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대처하는 자세 - 혼란의 늪에서 벗어나기
린다 로세티 지음, 윤효원 옮김 / 싱긋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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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이라서,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혼란과 불안에 마주한다. 다행히도(!) 정신의학의 발전으로 약물과 상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결국 "치료"의 종결점은 개인이 불안과 혼란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안전한 둥지에서 몸을 웅크리고 마음을 닫아 위안을 얻는 것만으로는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살아갈 힘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다.

이 책은 병적인 불안을 다루지 않는다. 당장의 회복이 급할만큼 파괴된 내면을 다루지도 않는다. 그것은 병원과 상담기관의 몫으로 두자. 대신, 변화는 혼돈이며 곧 재앙이라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불확실한 미래와 떠나온 과거를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 법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무너지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p.36 더 큰 효과 또는 영향을 지닌 혼란을 경험한 사람은 더없이 좋은 기회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혼란을 '게이트웨이 혼란'이라고 한다. 비록 사회적 통념과 종종 반대되는 경우도 있지만 게이트웨이 혼란은 정체성을 활기차고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준다.

p.59 혼란은 성숙도, 중심성, 발달 단계에 관계없이 정체성의 모든 요소와 관련되어 있다. 가장 좋은 소식은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사랑가는 동안 여러 가지 긍정적인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변화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대체 뭐가 문제인가.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간신히 주변을 볼 여유를 찾으니 폐허가 된 일상과 변함없이 굴러가는 세계가 있었다. 약도 상담도 그 자체로는 바꿔주지 않는 현실이,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들이 남았다. 오롯이 내가 꾸려나가야 할, 나의 영역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노력에도 다치지 않을 수는 없다면, 불안과 혼란에 떠는 밤을 피할 수 없다면, 삶의 어느 순간에 필연히 길을 잃고 완전히 무능해진 자신을 마주해야만 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흔들리고 뒤집어지고, 때로는 금이 가고 부서지기 직전인 자아라는 배를 타고도 막막한 밤을 건널 수 있다고, 살아낼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p.66 선택에 관한 우리의 관심은 범주에 관한 문제나 "X의 경우, Y를 하라"라는 식의 공식적인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당신과 선택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그 새로운 관점을 통해 스스로에게 추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p.84 우리의 목소리는 성장의 반복적인 특성 때문에 힘을 얻는다. 단 한 번 내디딘 걸음만으로는 자신감에 불이 붙거나 자기인식이 높아지지 않는다. 우리의 인생관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진실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디는 역동성에 있다.


살아내려는 인간에게는 근거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방법이 필요하다. 혼돈에 맥없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 포용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노를 저을 수 있는 방법이. 이 책은 지금 당장의 혼란과 불안에 휩쓸릴 것인지, 뭐라도 해볼 것인지, 그를 묻는다. 과거는 변한다. 미래는 정해진 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은 없앨 수 없지만, 다르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아쉬운 일이겠으나, 이것은 이대로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마법의 주문을 외운대도 온 우주의 행운을 끌어다 주지 않는다. 그렇게 읽지 않았고, 저자도 그렇게 하기를 권하지 않는다.

p.179 우리 자신에 대한 기대를 인식하는 것은 변화에 강력한 원동력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에 대한 기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성장이 정체성의 핵심에 놓인 기대를 재검토하려는 의지와 함께한다는 의지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p.205 우리는 이야기 재설계를 통해 우리 자신과 더 많은 연결을 활성화하고 우리의 진실이 얼마나 더 많이 알려지게 될지 호기심을 갖는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새롭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 책은 일종의 팁이자 가이드북이다. 성공 신화도 구원의 서도 아니다. 그저 방법이다. 비법이 아니다. 다만, 이대로 끝내기엔 인생은 길고, 해야 할 일은 많다. 할 수 있는 일도. 사람은 그렇게까지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 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낼 수 있다.

