고. 누군가의 삶을 감히 가치없는 것으로 여기고 지워버리는 일에 초우주적 존재가 가담한대도, 너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대도 이대로 살겠느냐고.
이 세계의 증오가, 혐오가, 폭력이, 되도않는 “순수로의 회귀”가 초현실적 존재를 동원해야만 겨우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짓인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고. 이 미물들아. 하찮은 것들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너희 인간들아.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도시는 더럽고 무질서한 곳이다. 바로 그 다채로움이 도시와 인간들이 숱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게 한 힘이다. 일상의 피로가 있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는 곳. 공생의 장.
p.364 그들 각자의 소소한 뉴욕다움은 생명을 구하고 도시의 장점을 강화해 그에 맞서는 압력을 구축한다. 일종의 예방주사인 셈이다.
과연 이 우리-우주적 위기가 수습될 수 있기는 할까. 전편에서 통 크게 깔아둔 판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자세한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작가가 마블 시리즈 스핀오프 스토리 작가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더니 과연, 꽤나 유쾌한 방식으로 막을 내린다. 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독자 있어요! 여기 아직 있다니까요? 여보세요? 야 나만 빼고 너네들끼리 사랑하지마!!! 그럴거면 나도 끼워줘!!!
예 이상입니다. 이쪽의 스펙타클은 한 숨 돌렸으니 이제 그만 가주시죠. 당신의 현실로, 당신이 만드는 도시로. 저 아래에서 깨어나 약동하는, 무질서한 세계로.
p.438 "통제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에요." (…) 그게 원래의 야생 상태라고요. 생태계는 원래 카오스 수학이에요. 다양하고, 예측하기도 어렵고, 당연히 위험하기도 하죠. 하지만 공격을 받으면 거기 대응하기 마련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작정 다 때려 부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이 머저리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