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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속보] 독자, "이걸 읽는 내 인생이 코미디... 촌극이 따로 없다" 격분.
풍자란 무엇인가, 부조리한 상황과 권력의 횡포에 맞서 비추어냄으로서 웃음을 유발하고 분노와 좌절을 해소하는 창작 예술의 일종 아닌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현실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르포가 된다. 약간이라도 다른 부분이 있어야, 창작자의 독창적 영역이 있어야 비로소 '허구'에 걸친 존재가 되지 않던가.
그러나 창작물이, 앞서 말했듯, 현실을 그대로 빼다박은 꼴이 되면 더이상 허구의 영역에 안주할 수 없게 된다. 현실이 허구를 재현하든, 허구가 현실을 재현하든, 더이상 웃을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웃음의 여지가 사라져버린다.
그럼에도 웃어야 한다. 있는 힘껏 비웃고 가리켜야 한다. 더이상 어두운 골목길에 숨어들지 않는, 권력의 중심과 번듯한 건물에 신처럼 깃든 하는 우리의 지도자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추잡한 무도한인지 까발려야한다. 정확한 곳을 바라봐야 한다. 브라운관 너머와 조작된 기사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데 어떤 혓바닥은 진실을 뒤바꾸고 재창조하기 때문이다. 어떤 힘은 펜을 부러뜨리고 침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로 넘겨버리는 관심은 무심히, 그러나 누구보다 열렬히 동조하기 때문이다.
교묘한 말재주와 우격다짐 그리고 권력 담합만 있다면, 한순간에 시위대는 폭도가 된다.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의 공구는 군인의 총칼보다 더한 흉기가 된다. 침공은 수호가 되고, 어제의 세포덩어리는 오늘의 억압받는 태아-시민이 된다.
이런 말장난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약자들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흉악범이 된다. 억지와 협잡은 새로운 진실이 되고 정당한 항의는 "부적절하고 거친 표현으로 점철된 불평"이 된다. "나=권력"에 반대하는 모든 이는 "국가의 이름"으로 "처단되어 마땅한 불온세력"이 된다.
p.29 폭력적인 오 개월짜리 아이들이 배 속에서 미국 여성들에게 발길질을 해대는 상황을 미국 정부가 가만히 앉아서 두고 보기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미국의 태아들이 대체로 그 어느 나라의 태아들 못지않게 훌륭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보라, 누가 악마인가. 백주대낮 길거리에서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을 목 졸라 살해하는 자인가, "엄청난 자제력(140)"을 발휘해 단 세 명의 평화로운 시위자만을 쏘아 죽인 자들인가, 유색인 시민의 이름은 고소당할 때나 제대로 적히면 된다는 자인가.
누가 진정으로 '사악한 자'인가. "우리 용감한 전사들의 목숨을 위혐한 보이스카우트들(139)"인가, 체포 위기에 저항하거나 도망치거나 "변호사를 요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하며 고함을 질러(211)"대는 자인가. 침공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이들인가. 거짓을 거짓이라 말하는 자인가.
p.120 미군이 덴마크 영토를 침공했다는 보도는 무엇이든 명백한 거짓이며, 고의적인 사실 왜곡입니다. (...) 그것은 덴마크 영토 침공이 아니라 영어를 사용하는 전세계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이 수 세기 동안 신성하게 여기던 기념물을 덴마크의 점령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작전이었습니다.
p.160 항공 사진에 둥글게 찍힌 물체는 분석 결과 수박임이 확실시되었으나, 우리가 착륙한 시점에는 들판에, 그러니까 '밭'에 없었습니다. (...) 따라서 정보기관은 기습작전 겨우 몇 시간 전에 틀림없이 수박인 그 물체들이 제거되고 대신 그 자리에 우리가 착륙했을 때 발견한 평범한 돌멩이와 감자 줄기가 배치되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밀실에서 오가는 말들이 꼭 소꿉장난같다고, 허튼소리라 비웃을 이가 있을 줄을 잘 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유희같은 말들이, 전쟁과 학살을 놀이로 치부하는 태도가 현실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무고한가? '우리'는 "선량한 시민"인가? 그럴리가 없잖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오로지 '우리 아닌 그들'에 대한 순수한 분노로 타오르는 독자는 손을 들어 처음으로 돌아가세요.
p.71 다행히 이 나라 국민들은 대체로 수동적이고 무관심한 편이라서 언론의 이런 무책임하고 선정적인 보도에 크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p.92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말입니다. 여러분,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 모양을 하든 절대 히피나 광적인 좌파가 아닙니다. (...) 그 속에는 시장에 내놓을 제품과 뜯어먹을 관객을 생각하는 아주 합리적인 사업가가 들어있습니다. 새로 생겨나는 트렌드를 아주 일찌감치 알아차리는 능력도 있죠.
웃음조차 안 나는 현실에 놓인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좌절하고 얌전히 모든 것을 포기하든지, 이 악물고 악이라도 써볼 것인지. 이 책은 후자다. 다분히 후자인 동시에 공격이다. 발버둥이다. 들이받고 까발리기다.
작가는 말한다. 보라고, 직위와 권력의 위엄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아채야 한다고, 권력의 중심지가 실은 협잡꾼 패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회의 눈을 가리고 우스꽝스러운 유희에 심취한 이들이 영영 없애버리려는 것을 보라고. 그는 선언한다. 너희의 어린양, 표밭, 어리석은 유권자는 영원히 순순하지 않다고.
지금도 이 악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 무뢰배, 폭도, "그까짓 놈들"이 권위를 쳐부수러 왔노라고. 웃어라, 그리고 분노하라, 높은 담장과 순진한 '키득거림'과 화려한 수사 뒤의 '진짜 악마'에게, 그 초라한 몰골에.
p.250 역사의 흐름은 우리 편입니다. 우리는 그 흐름을 계속 우리 편으로 묶어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옳은 편이니까요. 우리가 악의 편이니까요. (...) 우리 자녀들, 자녀들의 자녀들은 올바름과 평화의 끔찍한 고통을 결코 모르게 할 겁니다.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