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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패배의 기록 - 전후 일본의 비평, 민주주의, 혁명
김항 지음 / 창비 / 2025년 2월
평점 :
일본의 전후민주주의는 군국주의의 폐허에서 시작한 민주주의다. 저자는 이렇게 평했다. "하나의 패배"라고. 어째서인가? 천황제 군국주의, 군신 천황 권력 아래 통솔되는 전체주의 식민제국에서 상징적 의미만을 지닌 입헌군주식 민주주의로 전환된 사회가 어째서 패배로 갈음된다는 말인가? 게다가, 패배면 패배지 하나의 패배란 또 무엇인가? 그 까닭은 전후 일본 사회는 급격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으나, 우경화된 집권당의 '평화헌법 개헌'이 좌절된 연유에 있다.
방어를 제외한 군사력과 전쟁을 금하는 평화헙법의 무력화를 저지한 것은 평화운동을 추진한 시민사회도, 패전 후의 뼈저린 반성도 아닌 천황제였다. 폭주하는 우경화 권력을 막아낸 것은 주권자로서의 시민이 아니라는 것은, 여전히 권력으로서의 천황이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참패다. 전후 일본사회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무력하다. 아니. 패배했다.
p.7 천황 없이 전후 헌법의 평화주의는 지탱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의 패배다.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 즉 광신적 천황제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을 주창하며 출발한 전후민주주의가 결국 국민이 아니라 천황의 의지로 지탱되었기 때문이다.
p.9 섬멸전쟁은 보편주의와 식민주의를 통해 수행된다. 인류를 유일한 주체로 삼는 보편주의는 비인간을 배제하고 말살하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성립한다. 그리고 비인간은 항시 식민주의를 통해 식별되고 지시된다. 전후민주주의는 그렇게 보편주의와 식민주의의 굳건한 결합 위에서 평화를 지켜낸 셈이다.
패배했다. 실패했다. 그것은 끝이 아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정치체제가, 주권자로 역동하는 시민사회가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전사회적 영역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비평, 민주주의, 혁명으로 나누어 그 원인을 탐색하고자 한다. 어째서 전후 일본 사회의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은 전체주의와 식민제국주의를 벗어나 사고할 토대를 구축하는 일에 실패했는가? 그들이 지닌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약 80년,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보편주의, 세계와의 화합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환상에 불과했다. 여전히 문인들과 철학자들은 그들 자신과 사회에 내재된 식민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고, 충돌하는 가치와 자기모순 속에 길을 잃었다. 식민주의의 잔재는 통합과 회복으로의 약진 앞에 은폐되고, 보편주의는 근원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힘없는 이상으로 남았다.
p.11 민주주의와 입헌주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현대의 정치생활을 전체주의로부터 방어하는 유일한 조건일 것이다. 결정이 국민의 의지로부터 비롯하되 헌법 가치를 존중하고 실현시켜야 한다는 조건. (...) 저 패배는 의지와 가치가 분리되어 공허와 맹목이 정치생활을 형해화한 결과이며, 천황은 분리와 형해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p.95 이 물음은 전후 일본을 만들어온 보편주의와 식민주의의 중첩을 추적함으로써 검토되어야 한다. 물론 묶인 채로 신음해온 이들에 주목하면서 가라타니와는 상이한 비평의 계보를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유로이 이동하는 가라타니의 투명한 보편적 주체에 맞서 구체적인 실존의 모습을 제시하는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 주체가 저 구체적 실존들을 배제하고 말소하면서 성립해온 경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인간존재의 보편성이라는 기치 아래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보편주의는 어째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힘없는 이상에 그쳤는가? 어쩌면 그것은, 순진성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지극히 고상하게 보이는 난바라 시게루의 전인류 도덕 고양의 꿈에도, 동북아 공생을 주창한 와다 하루키의 평화주의에도, 도호쿠 대지진 후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상-시민 민주주의와 그에 기반한 현실적 이상주의에도 그 한계를 직시하지 못하고 정신과 이상으로 회귀하는 순진함이 있었다.
도덕도, 평화도, 현실도 '현실'의 턱을 넘지 못하고 그저 불순물을 제거한,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무력(無力)을 인정하지 못한 무력한 이상은 혁명정치에도 다름아니다. 가장 날카롭고 급진적이어야 했을 그것은 결국 체제의 일부가 되어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되며 명제와 명제의 대립으로 소멸대로를 걷지 않는가.
p.104 신안보법제는 보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뿌리내리던 '섬멸전쟁'을 체현하고 실현한다. 이런 사정에 비춰보면 전후 헌법과 민주주의를 저버렸다는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는 보편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섬멸전쟁'에 무지했다. 그래서 신안보 법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보편주의의 옹호가 아니라 전후민주주의가 전제로 해온 보편주의가 전쟁포기와 평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 간 전쟁과 전혀 다른 전쟁을 상정하고 전개해온 점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
p.262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권적 통치(마찬가지로 혁명도)의 본질이 빛이냐 어둠이냐, 공공성이냐 비밀이냐를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문제는 공공성의 원리가 공적 정치의 전면을 장악하면서, 비밀과 음모가 대중 미디어의 스펙터클 속에서 소비된다는 점이다. 즉 여전히 주권과 혁명의 한가운데에 자리하면서도 비밀과 음모는 점점 스스로의 좌표를 대중 미디어의 스펙터클 속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다.
저자 김항의 글은 항상 뜨끈뜨끈하게 맥동한다. 그만큼 필사적이고 절실하다. 어느정도는 지나간 시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다소간 냉소적이어도 탓할 이 없으련만 매번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처럼, 무엇을 얼마나 놓치고 망쳐놓고 있는지 모두가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외치고 또 외친다. 통합과 올해로 꼭 10년이 지난 신안보법제 투쟁의 한계, 전후민주주의의 패배는 "정치화 금지"을 내거는 작금의 우리 사회와 맞닿아있다.
폭주하는 극우-민주주의에 맞서 탈정치를 내건 순진하고 무력한 "양 떼 시민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결코 낙관적이라 말할 수 없는 그 길에서 저자는 "철학자가 패배했다는 그 싸움에서 이긴 자들의 승전보는 이렇듯 오래된 혐오를 타고 끝을 모른 채 울려퍼지는 중"이라 말한다. 언제나 도래하지 않을 정답을 다시금 묻는다. 국민통합, 하나의 정의, 우리와 그들의 사회에서 여전히 전후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느냐고.
p.296 내란상태와 제도라는 이중의 이미지, 이것이 마루야마가 말하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요체이다. 자연권과 자연상태를 원천으로 상정하고(내란상태라는 픽션), 그로부터 부단히 질서와 규범을 만들어나가는 실천(제도라는 픽션)이야말로 정치과정이자 민주주의인 것이다. (...) 시민의 민주주의는 실제 내란이나 혁명과 같은 예외적 상황이라기보다는 일상 속에서 이뤄져야만 한다.
p.309 포스트 3•11의 사회 풍경은 이들로부터 그 '회색의자'까지 박탈하려 한다. 인권과 평화와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양심적 일본 시민들이 전후민주주의를 수호하려 거리로 나서는 한편, 정작 그 거리로부터는 인권과 평화와 자유민주주의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이들의 자리가 말소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양들의 투쟁이 전후민주주의를 결단코 지켜내리라 거리로 나선 포스트 3•11의 사회 풍경이다.
*도서제공: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