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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성별 - 가족은 어떻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가 Philos Feminism 7
셀린 베시에르.시빌 골라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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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베시에르와 시빌 골라크가 쓰고 이민경 번역가가 옮긴 자본의 성별은 부의 불평등을 분석하는 기준으로 가족 단위의 문화/학력자본이 아닌 가족관계와 성별을 제시한다. 경제자본은 상속으로 가족 내에 대물림된다


경제 공동체라는 가족의 속성은 산업화 및 후기 산업화 사회에서약화되었으며, 이 자리는 가족 간 관계로 대체되어 가족은 친밀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서적공동체로 여겨졌다. 부르디외는 사회 계층 재생산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상징자본의 상속개념을 도입하였으나, 대물림되는 경제/교육자본에도 가족 내 부의 불평등을 설명하긴 어렵다. 경제학자들의 통계자료는 사회계층 간 자산 불평등을 잘 드러내 주지만, “조사 단위 내부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파악되지 않는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 저자들이 도입한 새로운 준거는 성별이다.

 

하나의 가족 내에서도 어떤 사람은 빈곤하다.”

 

자본의 성별은 남성이다. 이혼과 상속을 통해 가족 내 자산으로부터 여성이 배제된다. “아들은 가족 내에서 특권을 가진 자이며 성장 과정에서부터 딸들은 가족 자산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교육받는다. “가족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이타심, 헌신과 같은 상징적 보상에 대한 선호를 여성들에게 교육한다. 그 결과, 동일한 문화자본을 상속받은 딸과 아들은 각기 다른 경제자본을 상속받는다


아들이 상속받는 재산의 가치는 과소평가 되고 딸이 상속받는 재산의 가치는 과대평가(현금 대신 불확실한 가치의 자산) 되며 평등의 가면을 부여받지만, 사실 딸들은 이것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안다. 가족의 친밀성을 깨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기 때문에 침묵한다. 가족 사업에서 딸들은 부모의 가계에서 일을 했으되 항상 무급이나, 아들은 정식 직원으로 임금을 받았다. 딸들이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선 아들이 가지지 않은 학력자본을 추가로 획득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의 모습에서 아들은 쉽게 가족의 가업을 이어받아 누나들을 위해 희생했다는 이미지를 얻는다. 그렇기에 아들의 수익은 평등해진다.



여성이 행하는 돌봄노동을 평가절하하는 사회의 시선은 여성의 임금 노동에도 적용되고, 이는 가족 내 부의 불평등을 초래할 뿐 아니라 부부 관계까지 이어진다. 가족 내부의 불평등은 상속으로 드러난다면 부부 내 불평등은 이혼 시 재산분할을 할 때 드러나게 된다. “형식적으로 가족법과 재산법이 평등주의적이지만, 이 법 시행과 관련한 전문가들과 법조인들은 평등하지 않다. 공증인, 변호사는 역회계를 이용하여 부부의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는 대신, “가장 중요한 자산을 남성에게 할당하고 자산의 목록과 평가를 조정하여 공식적으로 평등하게 만든다.” 또한 이를 해결할 사법부의 판사들은 가정에서 돌봄 및 가사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의 노동력 가치를 무시하며 아내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수행한다


