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인간 선언 - 기후위기를 넘는 ‘새로운 우리’의 발명
김한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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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대뜸 이렇게 묻는다고 치자. “너는 무엇이냐?” 퍽 당황스러운 질문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나름 예의랍시고 답해본다. 내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이며... 뭐가 더 있나, 머리를 굴리던 차에 또다시 대뜸 말허리를 잘라먹고 묻는다. “너는 무엇이냐?” 직장인이고... 뭐가 더 있나?

이제 짜낼 것도 없다. 억울한 마음에 되묻는다. “그러는 넌 뭐냐?” 애써 답한 보람도 없이, 같은 질문이 되돌아온다. “너는 무엇이냐?” 욱하는 마음에 악을 지른다. “사람이다. 왜!”

그렇다. 사람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지구는 일단 우리가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며 인간으로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잠깐. 정말 지구로 돌아가는가? 원래 있었던 대로, 다시금 생태계의 일부로 돌아가느냔 말이다. 인간이 생물로서 태어나 지구의 일부로 살다 다시금 거대한 순환계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가? 조심스러운 수사를 덧붙이지 않더라도, 답은 ‘아니오’다.

인간은, 적어도 현대 인류의 대부분은 좋게 쳐줘도 쓰레기를 늘리는 쓰레기일 뿐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쓰레기다. 본질적 의미로서의 쓰레기는 어디 쓰임이라도 있다지만 인간은 죽어서도 죽기를, 살아가는 중에도 적당히 살기를 거부하며 살아있는 모든 것의 터전을 깎아먹는 데 열을 올린다.

정말이지 창조적 쓰레기가 아닌가. 좋게 쳐줘도 쓰레기를 뿜어내는 쓰레기다. 자기는 괜찮다며 남의 집을 허문다. 어차피 다들 이러고 산다며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이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p.81 내게 가장 극단적으로 보이는 것은, 기후 자살도 조력자살도 아닌 현상 유지라는 선택이다, 연알 심화하는 기후 재난에 수수방관하는 정치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야말로 극단적으로 안일하고, 극단적으로 무감각하고, 극단적으로 무책임하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떠든다. ‘이 정도는 괜찮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내 일이 아니다’, ‘알지만 싫다’... 자기가 선 곳을 허물어뜨리며 연신 괜찮다는 주문을 되뇌인다.

지구는 너무도 거대하고, 자연은 지금까지도 ‘별 문제 없었’으니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 하나쯤 보탠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어차피 내가 죽을 때까지 지구는 망하지 않으니까’. 이걸 말이라고 하는가.

이게 무슨 짓이냐, 더는 안 된다 항의하는 이들을 추방하고 몰아넣는다. 지금까지의 인간이 인간중심주의의 탈을 쓰고, 자본의 이름으로 해온 짓이다. 안 보이면 없는 척, 뻔히 보여도 모른 척.

순응은 너무나도 쉽다. 책임 면피를 위해 동원되는 절망의 다른 이름은 동조와 비겁함이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단지 상상하기 어렵고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기하는 것은 적극적인 가담이다.

p.104 자본은 절대로 아무 의도나 방향성 없이 가치 중립적으로 투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사람을 특정 방향으로 인도하고 그 경향성을 강화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은 자본의 반대 방향이 아닌 순방향으로 더 빠르고 힘차게 앞서 나가라는 명령이다.


탈인간 선언은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모순에서 출발한다. 오직 인간됨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만이 인간이기를 거부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아닌, ‘이전의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몸부림이다. 영원히 성취될 수 없는 것의 외침은 당장의 시급함을 역설하는 절박함이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다른 생명과 함께하지 않고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공존 아니면 공멸 뿐이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가? 해야한다. 유일한 선택지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할 시간이다.

이것은 비정상인가? 아니, 이제는 유일한 선택지다. 정상이 되어야만 한다. 위기를 넘어 기후절멸로 향하고 있는 지금의 지구에서 인간이 맞닥뜨린 외길이다. 착취를 포기하라.

이제는 말해야 한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인간중심주의가 초래한 기후위기 시대, 이제 우리는 어제의 인간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p.9 탈인간은 먼저 탈인간중심주의의 준말로, 말 그대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그것이 몸부림인 이유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벗어남을 완벽히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세의 비극을 탄생시킨 인간에 대한 반성과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목표로 삼을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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