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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 어떤 공주 이야기
연여름 외 지음 / 고블 / 2023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고블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오래 간직해온 문장이 있다. 어느날 갑자기, 마음에 박혀 잊히지 않는 말, “배경으로 밀려난 이들에게 전경의 지위를 돌려주는 일”. 어렸을 적 읽고 들으며 자라온 공주이야기에는 하나같이 삶을 상실한 여성들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비범한 신분이나 천상의 성품을 타고난 존재로서 유순하고 아름답게 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의 뜻에 따라 삶의 향방을 내맡겼다. 그런 이야기들은 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식의 두루뭉술한 결론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전부일까?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비천하고 저주받은 삶에서 “왕자”를 만나 그의 품안에서 살아갔다고 말해지는 이들의 삶은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그들에게는 꿈이 없었을까? 나와 함께 가자며, 자신이 운명의 짝이라 주장하는 이의 손을 뿌리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만일, 그들이 다른 시대 또는 세계에 존재했다면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아니, 지금을 살아가는 “공주”은 얼마나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 책에 실린 배경도, 시대도, 심지어 종족마저도 다른 여섯 편의 이야기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잘 알려진 옛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주인공이 지고의 선인이라거나 빼어난 미인이라든지, 우연한 행운으로 영원한 행복을 거머쥐었다는 전설인지 괴담인지 모를 모호한 운수대통이 아니다.
그저, 분투하는 여성이 있다. 삶에 맞서고,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이 있다. 그들을 핍박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세계이다.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속한 세계가 그들의 존재를, 삶을, 자유를 부정하는 데 결코 좌절하지 않는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아니 할 수 있대도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벽을 부수고 천장을 뚫고 날아오르는 이들이 있다. 악착같이 생을 거머쥐는 이들이 있다. 설령 온 세계가 그들을 인형, 부속품, 열등한 존재라 깔아뭉갤지라도.
p.102 지구인들은 생식 욕구를 탕으로 끓여서는 인정욕구와 자아 실현과 신성에 대한 욕망이라는 고명으로 장식한 다음, 외모지상주의를 조미료로 뿌린 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라는 그릇에다가 퍼담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모든 여성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안온 다정 무해 삼신기의 성인이냐. 그렇지 않다.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라서, 여성인 동시에 사람이라서 그럴 수는 없다. 누군가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그에게도 그 자신의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등장인물들은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용기를 보이거나 어리석은 경멸에 마음껏 비웃음으로 받아치고, 가시덤불을 온몸으로 헤쳐나가는 용사가 된다. 그뿐인가, 이해라는 이름의 욕심으로 파탄에 이르기까지 한다.
웃고 우는 여성들, 그 모든 것은 수차례 말했듯이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온전한 그들의 선택이 아닌 이유로 뭉뚱그려져 배경 어딘가에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p.134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외국인인 적 없었으나 이방인 노릇은 이골이 났다. 선희의 얼굴이 곧 자격증이었다. (...) 선희는 이 땅에서 태어난 프로 외국인이었고 심심하면 불려나가서 외국인 대표 노릇을 해온 처지였다.
각각의 수록작들은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오래된 토대에 쌓아올린 작금의 현실을 마주하노라면 지금이라고 달라진 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달라졌다. 적어도, 지금의 여성들은 이 고통스럽고 울화통 터지는 세상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알고 있다.
이전까지의 세계에서 어떤 이들에게 여성은 무능하고, 연약하고, 아둔한 존재였다. 부속과 도구 이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그것은 비단 여성이라는 속성 뿐만 아니라 모든 소수자성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능하고 연약하며 아둔해야만 했던 이들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치열하게 부정할수록, 필사적으로 깔아내리고 밀어낼수록 그들은 끈질기게 살아남고 지워질 수 없는 존재의 지위를 공고히한다. 죽임당한 여성이 마녀로 돌아왔듯이.
p.208 “대칸이 저를 좋게 본 건 제가 서른 명을 때려눕혔기 때문이고, 공주라 부르고 융숭하게 대접하는 건 장차 개놈들고 싸워 이기라는 것인데 제가 누구에게 맞아들여지고 누구에게 지켜져서야 되겠어요?”
보라, 가능성을. 들어라, 살아 숨쉬는 이들의 박동을. 그 끝이 사랑, 자유, 파국, 때로는 촌극일지라도 그들은 이제 와 세삼스레 인간이다.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영원히.
p.170 경제적 주체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삶의 부박함이 야속하다고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다. 자식이 죽었거나 말거나 선희 삶은 이어젔다. 딸애를 따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죽는 것도 작심해야 이루어지는데 그런 일을 할 기운도 없었다.
p.227 너른 초원에는 칸들이 거지반 죽고 칸국들의 연합이 와해되었으며 속민들에게는 주인이 없게 되었고 부족들에는 남자가 적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들판과 산과 호수도 전혀 적어지지 않았으므로 남아 있는 가축들이 그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충분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