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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외롭다. 객관적인 자극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이 한 개체의 내부에서 해석된 결과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주체가 타자의 유무형적 경계를 넘을 수 없기에, 단지 그렇기에 고통은 있는 그대로 공유될 수 없다. 기껏해야 설명, 그마저도 개인 내적으로 해석된 고통을 그의 언어로 재해석한 것, 지극히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내용만이 간신히 내보여질 뿐이다.
그것은 곧 존재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외로움으로 연결된다. 고통의 언어는 비명이다. 호소다. 타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필사적인 의문이다. 왜 이렇게 괴로워야 하느냐고, 대체 이것의 끝은 어디며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고통스러운 사람은 묻는다.
답을, 그것도 만족스러운 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애써도 답을 얻지 못한 자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그저 수동적으로 내맡겨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자는 절망한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미완의 질문을 답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뿐이다. 답이 없다면 만들어내면 된다. 이해할 수 없다면 외워버리면 된다. 주문처럼.
p.21 그는 절망했다. 그의 삶은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달린 전력 질주와 같았다. 무기징역 선고와 함께 그 목표가 사라졌다. 죽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의 삶은 의미를 잃었다.
괴로운 자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2차적 고립이다. 나의 의미가 오직 나만의 믿음일 때, 그것은 쉽사리 무의미한 광신으로 취급된다. 무시된다. 다시금 궁지에 내몰린 자는 동지를 찾는다. 나의 믿음이 우리의 것, 공동의 것이 될 때 그것은 힘을 얻는다. ‘나만 믿고 따르라’ 이끄는 자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무의미에서 오는 절망을 믿음 너머로 던져버린다. 모든 것은 초월 너머로 감춰진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순종과 헌신 뿐이다. 더는 갈등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다. 신의 뜻이 이끌 것이다. 들어주는 존재가 있다.
가자. 나의 믿음이 너의 것이 되도록. 이는 구원을 위한 시련이니, 불신하는 자에게 영원한 ‘그것’ 있으라.
p.128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선의가 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선의의 표현이다. 문제는 상대가 원하리라 생각하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좋은 것을 떠안기는 일을 선의로 착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작가는 선의와 무심, 이기심과 가학의 난장판이 한 데 뒤섞인 것을 보여준다. 상냥하게 풀어헤치지 않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 보세요. 무용의 지옥에서 구했어. 괴롭게 하는 것을 전부 없애버렸어. 구원으로 이끌었어. 분열시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치워버렸어. 받아먹지 못하기에 쑤셔넣었어. 어때, 고마운가요.
p.245 그들은 너무 늦게 알았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알게 된 뒤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고통과 죽음은, 그것이 타인에게 강요되는 경우, 그들의 의도에 대체로 부합했다.
p.290 물리적으로 감각하는 모든 정보를 신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마음은 그것을 고통이라 정의했다. 그러므로 기쁨도, 환희도, 초월도, 아마 구원조차도, 인간이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모두 고통이었다.
알 수 없다. 영원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느낄 수는 없지만 함께할 수 있는, 고통이 연대와 공생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타인의 세계를 비집고 들어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경험마저 빼앗을 수 없다면, 그것을 약탈-대리해 정의할 수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타인의 경계를 부수거나 심지어 그 자체를 파괴해버린대도 그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이것은 절망인가. 그렇지 않다. 그 한계가 시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p.301 흉터는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과 회복에 동반하는 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 뒤에 남는 감정과 기억을 대표했다. (…) 신체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을 간직한 채, 상처 입은 흉터투성이 존재를 떠안고 죽는 순간까지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고통이 고독의 고통으로 자라나지 않으려면 함께 어깨를 들먹이고 온 품으로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인 이를 완전한 고독으로 몰아넣지 않으려면 그의 떨림과 울음에 함께해야 한다. 그 자신의 언어에게 자리가 있어야 한다.
자기 것이 아닌 세계를 자기로 끌어넣어 부서뜨리려는 이에게 맞서 살아남은 흉터가 지나간 기억이 되려면, 부술지언정 부서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알 수 있다. ‘큰 뜻으로 내리신 은총’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더라도. 고통이 없기에 타인의 세계도, 자기자신의 안팎도 알 수 없는 무능한 전능자가 부여하는 시련이 아니더라도.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게조차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함께할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삶에서 의미를 찾아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당신과 나는.
p.320 "너는 내 삶의 어떤 부분을 아주 크게 부숴놨어. 물론 이미 망가져 있어서 차라리 부숴버리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너한테 부탁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너는 내 인생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마음대로 부술 권리가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