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평점 :
당신은 언제,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포기했는가? 언제부터 꿈을 누르고, 목소리를 낮추고, 당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세계에 편입하려 애쓰던 시간을 잊었는가?
어린 여자, 이방인이 이른바 "주류"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죽을만큼 외롭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짐승이, 표본이 된다. 숨을 죽이고 눈을 내리깔고, 순종하여 이름마저 지워질 것을 요구받는다. 그래야만 그들의 "우리"를 뒤따를 것을, 주변을 맴돌 것을 허락받을 수 있다.
세상에 내놓기에는 너무 위험해 많이 배우고 문명화된 소수가 "보호"해야만 할 존재, 영원히 닫혀야할 문, 권력과 지식처럼 독점되어야만 하는, 상상조차 해서는 안될 자유.
견뎌야 해, 재뉴어리.
p.41 런던에서 아프리카인은 유색인으로 취급되는지, 그렇다면 나도 거기에 포함되는지 궁금했다. 나는 몸이 살짝 오싹해질 만큼 갈망을 느꼈다. 큰 무리의 일원이 되어 타인의 시선을 끌지 않고, 내 분수를 정확히 알고 싶은 갈망이었다. 알고 보니 '유일무이한 표본'으로 사는 건 외로웠다.
꽉 막힌 규범과 오래된 권력은 교묘하고 촘촘해 마치 상식처럼 세계를 옭아매고 있어 이방인, 어긋나는 것, 이레귤러, 우리-아닌 자, "인간 짐승"의 숨통을 죄인다. 그것들은 이름을 바꿔가며 나타난다. 문명, 지식, 정상... 때로는 사랑까지도 참칭하며.
그러나, 당연하게도, 날개를 꺾고 팔다리를 잘라 영구히 썩지 않는 표본으로 만들어 자격있는 신사와 귀부인만이 초대받아 관람하는 전시실, 다락방, 오래된 성채와 거대한 저택의 어딘가에 처박아두는, 이름과 얼굴과 시간을 빼앗아 숨겨두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벽도, 밀실도 아니야, 재뉴어리.
p.32 나를 살피는 로크 씨의 표정을 보니 옛날 화가들이 그린 하느님이 떠올랐다. 이리저리 저울질하고 평가하여 당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결과가 나온 후에야 사랑을 주는, 가혹하리만치 가부장적인 하느님. 그의 눈빛은 바위처럼 날 내리눌렀다. "이제부터 넌 분수를 파악하고 착한 아이가 돼야 해." 나는 간절히 로크 씨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p.259 진정한 사랑은 결코 침체되지 않는다. 사실 사랑은 문이나 다름없어서 기적적이고 위험한 가지각색의 일들이 들어올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은 위험을 동반한다. 자유는 다름의 가능성이다. 불확실성과 위험을 끌어안는 모험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자유를 품는다. 희망한다는 것은, 지금-여기가 아닌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손을 뻗어 문을 그리고 길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저앉고 부서지기를 요구받는 자, 소리없이 존재해야만 자리를 적선받는 자- 는 곧 경계를 넘는 자, 멈추지 않는 배, 하늘과 바다를 뒤집어 가장 높게, 멀리 나는 새다. 시작의 이름으로 불리는, 최초를 열어젖히는 자다. 살아남아, 재뉴어리.
p.342 네 엄마는 네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다. 위험할 정도로 자유롭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모든 문이 네 앞에 열려 있는 삶.
p.354 어쩌면 더 절망적이면서도 순진한 희망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 나보다 더 용감하고, 더 훌륭한 누군가가 내 죄를 대신 속죄하고, 내가 실패한 일을 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이 세상을 그 형제들과 단절시켜 척박하고 오로지 이성만 지배하며 지독히 외로운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어둠의 조직과 누군가가 싸워줄지 모른다는 희망. 누군가가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 있는 열쇠가 되어 문들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작가는 현실도피라는 간단하고 기만적인 해법 대신 그를 희망없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도망치는 대신 자유로이 항해하는 자로, 바람처럼 불어와 경계를 넘는 자로. 그 덕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자아찾기, "문명 유럽"에서의 유색인종, 상상과 희망의 힘...
그러나 어떻게 읽더라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실 너머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재뉴어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닫힌 벽이 아니니까, 유순한 애완-인간의 세계는 기어코 산산이 깨지고야 말 테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대도, 포기할 수 없는 자유가 있으니까. 문을 열어, 재뉴어리. 살아가, 너로 살아, 재뉴어리.
p.505 세상은 결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닫히고 숨 막히고 안전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둔 저택과 같아야 한다.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여름비가 들이치고, 옷장은 마법의 통로가 되어야 하고, 다락에는 비밀 보물 상자가 있어야 한다.
p.533 "쉿,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제가 가끔 겁에 질렸고, 상처 받았고, 혼자였지만 결국 이겨냈다는 거죠. 전 이제 자유예요. 그리고 이게 자유를 얻은 대가라면 전 기꺼이 치를 거고요. (...)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도서제공: 밝은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