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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심장 훈련
이서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5월
평점 :
순치는 순화와 다르다. 후자에는 일말의 쌍방 노력이랄지, 기만에 가까운 면피책을 욱여넣어볼 수 있겠으나, 전자는 그 알량한 체면치레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
어린 동물은 세상에 끄집어내지는 순간부터 순치된다. 원석, 짐승의 그것, 형태를 간신히 갖추고 심장이 뛰고 숨을 쉬어야 하는 세계의 규칙으로 다듬어진다. 꺾이고 깎이고 우그러진다. 비정형존재, 무르고 뜨거운 이를 틀에 넣고 꾹 눌러 쾅 두드려 뽑아내면, 짠. 사람이 됩니다.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 "별나지 않은 것".
그것을, 다시 앞으로 돌아가, 순치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버거운 애, 미친 애, 정말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그런 애. 초대장도 없이 불려나온 규칙 바깥의 존재는 그렇게 얻어맞고 멱살을 틀어잡히고 밀어내지고 수치스러워지며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생존을 위한 복종이다.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사람이 된다.
p.80 내 부모는 아주 많은 순간에 나를 수치스러워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수치심을 연기했다. 서울의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 나와 부모를 노려보았고, 그럴 때마다 부모는 성심성의껏 수치심을 공표했다. 저도 제 아이가 부끄럽습니다. 이런 아이를 낳아서 죽도록 죄송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내 부모를 조금 용서했다. 나는 그 모든 걸 나와 무관한 연극을 감상하듯이 지켜보아야 했다.
어른들의 세계를 평정하러 온 명랑소녀들, 그렇다. 평정이란 이전의 것을 부수고 깔아뭉개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지극히 잔인하고 타당한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독하고 절망스러워 유쾌한 행보. 인생은 멀리서 봐야 희극이라지. 이 세계의 여자아이들은 말한다. 아니, 독자를 진창에 처박는다. 자, 이제 비극이 됐죠. 감히 동정하지 마세요. 이것이 나의 세계입니다.
무정한 세계의 어린 신. 부서지고 깨지고 멍들어 도저히 제 몰골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들 절대자는 무엇으로부터 태어났기에 이다지도 지독히 슬프고 끔찍이 고독한가.
p.174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의 투쟁을, 공포를, 두려움과 슬픔을, 그 모든 절박한 성장을 믹서에 갈아 넣어 통째로 들이마시며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우리의 생을 자위 도구로 전락시키려고, 이제야 겨우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여자애들의 앞길에 고약한 정액을 뿌리려고.
p.311 나는 이 모든 게 좋은 경험이었다고, 혹은 성장담이랍시고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랬었다고, 내가 그냥 이렇게 살아왔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젠장, 그냥 이렇게 살아왔다고. 내 생이 겨우 이랬었다고.
하드보일드, 환상, 기록, 그 자체로 거대한 실험, 경계를 무심히 파괴해버리는 무력한 것들. 이 잔인하고 추잡한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린 신, 어쩌면, 초월자. "여자 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고 했던가. 적어도 살려는 둬야 영원 비슷한 무언가에 닿을 수 있을텐데도.
이 세계는 더럽고 잔인하고 추악하며 비참합니다. 얻어맞고 불태워지고 목이 졸리거나 틀어막히는 것들이 것-에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까?
p.110 사내애들은 잘만 자라나면 늠름한 투견이 된다. 그들은 군인이 될 수도 있다. 군인이 된 강아지들은 전쟁 통에 팔다리를 잃는다. 진실을 불편해하는 사람들 덕분에 군인들은 영웅 취급받는다. 하지만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영웅도 다 있단 말인가?
p.289 철조망 군인들. 그들은 망치에 머리통을 얻어맞아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다. 거대한 총을 한 손에 쥔 채 무심하고 불행한 얼굴로 땅을 감시하고 있다. (...) 사실상 감시당하는 것은 그들이며, 그들의 삶은 황폐하고 비극적이다. 군인들은 철조망이라는 거대한 감옥 울타리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고 총을 짊어지고 있다가 무자비하게 죽는다. 가장 비참한 방식 중 하나로 젊은 신체를 훼손당한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인터넷 서점에서 (사랑하는 서점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이서아"를 검색했고 '검색 결과 1건'에 좌절했다. 어째서 나의 세계에 점으로 나타났습니까.
(사심을 담아) 장담컨대, 이 작가의 다음 책을 설명하는 것은 단 한 문장이면 충분할 것이다. "이서아가 왔다". "바로 그 이서아"가 왔다는 말, 무엇으로도 그보다 더한 찬사를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지독한 세계의 저 밑바닥부터 뒤흔들며 뿜어져나오는 것, 창과 벽을 부수고 길을 내는 것, 단 한 번도 길들여지지 않아 거친 강바닥를 찢고 가르며 돌진하는 말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극히 무력하여 흉포한 것이 드디어 이를 드러냈노라고. 처음과 같이, 이제 와 영원히, 이 세계를 평정하러 왔노라고.
p.172 공장장 아주머니 아저씨, 시간 나면 신에게 전해주세요. 그 비참하고 불쌍했던 여자애들이 이렇게 망나니 같은 인간으로 컸습니다. 여전히 생은 고되고 지겹지만 웃는 날도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