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아무도 찾지 않는 섬, 섬이라기보단 차라리 바위에 가까운, 바다 한구석에 외따로 떨어진 곳에, 등대지기가 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말 없는 하루, 척박한 돌무더기 섬. 반복되는 일상, 맴도는 기억. 이렇게 살다가 죽음에 다다를 것이라고, 스스로를 유폐한 가난한 경비병이 있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고립된 땅에 어느날 한 남자가 밀려온다. 이름도, 말도 알 수 없는 그저 어떤 남자. 간간이 시신만이 밀려오는 물가에 떠밀려온, 살아있는 남자. 등대지기 새뮤얼의 일상은 그렇게 조금 소란스러워진다. 연약하고 비루한 평화, 적막에 가까운 그것을 깨트린 존재.

p.25 저 남자가 언제까지 살아 있을까? 새뮤얼의 집, 새뮤얼의 카펫 위에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 있게 될까? (...) 작은 오두막을 점령하며 바닥과 벽으로 스며든 이 숨결, 이 맥박, 이 젊음, 이 생명. 새뮤얼은 숨이 막히고 내면의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였다.

p.37 남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걸인처럼 두 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새뮤얼이 가족과 함께 도시로 강제이주 된 어린 시절에 동생과 함께했던 손동작이다. 감옥에서 23년을 보내고 나와 다시 거리로 내쫓겼을 때, 중년의 나이에도 늙은이처럼 관절염에 걸린 손으로 했던 손동작이기도 하다.


되찾아진 자유는 허상이었다. 여전히 가난한 땅에 이름만 달리한 권력이 들어섰다. 무력함에 조소하고 변화의 주축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던 젊음은 어디에서도, 자기 자신에게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뿌리-없음의 자가 된다. '왕궁'에 젊음도 신념도 미래도,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빼앗긴 채로. 폭력과 피. 이 땅의 유산은 그뿐이다.

폭력은 으레 불가피함의 이름으로 퍼부어진다. 혼돈을 제압하기 위해, 더 큰 뜻을 위해, 질서를 되찾고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말해지지 않는가? 어쩔 수 없었다고,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고.

p.53 사람들은 대개 묻지도 않고 가져갔고, 완력을 사용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집을 부수고, 위협하고, 사람을 죽였다. 무리를 지어 마을에 몰려가 상점을 약탈하고 먹을거리와 콩 자루를 들고 달아났다. (...) "우리는 우리 걸 빼앗겼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우리가, 모든 걸 도둑맞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한단 말이냐?"

p.79 독립한 나라에서 달아나는 사람들을 태운 비행기들이 며칠 동안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수도에서는 대통령 당선인이 벌써 조각상과 분수 하나를 세우라고 주문했고. 자신의 새 관저를 설계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러는 동안 저 아래에서 사람들은 늘 그래왔듯. 무너진 돌무더기를 뒤지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말이 되지 못한 말이, 어설프게 쏟아져내릴 때, 그래, 내뱉어지거나 전해진다기보다 가진 것을 모두 내놓듯이 바닥으로 쏟아져내릴 때,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채 살려달라고 비는 이를 내리칠 수 없었다고. 짓눌린 자의 숨이 꺾이고 눈동자가 넘어갈 때, 차마 끝까지 숨통을 틀어쥐고 있을 수 없었다고.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고통스럽게도, 이것은 인간성의 회복 내지는 숭고한 선의를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쉽게 파괴되고 동시에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는지를 말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부서져버리는 것, 영영 망가뜨려버리는 것. 간신히 살아남아 차마 사라지지 않는 것.

p.98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동자를 굴리는 얼굴 표정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남자는 두 손을 모으며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새뮤얼을 올려다보았다. "사려주." 남자가 말했다. "사려주, 사려주, 사려주." 그 말이 "살려주세요"임을 새뮤얼이 부정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말했다. 새뮤얼이 어딘가에서 들었던 그 문장, 어딘가에서 배웠던 그 말뜻, 그 소리가 지금 절박하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p.216 새뮤얼은 끝내 손아귀 힘을 풀었다. 더는 군인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눈앞에서 목숨이 스러지는 걸 볼 수가 없었다. 손아귀에 눌린 목덜미의 느낌, 입술을 푸르르 떨며 거품을 무는 모습, 다리를 할퀴는 군인의 손가락. 새뮤얼은 손을 거두 고 뒤로 물러앉아 군인이 눈을 홉뜨며 숨을 몰아쉬는 걸 지켜 보았다.


세상을 등지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고립되기를 택한 이는 낯선 이를 진심으로 환대할 수 있는 자이며, 연대가 부서지는 순간 비로소 살인자가 된다.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속죄하지 못했다. 환대와 신뢰가 사라진 자리에 채 끝내지 못한 애도와 상실이 남았다.

그렇게 섬은 다시금 "여린 맥박과 가냘픈 숨결"이 사라진, 침묵의 땅이 된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세계는 존재하고 하루는 흘러간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머리 위로 돌을 들어 사람을 내려치는 손은, 죽은 이를 덮어주는 그것과 얼마나 닮았는가. 존재는 섬인가? 고독한 섬의 상처입은 영혼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p.251 새뮤얼은 남자가 이 손짓을 하는 걸 처음 보았고, 이제껏 희망이 없던 장소에서 희망의 작은 꽃송이를 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 소중한 것이 있다. 언어의 시작,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흉내 내기가 아닌, 진짜로 할 수 있는 말이 생긴 것이다.

p.264 새뮤얼은 서로 위로하고 돕던 시간의 따뜻함을 잊었다. 그의 섬을 함께 나눌 아들 래시에 대한 갈망도 잊었다. 어떤 것도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안에 비겁하게 자리했던 모든 게 분노로 돌변했다. (...) 남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입에서 말이 되지 못한 헐떡거리는 질문을 던지며, 남자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도서제공: 비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