판사라는 상위 계층의 여성들은 어떻게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와 시간을 희생해서 가장이라는 이름 아래 남성의 커리어를 만들어 주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이혼보상금을 성평등 시대에 여성을 주저앉히는 유인제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여성은 일을 하지만 자본을 쌓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여성은 딸, 아내의 위치에서도 불평등을 겪으며 빈곤에 쉽게 노출된다. 그리고 양육자로서 여성은 자녀 돌봄, 교육에 기여할 뿐 아니라 양육비와 수당 청구하기 위하여 수급자 혹은 청구인의 역할을 부여받아 법 제도 아래 국가에 계속하여 자신의 빈곤을 증명해 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20세기 이후 프랑스의 불평등한 부의 분배가 전혀 새롭거나 놀랍지 않은 이유는 우리에게는 이미 이러한 양적 통계와 질적 분석으로 긴밀히 조사되기 이전부터 보고, 듣고, 경험한 사사로운(그러므로 학술적으로 다뤄질 가치가 없는 개인적인) 사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늙은 부모의 돌봄 노동을 모두 수행하였으나, 왕래 없는 아들 혹은 아들의 손자에게 상속했다는 이야기는 그리 어렵지 않게 들려온다. 첫째가 아들일 경우에는 더욱이 무리 없이 가장 많은 상속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경제자본은 사랑’, ‘친밀함등과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단어들 사이로 중요성을 숨긴 채 남성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마치 치킨을 시키면 자연스럽게 닭다리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의 것이었다는 여성들의 아주 사사로운 증언처럼. 지적하면 더럽고 치사한 년이 되었던 것과 아주 유사한 논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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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Philos 시리즈 27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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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성장을 포기할 수 있는가?, 사이토 고헤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마르크스는 도대체 언제 마음 편하기 죽을 수 있을까, 백 년 뒤에도 경제 체제에 위기가 오고 사회가 흔들리면 그때도 마르크스는 불사조처럼 살아날까? 정선진 교수가 쓴 옮긴이의 말제목은 ‘MZ세대 문법으로 쓴 혁신적인 자본론입문서이다. 더 이상 자본주의는 유효하지 않다. 서구 자본주의 체제에 이미 절멸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옛날 사상이, ‘MZ세대 문법으로 통해 포스트-자본주의의 새로운대안으로 등장했다. 가치 증식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인 자본주의의 괴물에 맞서, 유령이 돌아왔다. 유령의 새로운 얼굴은 탈성장 코뮤니즘이다.

 

사이토 코헤이의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사상 전반을 다루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노동에 초점을 맞춘다. 상품에서 사용 가치가 탈각하고, 가치 증식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이 된 자본주의는 절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상품, 노동과 같은 층위에서 순환해야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을 자연의 위에 세우고는 순환 대신 착취와 약탈을 일삼는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운동이다. 재화가 물건을 만들어 내고, 그 물건으로 추가적인 이익을 얻는다. 이 추가 수익은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싼값에 매입한 결과이다. 마르크스가 임금 인상보다 노동 시간 단축을 더 주요한 사안으로 보았던 이유는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열심히 일해 준다면 잉여가치, 즉 자본가의 이윤은 오히려 늘어나기 때문이다. 노동 시간 단축만이 노동자를 자신의 노동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노동의 가치가 절하되면서, 동시에 불싯 잡bullshit job들이 등장한다. 광고업, 컨설팅업, 금융업 등 생산성이 향상되어 더 이상 노동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서, 억지로 노동을 위한 노동을 만들어 내는 직업을 뜻한다. 열차 승무원, 지하철 기관사, 급식실 노동자, 청소 미화원, 돌봄 노동자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아마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케터, 광고 컨설턴트, 애널리스트가 사라진다면, 실업자가 늘어나겠지만 세상은 아마도 큰 변고 없이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자의 직업들의 임금이 후자보다 훨씬 적다. 임금도 가치도.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 ‘성공 신화 팔이들이 넘쳐난다. 해시태그_경제적자유를 달고서는 어떻게 해야 (거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수익화할 수 있는지를 전자책으로 공유하고, 숏폼 동영상을 만들고, 강연을 연다. ‘사용 가치는 전무한 스토리에 가치만을 얹어 상품으로 만든다. 이제 개인은 자기 자신에게 착취당한다. 개인은 프롤레타리아이자 동시에 자본가이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마저 상품으로 전락시킨다. 이제는 정말 한계에 가까워졌다. 인간이 노동력을 강매당하다 못해, ‘자본이 된다. 그러니 환경오염쯤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기후 위기 따위는 자본주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은 상품의 등가교환 이면에 숨은 노동자 착취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에 있다고 보았으며, “착취 없는 자유로운 노동의 존재 방식이 포스트-자본주의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때 행동 주체는 혁명이나 정치권력이 아닌, 노동자들의 조합인 코먼common이 되어야 한다.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지는 혁명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설계만이 노동자들이 자본가 혹은 국가 관료 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식이다.

