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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뒤에서
사라 델 주디체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4월
평점 :
"세상은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어른들끼리 나누는 이야기처럼, 아빠가 숨겨둔 여자처럼 세상의 많은 비밀은 아이들에게 열리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커튼 뒤 비밀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사람들은 숨기고 싶은 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한다. 눈을 질끈 감고 천 한 장 너머로 숨어들면, 혹은 그 너머에서 숨죽이고 있게 하면, 영원히, 아무도 모를 수 있을 것처럼.
기실 '커튼'이라는 것은 얼마나 연약하고 모순적인가. 바깥과 안을 가르고, 보여도 좋은 것과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을 나눈다. "숨긴다"는 의미에서, 그 안팎의 구분은 순전히 자의적이고 너무도 유동적인 것이 된다. 바람에 날리는 천자락처럼.
차마 떨리는 손을 잡아줄 수도 없았던 공포 앞에서 그 모순은 극적으로 드러난다.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더이상 밀려나고 숨을 곳도 없는데. 바깥과 안을 가르는 경계가 무너지고 최후의 '안'마저도 '밖'이 될 때, 손짓 한 번에 젖혀질 그 연약한 경계는 일상에서의 무게를 단숨에 상실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커튼이 갖는 의미를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했듯 최후의 경계, 마지막 남은 연약한 보호. 혹은, 그 너머의 존재를 알 수 없게 하는 우리의 편견.
보이지 않는 것은 무섭다. 알지 못하는 것, 실체를 마주한 적 없는 것은 너무도 쉽게 혐오와 거부의 대상이 된다. 커튼 너머의 아이들은 그렇게 "해충", "유태놈"들이 된다. '있을 것으로 상상되는 존재'에게는 항거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자리는 '이미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그러나 커튼 너머를 들여다보면, 눈을 가리는 것을, 먼지를, 사람이 만들어낸 짜임 띠위를 걷어내면, 그곳에는 그저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이.
p.83 “소피! 소피! 소피!” 누군지 모르겠지만… 소피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우리는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죽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기존에 알려진 2차세계대전 중 유대인의 피해는 주로 독일과 폴란드에 집중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의 수치, 비시 프랑스를 시대를 엿볼 수 있다. 시민의 자유, 권리의 평등 따위는 저버린 역사, 유대인 혐오와 학살 조장, 적극적인 부역의 주체였던, 나라 아닌 나라.
본문에서는 점차 조여오는 독일의 압박과 유대인 박해에 냉담해져가는 프랑스 사회의 면모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나, 현실은 훨씬 참담했다. 예상 밖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아니. 너무도 전형적이었기 때문에. 그 때 그 시기, 그 일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내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점이 있다면 모른 척 감춰졌다는 것뿐이다. 유야무야 넘겨졌을 뿐이다. 그들 스스로 "가장 심하지는"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우리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땐 다 그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p.48 아빠는 뉘른베르크 법이 지성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며 고모에게 고함쳤다. “더 이상 유태인들은 ‘아리안’ 독일인들과 결혼도 못 하게 하고, 투표할 권리를 빼앗고! 상점과 공원의 입장도 금지하고! 의사나 약사, 변호사가 될 수 없도록 하고! 학교도 못 다니게 하는 것이! 그저 안타깝게도 근시안적 사고로 ‘방향을 잃은’ 천재의 생각이라고?”
말 그대로 이전까지의 세계를 뒤흔들어놓은, 사람이 쓰레기처럼, 먼지처럼 흩어져버릴 수 있다는 걸 무너지는 세상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 망각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전쟁 이후, 그리고 다시 이후의 세대가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세계는 또다시 전쟁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학살과 파괴의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꼴로 반복되고 있다. 파괴되었던 이들이, 환난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더불어 또다른 피해자를 낳는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극히 제한된다. 동시에 무서울만큼 정직하게 꿰뚫어본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 이성의 실패라고 불리었던 참극이 반복되는 지금, 어른이 읽어야 할 이야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어린이의 세계를 부수는 어른들, 우리 모두가.
p.127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갑자기 답이 떠올랐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에는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이렇게 간단한데… 다시 태어난다면, 나 자신으로 태어나고 싶다.
*도서제공: 바람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