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
이소진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2월
평점 :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어찌 읽으면 영미 소설 제목 같기도 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에 홀려서 바라본 부제는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입니다.
사실 출판사 오월의봄에서 이 책을 소개할 때, 가장 관통했던 어구는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였습니다.
청년 여성을 호명할 때, 그들은 정말 다양한 관점이 투영되는 거진 기의 없는 기표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실업급여 받아서 명품이나 사고 여행 가는', '성차별로 저임금 노동을 수행하는', '요즘은 고학력인', '어려울 것 없는', '다 가진', '여성상위시대의 수혜자' 등등
어떤 수식어는 화가 나고, 어떤 수식어는 나이기도 하고, 어떤 수식어는 편견이고, 터무니없고, 한쪽 면만을 묘사하고.
그 사이에서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가 되게 한 줄기 빛처럼 눈에 들어왔습니다.
통계청의 <2022 국민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여성 자살률 1위로 2위 벨기에보다 두 배 이상의 수치를 기록합니다. 또한 여성 자살을 2030의 여성들이 40·50·60 여성보다 높은 자살률을 보입니다. 이러한 특이점들이 한국 청년여성의 자살률에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도대체 우리는 자살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게 우리의 문제일까?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크게 1부에서 '가족' 2부 '노동', 3부 '신자유주의 담론에서 기인한 존재론적 불안'을 그 이유로 설명합니다.
아마도 증발하고 싶은 여성들이 가진 이유는 저 세 주제와 자신의 환경이 만났을 때 나타나는 교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1부에서는 '아빠'라는 가부장제 속 권력 주체에게 의한 인정투쟁에 곁들여, 남자 형제와의 차별, '딸'이라는 이유로 부과되는 돌봄노동, 가사노동 등은 청년여성들은 평생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굴레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부모 세대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딸인 그들은 부모의 성과 중심주의와 근거 없는 낙관론 속에서 언제나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과를 들먹이며 비난받거나 방임되었다는 (스스로도 잘못되었다 여기는) 감각 속에서 가족을 "자신의 성과가 담보되어야 안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가해지는 부모의 신체적 학대와 차별과 통제는 가족이라는 개인에게 책임 지어진 복지의 최후 방어선에 의지할 수 없도록 합니다.
2부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여성이 느끼는 노동 불안정성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가족으로부터 기인한 위험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한 정기적인 소득이 필수이지만, 청년여성들은 가정 내 가부장 권력의 부조리가 그대로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들은 노동 주변부에서 노동 가치가 절하된 저임금 노동자로 노동시장을 떠돌며 "직종 내 여성 비율에 따라 임금이 낮아지는 경향"과 "여성은 (가족의 존재로 인해) 남성에 비해 일터에 헌신하지 못한다는 편견에 시달리고" 이것이 다시금 "여성들의 일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져 임금 불평등을 초래"합니다.
여성들이 주로 구직하는 일자리는 '저숙련'일자리로 불리지만, 이는 사실 남성 중심적 시각이 발현된 호칭이며 이러한 저숙련 일자리는 저임금을 정당화하지만, "실제 노동 현장에서 여성들이 주로 하는 일은 저숙련이라기보다는 '여성'이 한다는 이유로 손쉽게 저숙련'으로 치부됩니다.
또한 남성과 같은 직종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밀리고 남성과 차이 나는 연봉을 바라보며, 이러한 사기업을 벗어나 일견 '공정'해 보이는 시험을 준비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특정한 삶을 향해 정진하도록 우리를 통치"하는 체제로 우리의 합리성이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면서 커리어를 쌓아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이때 모든 문제의 원인이 개인에게 전가되며, 우리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파악하는 눈을 잃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착취자가 되어지만 문제는 자신이 아니기에, 모든 것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3부 '청년여성이라는 존재론적 불안'에서는 신자유주의하 능력주의 서사와 결합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이들을 탈진시키고 자기혐오와 자살생각을 부추기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구조적 문제의 원인으로 나를 지목했을 때, "계급상승을 위해 자기 자신을 개선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자아실현 담론과 능력주의는 조직의 입장에서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환하는 유용한 정치적 도구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자아실현'과 '능력주의'라는 이야기는 우리를 속이고 마치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고 여성 개개인의 능력 혹은 노력의 부족이라는 평가 결과를 내놓습니다.