 

자본주의의 목적이 가치 증식이라면, ‘탈성장 코뮤니즘은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인구와 자본, 생산과 소비의 총량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정상형(stationary state)경제를 실현한다.” 삶에 필요한 필수 노동들이 탈상품화되었을 때, 생활에 필요한 재화(주거, 공원)와 서비스(교육, 의료, 대중교통)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고 사회의 상품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에서 지속 가능한 포스트-자본주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탈성장 코뮤니즘이란 유령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성장 열망은 꼭 엔트로피 같아서, 증가할 수는 있지만 절대 줄어들 수는 없다. 어슐러 K. 르 귄의 SF 소설 빼앗길 자들의 행성 아나레스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공동체로 각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의 필요에 따라!”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실천한다. 그러나 행성 아나레스의 자연환경은 척박하기 그지없어 애초에 필요에 의한 필수품을 넘어선 상품 생산이 불가능하다. 결국 가치 증식이란 하지 않기는 불가능하고 하지 못하게 되는 것뿐일까. SF의 사고실험 속에서도, 우로스의 여러 조합은 결국 관리자 개인에게 필연적으로 권력이 생기게 되고, 공동소유란 첫눈처럼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지는 유토피아적 이상일 뿐일까.

 

그러나 정말로 자본주의의 팽창 경향성에서 소멸을 바라보는 현재, ‘하지 않기는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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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티시 - 광신의 언어학
어맨다 몬텔 지음, 김다봄.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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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적으로 ‘언어’를 주제로 하는, 그것도 사이비 종교나 비이성적이고 무논리적인 극단적 집단 이념에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언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오웰의 《1984》가 떠오른다. 오웰은 이 소설로 독재자 숭배와 인위적 언어의 연관관계를 암시했다. ‘반대’라는 단어가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반대하는 자들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오웰이 전체주의적 믿음에 반하는 소수집단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를 지워낸 것과는 반대로, 몬텔의 《컬티시》는 ‘탈집단’ 사회, 즉 자신의 정체성을 집단에 소속시키지 않는 개인화된 사회에서 오히려 극단적인 이념을 내세우는 ‘컬트 집단’이 가능하게 된 이유를 언어에서 찾는다. 검색 한 번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온라인으로 과연결된 시대의 사람들은 도대체 왜, 사람들은 ‘컬트’에 혹하는가?

컬트의 정의

‘컬트’는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진 기만적인 인물이 이끄는 소수의 신봉자 그룹’부터 ‘뭔가에 매우 열성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단’”까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니 컬트는 신도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이비 종교에서부터, 아이돌을 열렬히 사랑하는 팬들이 모인 집단까지를 이르는 모호한 단어가 되었다.

몬텔은 ‘컬트’는 결국 “대화 상황이나 발화자의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이야기하며 좋음과 나쁨 사이의 컬트 스펙트럼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좋은 컬트에 가까운지 나쁜 컬트에 가까운지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컬트’인지 ‘나쁜 컬트’인지를 명확하게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광신의 언어학

그렇다면 이 컬트 집단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언어다. 언어 수행성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존재하는 세상을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존재에 영향력을 끼친다. 바로 언어가 우리의 행동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가 ‘세뇌’의 수단이 되느냐? “언어의 역할은 사람들이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도록 조종하는 게 아니”며,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아이디어를 믿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컬트 집단을 믿는 추종자들이 ‘세뇌’당했다는 편리한 이야기는 결국 그들이 왜 컬트 집단에 매혹되었는지, 빠져나오지 못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몬텔은 광신의 언어학, 즉 컬트적 언어의 핵심 요소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우리 vs 저들 이분법’, ‘로드된 언어(집단 내에서 두려움이나 슬픔, 공포, 환희, 존경 등의 감정을 반사적으로 촉발하는 단어)’, ‘사고 차단 클리세’가 그것이다. 컬트 집단은 자신들만 사용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집단과 외집단의 경계를 확실히 한다. 그 경계가 지어지면, ‘로드된 언어’가 개인을 공동체 내부의 새로운 사고로 녹여낸다. 그리고 ‘사고 차단 클리셰’로 집단 내 교리에 어긋나는 모든 행동을 무시하도록 한다.

그러나 컬트적 언어 요소들은 일상적 대화 상황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남자들은 원래 그래’나 ‘오늘따라 네가 너무 예민해’와 같은 발화가 익숙하다면, 누군가 당신에게 사고 차단 클리세를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커지는 컬트 집단

이제 컬트 집단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외계인의 침략, 운석 충돌을 피하기 위한 공동체보다 더 광의의 의미를 가진다.

다단계 회사들은 페미니즘 임파워링 언어를 자본주의적 프로테스탄트 논리와 연결하여 여성에게 ‘경제적 자유’를 약속하거나, 빈곤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잘못’이라는 신자유주의 신화를 성경으로 삼는다. 피트니스 산업은 종교적 언어를 탈취하여 의식적 의미를 운동에 부여한다.

