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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의 세상 - 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
스즈키 이즈미 지음, 최혜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따금, 야... 이거 이상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이상하다... 싶은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읽는 내내 이게 뭐지... 대체 뭐지... 이런 걸 써내는 사람은 대체 뭘까... 를 중얼거리게 하는 그런 책들. 그대로 잊히면 좋으련만, 감상은 으레 질문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무엇이 이상한가? 어떤 이유로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가? 이상함의 기준이 기존 사회의 시선이기 때문이 아닌가? 누구의 입장에서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는가?
무서우리만치 자연스럽고 정교한 가짜 세계에서 독자는 순식간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마치 꿈처럼. 어느 순간 어, 이상한데, 눈치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매끈한 웃음을 만면에 띄운 세계가 등을 떠밀어줄테니. 그래서요? 그런 것 따위 무시해버려요.
굉장히 태연하고 담담하게 돌아있다. 미쳐있다고 해도 딱히 과언은 아닌데, 어차피 인간은 조금씩 미쳐있는 존재가 아닌가요. 소매 마냥 까뒤집은 우리의 내면은 모두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무의식의 총체 아니던가요. 모든 꿈은 이성의 세계를 침범하는 순간 악몽이 되지 않던가요.
여상히 이어지는 작가의 세계를 몇 번이고 곱씹다보면 미묘하게 거슬리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봉합지점의 발견이라고 부르는데, 마치 어울리지 않는 거죽을 뒤집어쓰운 흔적과도 같아 자세히 들여다보고 만져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제목이 그 단서가 된다. 남자는 안중에도 없다. 남성과 비-남성을 나누었을 때의 그 남성, 남자. 존재하기는 한다. 어쨌든간에 등장은 한다. 말도 하고 생각도 하지만, 그의 가치는 0에 수렴한다. 일껏 주인공으로 내세워봐도 그의 의식과 이야기의 초점은 여자에게로 옮겨간다.
당연한 일이다. 제목부터 “여자와 여자의 세계”의 세계가 아닌가. 여자의 세상이다. 여자의 상상으로 구성된 세계이다. 이상한가? 정답이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이상할 이유도, 이상하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그간 당신은 높은 확률로 남자가 만들어낸 “남자와 남자의 세계” 를 읽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이상하다뇨. 참으로 나약하십니다. 아아, 안타까워라.
p.34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이름은 있는데... 심지어 여자들은 자손을 남기기 위해 남성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데도.
p.196 “네 영혼은 나랑은 다른 재료로 이루어져 있나 봐.” 엄마가 말했다. “응, 아마... 아주 질 나쁜 재료일거야.” 나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전반적으로 기괴나 기이보다는 그로테스크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시대감과 더불어 이질감에 뒷걸음치고 싶을 때면 “그래서, 안될까?”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벌리고 묻는 사람의 이미지가 한 데 엉겨있는 느낌이랄까.
여기서 사람을 닮았으되 기존-사람을 닮지 않은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나 또한 기존의 세계를 충실히 답습한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결국은 순응하고 마는, 살아있지 않은 관념적 존재로서의 사회 구성원처럼.
세계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배경으로서의 인간, 최대 가치가 가용 가능한 자원으로서의 인구 정도인 존재. 여자. 여성. 성별이분법적 세계에서 남성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 비-남성-존재들.
p.275 사람들은 얌전하고 밝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 소음이 넘치고, 그러면서도 다시 아주 고요해진 이 동네에서, 각자가 고립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극도로 지루하면서도 즐겁다고 믿으며.
혹자는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없다. 스즈키 이즈미는 개척자이지만 후계자는 없다”고 평했다지만 이런 사람이 또 있는 것도 썩 말랑말랑한 세계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도 그럴 것이, 스즈키 이즈미가 그려낸 세계는 기분나쁜 탄성으로 물렁물렁 말캉말캉하게 일렁이는 곳이 아닌가.
또한 그 자신에게 후계자는 없을지언정 살아남아 그를 읽어낸 비-남성-존재들, 1이 아닌 이들이 현실에 도사리고 있으니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오래된 모멸에 대적하는 경멸, 애완과 성애로 포장된 적의에 반격하는 전복.
정신 차릴 틈도 주지 않겠지만 차린대도 별 달라질 것은 없는, 너무도 당연한 세계. 도구들의 세계. 도구가 아니었던 자는 안중에도 없는 세계. 작가는 살며시 입꼬리를 당기며 묻는다. 그래서, 안될까?
p.343 “좋다. 악몽 같은 세계라니, 좋아.” “약간 혼란스럽긴 해. 어떤 일이 나한테 생긴 건지 드라마 주인공한테 생긴 건지, 잠시 생각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든가. 하지만 그런 건 별거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