괜찮아질 수 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정해주는 이야기대로, 파국으로 떠밀려가지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낼 수 있다. 매일이 덜덜덜덜 바들바들인 사람으로 말하건대, 할 수 있다. 우리에겐 스스로의 세계를 세워낼 힘이 있다.

p.210 우리의 결정은 보편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어떤 사람과는 관계를 단절할 수 있고, 관계가 제자리걸음인 경우도 있으며, 상대와 관계를 강화하기도 하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도 있다. 관계에 '정답'은 없다. 중요한 점은 우리를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p.217 누군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들에게 쉽게 결정권을 넘기기 쉽다. 그들의 확신은 변화와 불확실성의 폭풍 속에서 안전한 피난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당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스스로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한 아무도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고, 믿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떠올리기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도서제공: 싱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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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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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무도 찾지 않는 섬, 섬이라기보단 차라리 바위에 가까운, 바다 한구석에 외따로 떨어진 곳에, 등대지기가 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말 없는 하루, 척박한 돌무더기 섬. 반복되는 일상, 맴도는 기억. 이렇게 살다가 죽음에 다다를 것이라고, 스스로를 유폐한 가난한 경비병이 있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고립된 땅에 어느날 한 남자가 밀려온다. 이름도, 말도 알 수 없는 그저 어떤 남자. 간간이 시신만이 밀려오는 물가에 떠밀려온, 살아있는 남자. 등대지기 새뮤얼의 일상은 그렇게 조금 소란스러워진다. 연약하고 비루한 평화, 적막에 가까운 그것을 깨트린 존재.

p.25 저 남자가 언제까지 살아 있을까? 새뮤얼의 집, 새뮤얼의 카펫 위에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 있게 될까? (...) 작은 오두막을 점령하며 바닥과 벽으로 스며든 이 숨결, 이 맥박, 이 젊음, 이 생명. 새뮤얼은 숨이 막히고 내면의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였다.

p.37 남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걸인처럼 두 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새뮤얼이 가족과 함께 도시로 강제이주 된 어린 시절에 동생과 함께했던 손동작이다. 감옥에서 23년을 보내고 나와 다시 거리로 내쫓겼을 때, 중년의 나이에도 늙은이처럼 관절염에 걸린 손으로 했던 손동작이기도 하다.


되찾아진 자유는 허상이었다. 여전히 가난한 땅에 이름만 달리한 권력이 들어섰다. 무력함에 조소하고 변화의 주축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던 젊음은 어디에서도, 자기 자신에게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뿌리-없음의 자가 된다. '왕궁'에 젊음도 신념도 미래도,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빼앗긴 채로. 폭력과 피. 이 땅의 유산은 그뿐이다.

폭력은 으레 불가피함의 이름으로 퍼부어진다. 혼돈을 제압하기 위해, 더 큰 뜻을 위해, 질서를 되찾고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말해지지 않는가? 어쩔 수 없었다고,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고.

p.53 사람들은 대개 묻지도 않고 가져갔고, 완력을 사용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집을 부수고, 위협하고, 사람을 죽였다. 무리를 지어 마을에 몰려가 상점을 약탈하고 먹을거리와 콩 자루를 들고 달아났다. (...) "우리는 우리 걸 빼앗겼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우리가, 모든 걸 도둑맞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한단 말이냐?"

p.79 독립한 나라에서 달아나는 사람들을 태운 비행기들이 며칠 동안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수도에서는 대통령 당선인이 벌써 조각상과 분수 하나를 세우라고 주문했고. 자신의 새 관저를 설계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러는 동안 저 아래에서 사람들은 늘 그래왔듯. 무너진 돌무더기를 뒤지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말이 되지 못한 말이, 어설프게 쏟아져내릴 때, 그래, 내뱉어지거나 전해진다기보다 가진 것을 모두 내놓듯이 바닥으로 쏟아져내릴 때,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채 살려달라고 비는 이를 내리칠 수 없었다고. 짓눌린 자의 숨이 꺾이고 눈동자가 넘어갈 때, 차마 끝까지 숨통을 틀어쥐고 있을 수 없었다고.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고통스럽게도, 이것은 인간성의 회복 내지는 숭고한 선의를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쉽게 파괴되고 동시에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는지를 말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부서져버리는 것, 영영 망가뜨려버리는 것. 간신히 살아남아 차마 사라지지 않는 것.