이들은 앞선 다단계 회사나 사이비 종교처럼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강사 자격증을 위한 코스에 높은 가격을 매겨 추종자들을 착취한다는 점은 유사하다. 인스타그램에서 ‘점성술, 건강, 명상, 마음챙김’과 같은 ‘영적 인플루언서’들도 컬트적 언어를 이용하여 추종자들을 모으지만, 터치 한 번이면 사라진다. 그러나 터치 한 번이면 이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으로 떠오른다.

몬텔은 올바르지 않은 컬트 집단에서 벗어날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동시에 여러 ‘컬트’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유사한 것을 믿는 사람 옆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직관을 잊지 않는다면, 건강한 열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한국의 '보이지 않는 컬트 집단', 엔터테인먼트 사업

그렇다면, 2024년의 대한민국의 컬트 집단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JMS, 아가동산, 만민중앙교회 등의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에서부터 연예인에게 열광하며 강한 공동체 의식으로 뭉친 팬덤까지,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몬텔이 말한 것처럼 피트니스 산업이 컬트 집단화되는 경향은 아직 낮아 보인다. 그러나 '덕질'이라는 단어가 한때 서브 컬처인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 산업의 팬들을 부르는 멸칭인 '오타쿠/덕후'에서 유래하였으나, 이미 서브 컬처를 넘어 모든 영역에서 '00 덕질'(하다못해 식물 덕질까지)이라는 단어가 통용되고 있다.

모두가 무언가를 '덕질'하며 열성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얕은 의미의 컬트 집단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할까

개인적으로 한국의 팬덤 문화에 컬트 집단을 교차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 구조가 기형화되고 있다는 의견이 터져 나오고 있다. '러브 바밍'은 상대에게 자신이 특별한 무언가라는 의식을 가지게 해주는 언어들을 뜻하는데, 이는 손쉽게 아이돌들의 팬 서비스 문화에 견주어 볼 수 있다.

콘서트장에서 팬덤을 호명하거나, 일대일 대화가 가능한 (그러나 수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 팬싸인회 현장은 마치 추종자에게 높은 금액의 워크숍을 제시하는 스타 강사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든다.

한국의 아이돌 팬덤 문화는 컬트적 언어 요소인 '우리 vs 저들 이분법'을 충실히 수행하며, 반사적으로 그들의 감정을 유발하는 특정 단어가 존재하고('로드된 언어'), 아이돌이 벌인 사건사고에는 적절하게 '사고 차단 클리셰'가 작동한다.

팬덤 개개인에게서 나타나는 컬트적 언어 요소들은, 엔터 사업의 '컬트적 구조'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한국 엔터테인먼트는 의도적으로 컬트적 구조를 형성하여 최대의 이득을 얻는 방식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불가하다.

이제 이 구조의 기형성을 '컬트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만큼, 구조의 문제점을 더 세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작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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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 자체의 감각 - 의식의 본질에 관한 과학철학적 탐구 Philos 시리즈 26
크리스토프 코흐 지음, 박제윤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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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코흐가 쓰고 박제윤 번역가가 옮기고 아르테에서 출간된 《생명 그 자체의 감각》은 의식이 무엇이며 도대체 뇌 어느 부분에서 발생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통합정보이론(ITT)을 들어 설명하는 책입니다.

총 14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의식의 정의에서부터 고대의 심장에서 근대의 뇌로 인간의 중심이 이동해 온 과정, 과학적 접근법을 바탕으로도 철학적 접근의 ‘의식’까지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의식’이라는, 어쩌면 과학자들의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에 도전하는 까닭을 코흐는 “인간성의 나르시시즘과 동물과 식물이 오로지 우리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뿌리 깊은 믿음을 치료해야 한다.”(325쪽)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의식이 다른 동식물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은 ‘인간성’이 아닌‘의식의 존재’에 근거하며, “주체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반드시 그 주체가 경험한다는 것을 함축”하지만 “그 반대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326쪽)닙니다.

🗨️ “인간 외의 종도 내재적으로 가치 있는 주체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위한 경험적 정당성은 내적 관점을 지닌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에 있다. (...) 그 경험은 유일하게 정말로 중요하다.”(327쪽)

의식이 감각의 경험이라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가 아닌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는 사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정말로 무의식적 호문쿨루스가 의식되지 않는 공간에 자신을 숨긴 채 외부감각을 내재적 가치를 투영하여 인식하고 있을까?