이미 열심히 살아왔으나 앞으로의 타개책 또한 ‘열심히’ 말고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끼어 있는’ 존재가 되어 있다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165쪽
양 틈에 끼어 있는 존재로, 우리는 도대체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불안정성이 뉴노멀의 규칙으로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 위에 타오르려고 애쓰는 일 빼고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을 했던 건, "쉰다는 행위는 그녀를 오히려 힘들게 한다."라는 141쪽의 짧은 문장이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최대한 저자가 인터뷰한 인물들을 관조하는 태도로(그리고 그 태도를 고수하려고 했던 건 아직 '나'들을 직면할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읽어가던 도중, 불현듯 저 문장에 멈춰 섰습니다.
쉰다는 것, 작년 4월에 기고한 오피니언 "지루함에 대하여: 피곤하게 지루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발 그냥 자면 안 돼?
스스로 매번 묻지만,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여가를 활용해서 자기 계발을 해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압박감은 내게 쉽사리 눈을 감을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가함은 더욱더 멀어지고 내게는 해갈되지 않는 지루함 해소에 대한 갈증만이 남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일어난 내일,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나아질 수 없고, 나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낼 수 없고, 그러므로 나는 이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으로 사용될 수 없고, 사용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나는 사회의 잉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도태의 불안과 인간으로서의 지루함은 다음 날 떠지지 않는 눈꺼풀로 나타난다. 수면 부족으로 퉁퉁 부어버린 얼굴로도, 언제나 30퍼센트 정도는 자고 있는 머리로도 발현된다.
지루함에 대하여: 피곤하게 지루하기 中
왜 나는 아직도 "쉰다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도록 하는가. 그리고 왜 여전히 나는 증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저자의 분석에서 나를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우리'가 되었을 때 무엇이 달라질까, 우리가 '우리'라는 사실만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이 피곤한 눈과 부은 얼굴을 더 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가?
끊기지 않은 질문이 튀어나온 순간, 책을 읽는, 사실을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도 끝까지 관조자이자 제3자로 남고 싶었던 저의 거리감을 무너뜨리는 짧은 문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소진 연구자가 3부에 풀어쓴,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 담론과 자아실현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페미니즘이 오히려 성공하지 못한 여성들의 문제 원인을 개인으로 치환하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긍정한다는 비판에는 깊이 공감했지만, 여전히 래디컬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경계를 만드는 일에 저는 조금 부족한듯합니다.
저자가 "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호명하는 ‘여성’이 누구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라며 178쪽 각주에 달아놓은 논문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 페미니즘은 어떤 여성을 호명하는가>까지 찾아 읽었지만,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고 원인을 파악하고 비판하는 일이 페미니즘 담론 안에서 벌어질 경우에 느껴지는 불편함을 참 이겨내기 쉽지 않습니다.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로서 청년 여성에 무수히 많은 단어를 집어넣어 봅시다.
계급/젠더, 계급/생물학적 성, 능력주의/젠더, 성별/능력주의, 공정/혐오 등등. 모든 단어를 청년 여성에게 교차시켰을 때, 우리는 도대체 '청년 여성'이라는 집단을 호명할 수 있을까? 만약 '청년 여성'(예를 들어 이대남의 반대항으로서 이대녀 등)이 와해되었을 때 실제 청년 여성이 잃어버린 발언권은 또 어떻게 이들을 억압할까? 만약 우리가 교차시켜야 혹은 단일하게 정의해야 하다면, 그렇게 할 때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무엇이며, 잃는 이와 얻는 이는 또 누구인가?
도대체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수만 수 억 개씩 떠오르는 질문에 숨이 막혀갈 지경입니다.
내가 죽고 싶은 건, 병리적 증상인 우울 때문일까? 일시적인 기분인 우울함 때문일까? 신자유주의 담론과 성차별과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 때문일까? K-장녀로서 가족 내 맡아진 역할 때문일까? 불안정한 노동 시장에 '노력하지 않은 나태한' 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을 읽으면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질문들은, 해결되기는커녕 보다 구체적인 단어들을 사용한 질문으로 변주될 뿐입니다. 언제까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요.
도대체 우리는 자살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게 우리의 문제일까?
본질적인 질문에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에필로그 제목을 붙여 봅니다.
아주 조금만이 당신의 몫이다.
이제 '우리'는 그 아주 조금의 나머지는 누구의 몫인지 찾아갈 목표를 얻었습니다. 누가 나에게 나머지 몫을 얹었는지 찾아내기 전까지, 우리 앞의 위협을 언어화하여 '명명'할 명명권력을 얻기 전까지 말입니다. 질문에 질식사 하는 것은 그 이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