p.98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동자를 굴리는 얼굴 표정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남자는 두 손을 모으며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새뮤얼을 올려다보았다. "사려주." 남자가 말했다. "사려주, 사려주, 사려주." 그 말이 "살려주세요"임을 새뮤얼이 부정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말했다. 새뮤얼이 어딘가에서 들었던 그 문장, 어딘가에서 배웠던 그 말뜻, 그 소리가 지금 절박하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p.216 새뮤얼은 끝내 손아귀 힘을 풀었다. 더는 군인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눈앞에서 목숨이 스러지는 걸 볼 수가 없었다. 손아귀에 눌린 목덜미의 느낌, 입술을 푸르르 떨며 거품을 무는 모습, 다리를 할퀴는 군인의 손가락. 새뮤얼은 손을 거두 고 뒤로 물러앉아 군인이 눈을 홉뜨며 숨을 몰아쉬는 걸 지켜 보았다.


세상을 등지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고립되기를 택한 이는 낯선 이를 진심으로 환대할 수 있는 자이며, 연대가 부서지는 순간 비로소 살인자가 된다.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속죄하지 못했다. 환대와 신뢰가 사라진 자리에 채 끝내지 못한 애도와 상실이 남았다.

그렇게 섬은 다시금 "여린 맥박과 가냘픈 숨결"이 사라진, 침묵의 땅이 된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세계는 존재하고 하루는 흘러간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머리 위로 돌을 들어 사람을 내려치는 손은, 죽은 이를 덮어주는 그것과 얼마나 닮았는가. 존재는 섬인가? 고독한 섬의 상처입은 영혼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p.251 새뮤얼은 남자가 이 손짓을 하는 걸 처음 보았고, 이제껏 희망이 없던 장소에서 희망의 작은 꽃송이를 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 소중한 것이 있다. 언어의 시작,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흉내 내기가 아닌, 진짜로 할 수 있는 말이 생긴 것이다.

p.264 새뮤얼은 서로 위로하고 돕던 시간의 따뜻함을 잊었다. 그의 섬을 함께 나눌 아들 래시에 대한 갈망도 잊었다. 어떤 것도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안에 비겁하게 자리했던 모든 게 분노로 돌변했다. (...) 남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입에서 말이 되지 못한 헐떡거리는 질문을 던지며, 남자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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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 신화에 가려진 여자
제시 버튼 지음, 올리비아 로메네크 길 그림, 이진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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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야기, 인간 사회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신화는 누구의 이름으로 쓰여졌는가? 이야기가 전제하는 "인간"과 그들의 운명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옳은 것, 가치, 수용해야만 할 운명... 그것들은 어떻게 다른 길을 지우고 거부하는 이를 추방하는 세계를 구축하는가?

이야기만큼이나 오래된 의문이다. 지워지는 길에 선 사람들, 경계를 부수고 나가는 이들, 끊임없이 순응을 거부하는 목소리들리 이야기 이전에도, 지금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듣지 않았던 이야기에, 숨겨지고 쫓겨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질서있게 정렬된 세계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권력을 뒤흔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p.9 내가 눈빛만으로 남자를 죽였다고 말하면, 당신은 나머지 이야기를 듣겠는가?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듣겠는가? 아니면 나에게서 도망치겠는가? 이 흐릿한 고대의 거울로부터, 이 기이한 육체로부터 도망치겠는가?


메두사는 괴물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탓에, 감히 신을 유혹했고 교만으로 다른 신을 모욕했기에 벌 받은 자다. 악녀, 적어도 사람으로도 남지 못하고, "퇴치되어야 할" 존재로 격하되었다. 정말 그러한가? 그는 누군가의 영웅-되기를 위해, 죽기 위해 태어날 운명이었나? 교만하고 타락한 여자였나?

