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Philos 시리즈 27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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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성장을 포기할 수 있는가?, 사이토 고헤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마르크스는 도대체 언제 마음 편하기 죽을 수 있을까, 백 년 뒤에도 경제 체제에 위기가 오고 사회가 흔들리면 그때도 마르크스는 불사조처럼 살아날까? 정선진 교수가 쓴 옮긴이의 말제목은 ‘MZ세대 문법으로 쓴 혁신적인 자본론입문서이다. 더 이상 자본주의는 유효하지 않다. 서구 자본주의 체제에 이미 절멸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옛날 사상이, ‘MZ세대 문법으로 통해 포스트-자본주의의 새로운대안으로 등장했다. 가치 증식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인 자본주의의 괴물에 맞서, 유령이 돌아왔다. 유령의 새로운 얼굴은 탈성장 코뮤니즘이다.

 

사이토 코헤이의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사상 전반을 다루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노동에 초점을 맞춘다. 상품에서 사용 가치가 탈각하고, 가치 증식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이 된 자본주의는 절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상품, 노동과 같은 층위에서 순환해야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을 자연의 위에 세우고는 순환 대신 착취와 약탈을 일삼는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운동이다. 재화가 물건을 만들어 내고, 그 물건으로 추가적인 이익을 얻는다. 이 추가 수익은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싼값에 매입한 결과이다. 마르크스가 임금 인상보다 노동 시간 단축을 더 주요한 사안으로 보았던 이유는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열심히 일해 준다면 잉여가치, 즉 자본가의 이윤은 오히려 늘어나기 때문이다. 노동 시간 단축만이 노동자를 자신의 노동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노동의 가치가 절하되면서, 동시에 불싯 잡bullshit job들이 등장한다. 광고업, 컨설팅업, 금융업 등 생산성이 향상되어 더 이상 노동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서, 억지로 노동을 위한 노동을 만들어 내는 직업을 뜻한다. 열차 승무원, 지하철 기관사, 급식실 노동자, 청소 미화원, 돌봄 노동자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아마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케터, 광고 컨설턴트, 애널리스트가 사라진다면, 실업자가 늘어나겠지만 세상은 아마도 큰 변고 없이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자의 직업들의 임금이 후자보다 훨씬 적다. 임금도 가치도.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 ‘성공 신화 팔이들이 넘쳐난다. 해시태그_경제적자유를 달고서는 어떻게 해야 (거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수익화할 수 있는지를 전자책으로 공유하고, 숏폼 동영상을 만들고, 강연을 연다. ‘사용 가치는 전무한 스토리에 가치만을 얹어 상품으로 만든다. 이제 개인은 자기 자신에게 착취당한다. 개인은 프롤레타리아이자 동시에 자본가이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마저 상품으로 전락시킨다. 이제는 정말 한계에 가까워졌다. 인간이 노동력을 강매당하다 못해, ‘자본이 된다. 그러니 환경오염쯤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기후 위기 따위는 자본주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은 상품의 등가교환 이면에 숨은 노동자 착취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에 있다고 보았으며, “착취 없는 자유로운 노동의 존재 방식이 포스트-자본주의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때 행동 주체는 혁명이나 정치권력이 아닌, 노동자들의 조합인 코먼common이 되어야 한다.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지는 혁명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설계만이 노동자들이 자본가 혹은 국가 관료 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식이다.

 

자본주의의 목적이 가치 증식이라면, ‘탈성장 코뮤니즘은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인구와 자본, 생산과 소비의 총량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정상형(stationary state)경제를 실현한다.” 삶에 필요한 필수 노동들이 탈상품화되었을 때, 생활에 필요한 재화(주거, 공원)와 서비스(교육, 의료, 대중교통)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고 사회의 상품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에서 지속 가능한 포스트-자본주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탈성장 코뮤니즘이란 유령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성장 열망은 꼭 엔트로피 같아서, 증가할 수는 있지만 절대 줄어들 수는 없다. 어슐러 K. 르 귄의 SF 소설 빼앗길 자들의 행성 아나레스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공동체로 각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의 필요에 따라!”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실천한다. 그러나 행성 아나레스의 자연환경은 척박하기 그지없어 애초에 필요에 의한 필수품을 넘어선 상품 생산이 불가능하다. 결국 가치 증식이란 하지 않기는 불가능하고 하지 못하게 되는 것뿐일까. SF의 사고실험 속에서도, 우로스의 여러 조합은 결국 관리자 개인에게 필연적으로 권력이 생기게 되고, 공동소유란 첫눈처럼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지는 유토피아적 이상일 뿐일까.

 

그러나 정말로 자본주의의 팽창 경향성에서 소멸을 바라보는 현재, ‘하지 않기는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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