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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평점 :
일종의 한국 문학계의 경향성, 같은 걸까? 언젠가부터 외로운 사람들의 외로운 이야기들이 별처럼 문단을 수놓는 것은. 어느 서점을 가든, 작게 속삭이는, 쓸쓸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어쩌면, 기실 그러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우리 사회가 외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꽃구경이려니,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 편히 읽거나 아주 짜릿한 오락을 즐기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만큼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 성급히 자란 어린 싹을 보는 마음과도 같다. 위태롭고, 안쓰럽다.
사랑은 영원한가? 적어도 순간에는 그렇게 믿는다. 이 순간이 영원하리라고, 적어도 쉬이 변하지는 않으리란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 사람들은. 영화에서처럼, 소설(와, 지독한 블랙 코미디 같다, 어쩐지)에서처럼 꿈결같고 뜨거운, 모든 것을 이겨내리란 믿음을 주는 사랑을 원하고 또 믿는다.
삶은 본질적으로 외롭다. 물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는 그렇게 고독하다. 그 누구도 본질적으로 침범할 수 없는 존재의 경계, 알 수 없는 마음, 닿을 수 없는 심연.
그래서인지, 작중 "사람"들은 모두 외롭다. 이해를 바라고, 변하지 않으리라 믿으나, 쓸쓸하고, 버림받았다 느끼고, 지나간 것을 포기하지 못하며, 맹세는 쉬이 저버려진다. 그런데도 유달리 콕 집어 잘못한 이를 잡아내기 어렵다. 모두가 사정이 있다는,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말을 이렇게도 전할 수 있던가, 싶을 만큼.
혹자는 이를 두고 패배주의라 할지 모른다. 밑도끝도 없는, 오를 곳도 비켜날 곳도 모르고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흘러가버리는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물을지도 모른다. 그치만 그게 사는 이야기인걸, 지나가는 말로 잘 지내세요, 가볍게 점심이나 한끼 해요, 흘려보내는 말처럼.
p.23 흑회색의 거친 질감 때문인지 처음 윤주가 사진을 건넸을 때 아기는 몹시 외로워 보였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어두운 곳에 갇혀서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지내는 ‘한 점’ 사람의 외로움. 사람은 시작부터가 외롭구나. 고독과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그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고 윤주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야 만날 수 있어, 하고 말했다.
장은진의 사람들은 외롭다. 눅눅하고 습한 외로움이 아니라 고요한 봄날, 실눈을 뜨게 하는 외로움이다. 바깥은 화창하고 해가 지면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도 한데, 이게 아닌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이 손만 쥐었다 펴는 외로움이다. 생의 끝도 하루의 마지막도 아니면서 건조하고 고요한 외로움이다.
전반적으로 덜 자란 이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자랄 일도 없는데 어쩐지 서툴도 연약해,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 감추고 싶은 부분도, 나누지 못하는 부분도 채 갈무리하지 못해 쩝, 입소리나 내고 말아버리는 작은 초라함, 혹은 추레함. 계면쩍은 웃음들.
p.248 문학은 늘 삶을 노래하지만 삶은 문학으로 영위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자 문학이야말로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깨달아버린 나한테 화가 났고, 알려준 세상을 향해서는 분노가 치밀었다.
p.267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쪽에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남은 자국을 지니고 살아가는 건가. 아니 우리는 결국 모두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에 불과한 걸까. 덩어리는 허상인가.
차라리 악다구니라도 쓰지.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나를 안 보고 어딜 보느냐고 화라도 내지. 자존심 상한 날엔 어깃장이라도 놓고 객기라도 부리지.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오가는 길에 숱하게 마주쳤을 법한 사람들, 시선 끝에 흔적처럼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들.
어쩐지 쓸쓸한 마음이 되어 덮고 난 후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기에. 잘 지내시나요. 그래, 그래요... 의미없는 추임새나 주워섬기며 드문드문 섞여드는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다.
눈이 부시다. 화창한 날도 끝내주게 좋은 풍경도 없었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보는 듯하다. 가벼운 먼지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어쩔 수 없니, 그래, 그래요... 의미없는 안부를 묻는다는 말을, 이제 알겠다. 다시 만날지, 기약없는 주억거림으로 창을 닫는다. 이또한 언젠가 다시금 부옇게 떠오를 날이 있으리라 믿으며.
p.71 별난 인생도 없었고, 못난 인생도 없었다. 인생은 누구나 다 그냥 살다가 가는 것이었다. 단 살면서 때만 놓치지 않으면 되었다.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때 빌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는 것,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