여기서 우리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느냐'는, 익숙한 의심, 힐난, 수군거림을 마주한다. 그러나 불 질러진 집에서도 연기는 나는 법이다. 세상은 침묵당하는 이의 저항을 너무도 쉽게 넘겨짚는다. 생각을 사실이라 믿으며, 그것을 진실로 만드는 일만큼 쉬운 것도 없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무도 묻지 않고 듣지 않는다.

p.85 "예쁜 여자라는 말보다는 잘생긴 남자라는 말을 듣는 편이 더 쉬울 것 같아. 여자한테 아름답다는 말이 따라붙으면, 그게 곧 그 애의 존재의 본질이 되거든. 그 애가 가진 다른 모든 가능성을 덮어버려. 남자는 그 사실이 다른 모든 가능성을 덮어버리진 않잖아."

p.147 "약속을 했다고요? 허락을 했다고요? (...) 메두사가 당신의 신전에 초를 밝혀놓고 그 짐승한테 초대장을 보내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 강요당한 약속은 언제는 깨어지는 게 옳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 메두사는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당신이 메두사를 보호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따지려면 메두사가 아닌 포세이돈에게 가서 따져요."


그렇게 "다물게 하기 쉬운 쪽"의 말은 지워진다. 몇 번이고, 어디서든. 남겨진 바가 없으니 다르지 않다고 믿어진다. 세상 일은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법이라던가. 그렇다면 말을, 경청을 빼앗긴, 파묻히고 등돌려져 깨끗하게 지워진 목소리의 주인은 언제나 지는 법일까.

이 책은 '다시 쓰기'를 넘어, 일종의 당연한 세계선이다. 사악한 여자들, 메데이아, 키르케, 메두사에 이르기까지, 추방된 이들에게 빼앗긴 목소리를, 그 자신의 서사를, 사라지지 않을 자리를, 마땅한 세계를 돌려주려는 시도다.

읽는 내내, 줄곧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말하고 있잖아. 사람이 말을 하면 일단 들어야 할 게 아니냐고. 빼앗기고 쥐어흔들리는 이가 뿌리치고 악을 쓸 줄은 정말 몰랐냐고. 더는 참지 않는다.

p.178 "조용히 해봐, 페르세우스. 내가 얘기하고 있잖아."

p.193 "페르세우스, 그만 눈을 뜨고 똑바로 봐. 난 살고 싶은 것뿐이야. 그저 나 자신이고 싶은 것뿐이라고. (...) 내가 내가 나를 방어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면, 넌 네 어머니의 시련을 지켜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거야."


벽 너머의 메두사는, 죽임당하기를 거부하는 이는, 잊혀지지 않은 이야기는 세계를 응시한다. 맞받아친다. 쏘아본다. 눈을 피하지 않고. 규범, 진리, 운명... 어떤 이름을 빌든, 두려움은 생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이 또한 진실이 아니던가.

이것은 이야기다. 신화이자 가능성이고, 진실이자 사실이다. 죽지 않은 것은 언젠가 돌아온다. 누구도 파괴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흘러넘치고 뻗어 나가 닿을 것이다. 태어난 이들에게, 감히 사악하고 교만하다 불릴 여자들에게.

p.207 그가 나를 베려고 칼을 높이 든 순간, 이미 우리 중 한 사람은 살아서 동굴을 나갈 수 없었다. 그가 나를 공격한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혹은 그가 생각하는 나라는 이유로, 그 자신의 결말을 위해 나를 파괴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것, 그건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p.216 나는 앞으로 수백 년을 살며 대륙과 바다, 제국과 문화를 넘나들 것이다. 동상과 달리 신화는 부술 수도 없고 절벽에 세워둘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화는 스스로 기억되는 길을 찾는다. 신화는 얕은 무덤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찬란하게 솟아오른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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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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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흄세 시리즈와 역자를 믿고 펀딩했습니다. 역시 틀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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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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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포기했는가? 언제부터 꿈을 누르고, 목소리를 낮추고, 당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세계에 편입하려 애쓰던 시간을 잊었는가?

어린 여자, 이방인이 이른바 "주류"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죽을만큼 외롭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짐승이, 표본이 된다. 숨을 죽이고 눈을 내리깔고, 순종하여 이름마저 지워질 것을 요구받는다. 그래야만 그들의 "우리"를 뒤따를 것을, 주변을 맴돌 것을 허락받을 수 있다.

세상에 내놓기에는 너무 위험해 많이 배우고 문명화된 소수가 "보호"해야만 할 존재, 영원히 닫혀야할 문, 권력과 지식처럼 독점되어야만 하는, 상상조차 해서는 안될 자유.

