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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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감상 전에 "여자"를 정의하는 일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숱한 작품들에서 "여자"란 어떤 기호와 제약에 촘촘히 묶인 존재였다. 당연한 주인공, 제1존재로서의 "남자"가 아닌 모든 존재들을 '남자-아님'="여자"로 대충 퉁쳐버리면서도 역설적으로 "여자"에 '부여되어야만 하는 기호'를 수없이 정의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자"로 낙인찍히는, '여자-되기'를 부여받는 존재를 모두 '여자'로 칭하기로 한다. 여기서의 '여자'는 젠더정체성이나 사회적 정의가 아닌 '기존 사회에서 "여자"로 취급당하는 존재들'에 가깝다.

그럼 나머지는 무엇이라 불리는가요? 그건 내 알바 아니지요... 그들에게 이름이 있든 없든. 대강 묶어 "남성" 정도로 해둘까. 너무한가. 그러나 이는 다분히 애트우드의 세계에 근거한다.

이 책의 아홉, 어쩌면 하나일 이야기들에는 사악한 상상과 무자비한 손속이 가득하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들을 탓하랴? 설사 반항의 기색이라도 내비친들 그 하찮고 무의미한 시도에 비웃음을 되돌려주지 않을 수 있으랴?


"여자"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되돌려주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개중 손쉬운 쪽은 기존의 도식을 그대로 베껴다 뒤집어 그려내거나 여자-아님의 존재를 세계에서 지워버리는 일일 테다. 그러나 애트우드에겐 어림도 없는 듯하다. 그는 태연히 '여자-아님'에게도 자리를 권한다. 여기 앉으세요. 추잡하고 딱한 것.

'사람'이 아니다. '것'이다. 볼품없는 '것', 아무리 용을 써도 툭 털어내고 나면 잊혀지고 마는 '것'. 발치를 맴돌며 옷자락에 똥이나 묻히는 개보다도 못한 '것'. 개는 사랑스럽기라도 하지.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할 이유조차 되지 않는 '것'.

그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대단한 수사가 필요치 않다. 그저, '것'으로 표현되는 정도로 충분하다. 그들에게 비극적인 사연이나 존재의 위기를 있었든 아니든, 그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아무튼 있-기는하-다. 길가의 돌멩이나 현관의 계단이나 망가진 장식이나... 그 정도의 무게로.

p.283 뭘 원하는 거야? 잭은 힘없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야? 이레나는 결코 말해 주려 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잭은 애써 슬픔을 묻어 두었지만 그런 식으로 묻어 둔 것들이 대개 그렇듯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냉장고 속의 여자"라는 말이 있다. 작중 남성 캐릭터의 서사를 위해 희생되어 일종의 사물, 그것도 냉장고 속에서 발견되는 잊혀진-사물로 취급되는 여성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작중 남성 캐릭터들의 가치를 평가하자면, '냉장고 구석에 처박아뒀다 잊어버린 것을 오랜만에 찾아냈더니 도대체 언제, 왜 넣어둔 건지 알 수도 없을 정도'가 아닐까. 그들은 하나같이 희미하다. 그들은 무력하고 아둔하다.

물론 어떤 남성들은 사악하다. 비열한데다 역겹기까지 하다. 그들은 누군가의 삶에 기생하거나 침범해 모욕하고는 유유히 자신의 삶을 산다. 어떠한 죄책감을 갖지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하지도 않는다.

p.158 "사실, 개빈을 알핀랜드에 넣었어요. (...) 안전하게 지켜 주려고요. (...) 그리고 정말 안전하게 지켜 주었어요. 와인통에 있었거든요. 거기서 50년 동안 잠들어 있었죠."


그들, '여자-아님'들에게 "여자"는 당연히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의 일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오만하고 유해한 존재, 애트우드의 세계의 그들은 오물, 찌꺼기, 이건 대체 누가 들고 왔는가?에 가까운 잔해에 가깝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이 책의 수록작들은 온통 사악한 상상으로 가득차있다. 정의롭고 관대한 여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삶을 사는, 당연한 여자들과 떨거지(...)같은 '여자-아님'들이 존재할 뿐.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 누가 그들에게 경악할 수 있는가? 그 사악함에 "어떻게 감히"를 외치는 자야말로 "감히 주제에 입을 놀리는" '것'일텐데. 마음껏 유쾌하라. 마음껏 낭떠러지로 '것'들을 떠밀고 비웃으라. '것'들의 하찮은 자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될테니.

p.316 어째서 그날 밤에 벌어진 일로 버나만 고통받아야 햇던 걸끼? 버나는 물론 바보였다. 하지만 밥은 사악했다. 그리고 밥은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 없이 무탈히 상황을 모면한 데 반해, 버나의 인생은 통째로 뒤틀리고 말았다. (...) 버나에게 강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약자는 무자비하게 착취당해야 마땅하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밥이었다.


*도서제공: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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