견뎌야 해, 재뉴어리.

p.41 런던에서 아프리카인은 유색인으로 취급되는지, 그렇다면 나도 거기에 포함되는지 궁금했다. 나는 몸이 살짝 오싹해질 만큼 갈망을 느꼈다. 큰 무리의 일원이 되어 타인의 시선을 끌지 않고, 내 분수를 정확히 알고 싶은 갈망이었다. 알고 보니 '유일무이한 표본'으로 사는 건 외로웠다.


꽉 막힌 규범과 오래된 권력은 교묘하고 촘촘해 마치 상식처럼 세계를 옭아매고 있어 이방인, 어긋나는 것, 이레귤러, 우리-아닌 자, "인간 짐승"의 숨통을 죄인다. 그것들은 이름을 바꿔가며 나타난다. 문명, 지식, 정상... 때로는 사랑까지도 참칭하며.

그러나, 당연하게도, 날개를 꺾고 팔다리를 잘라 영구히 썩지 않는 표본으로 만들어 자격있는 신사와 귀부인만이 초대받아 관람하는 전시실, 다락방, 오래된 성채와 거대한 저택의 어딘가에 처박아두는, 이름과 얼굴과 시간을 빼앗아 숨겨두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벽도, 밀실도 아니야, 재뉴어리.

p.32 나를 살피는 로크 씨의 표정을 보니 옛날 화가들이 그린 하느님이 떠올랐다. 이리저리 저울질하고 평가하여 당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결과가 나온 후에야 사랑을 주는, 가혹하리만치 가부장적인 하느님. 그의 눈빛은 바위처럼 날 내리눌렀다. "이제부터 넌 분수를 파악하고 착한 아이가 돼야 해." 나는 간절히 로크 씨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p.259 진정한 사랑은 결코 침체되지 않는다. 사실 사랑은 문이나 다름없어서 기적적이고 위험한 가지각색의 일들이 들어올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은 위험을 동반한다. 자유는 다름의 가능성이다. 불확실성과 위험을 끌어안는 모험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자유를 품는다. 희망한다는 것은, 지금-여기가 아닌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손을 뻗어 문을 그리고 길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저앉고 부서지기를 요구받는 자, 소리없이 존재해야만 자리를 적선받는 자- 는 곧 경계를 넘는 자, 멈추지 않는 배, 하늘과 바다를 뒤집어 가장 높게, 멀리 나는 새다. 시작의 이름으로 불리는, 최초를 열어젖히는 자다. 살아남아, 재뉴어리.

p.342 네 엄마는 네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다. 위험할 정도로 자유롭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모든 문이 네 앞에 열려 있는 삶.

p.354 어쩌면 더 절망적이면서도 순진한 희망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 나보다 더 용감하고, 더 훌륭한 누군가가 내 죄를 대신 속죄하고, 내가 실패한 일을 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이 세상을 그 형제들과 단절시켜 척박하고 오로지 이성만 지배하며 지독히 외로운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어둠의 조직과 누군가가 싸워줄지 모른다는 희망. 누군가가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 있는 열쇠가 되어 문들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작가는 현실도피라는 간단하고 기만적인 해법 대신 그를 희망없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도망치는 대신 자유로이 항해하는 자로, 바람처럼 불어와 경계를 넘는 자로. 그 덕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자아찾기, "문명 유럽"에서의 유색인종, 상상과 희망의 힘...

그러나 어떻게 읽더라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실 너머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재뉴어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닫힌 벽이 아니니까, 유순한 애완-인간의 세계는 기어코 산산이 깨지고야 말 테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대도, 포기할 수 없는 자유가 있으니까. 문을 열어, 재뉴어리. 살아가, 너로 살아, 재뉴어리.

p.505 세상은 결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닫히고 숨 막히고 안전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둔 저택과 같아야 한다.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여름비가 들이치고, 옷장은 마법의 통로가 되어야 하고, 다락에는 비밀 보물 상자가 있어야 한다.

p.533 "쉿,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제가 가끔 겁에 질렸고, 상처 받았고, 혼자였지만 결국 이겨냈다는 거죠. 전 이제 자유예요. 그리고 이게 자유를 얻은 대가라면 전 기꺼이 치를 거고요. (...)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도서제공: 밝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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