“의식은 영리한 알고리즘이 아니다. 의식의 심장박동은 그 자체로 인과적 힘이며, 계산이 아니다”(290쪽)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업로드한다는 꿈은 가능한가? 환원 가능한 컴퓨터가 환원 불가능한 의식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가?

인간의 의식을 계산하는 것과 블랙홀을 계산하는 것의 유사성을 언급하며 코흐는 실재와 경험의 괴리와 해리를 강조합니다. 컴퓨터는 단지 언제나 인간의 의식을 가진 척 행동을 되풀이할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코흐의 주장입니다. 타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과적인 힘의 존재를 계산과 다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로 내세웁니다.

의식을 주제로 하면, 언제나 철학과 과학 그 사이 어느 부분을 겨냥하게 되는데, 과학적 접근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대의 철학 물음이 등장한다는 지점은 흥미롭습니다. 의식이 발생하는 물리적인 메커니즘과 실재 의식이 다르다는 점이 안드로이드에게 권리를 주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게 되는 동시에, 비인간 동물(을 넘어선 균류까지)의 감각 경험과 의식의 유무에서 비인간의 권리를 요구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데카르트 이래 서양 중심의 근대 사회에서 신체-정신의 이원론에서 신체는 정신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물리적 실재의 감각 기관에서 발생하는 자극이 일련의 감각-인지-운동 메커니즘을 유발하고 이러한 주의집중으로 발생한 구조화된 내재적 경험이 의식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지점이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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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인 측면으로는, 사실 《생명 그 자체의 감각》 본문에 영어 병기가 남발되어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제가 핵심 독자층에서 벗어난 것을 제외하고도) 40~60대 과학철학서 독자들이라면 어느 정도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는 계층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간’, ‘웰시코기’나 ‘피노 누아’ 같은 원고 주제와 연관 없는 단어의 영어 병기는 불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팟캐스트(podcast)’라는 음차 번역의 영어 병기에서 독자가 저 영어를 보고 추가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일까요…?)

저도 웬만하면 병기나 부연 설명을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데도, 너무 원고 주제나 에피소드에 전혀 관련 없는 모든 단어가 병기 처리되어서 나오니까 집중력이 상당히 끊기더라고요. 차라리 편집 때 크기를 줄이거나 연한 색으로 표기했으면 더 나았으려나, 여러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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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
이소진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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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어찌 읽으면 영미 소설 제목 같기도 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에 홀려서 바라본 부제는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입니다. 


사실 출판사 오월의봄에서 이 책을 소개할 때, 가장 관통했던 어구는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였습니다. 


청년 여성을 호명할 때, 그들은 정말 다양한 관점이 투영되는 거진 기의 없는 기표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실업급여 받아서 명품이나 사고 여행 가는', '성차별로 저임금 노동을 수행하는', '요즘은 고학력인', '어려울 것 없는', '다 가진', '여성상위시대의 수혜자' 등등 



어떤 수식어는 화가 나고, 어떤 수식어는 나이기도 하고, 어떤 수식어는 편견이고, 터무니없고, 한쪽 면만을 묘사하고. 


그 사이에서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가 되게 한 줄기 빛처럼 눈에 들어왔습니다. 



통계청의 <2022 국민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여성 자살률 1위로 2위 벨기에보다 두 배 이상의 수치를 기록합니다. 또한 여성 자살을 2030의 여성들이 40·50·60 여성보다 높은 자살률을 보입니다. 이러한 특이점들이 한국 청년여성의 자살률에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도대체 우리는 자살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게 우리의 문제일까?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크게 1부에서 '가족' 2부 '노동', 3부 '신자유주의 담론에서 기인한 존재론적 불안'을 그 이유로 설명합니다. 



아마도 증발하고 싶은 여성들이 가진 이유는 저 세 주제와 자신의 환경이 만났을 때 나타나는 교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1부에서는 '아빠'라는 가부장제 속 권력 주체에게 의한 인정투쟁에 곁들여, 남자 형제와의 차별, '딸'이라는 이유로 부과되는 돌봄노동, 가사노동 등은 청년여성들은 평생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굴레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부모 세대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딸인 그들은 부모의 성과 중심주의와 근거 없는 낙관론 속에서 언제나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과를 들먹이며 비난받거나 방임되었다는 (스스로도 잘못되었다 여기는) 감각 속에서 가족을 "자신의 성과가 담보되어야 안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가해지는 부모의 신체적 학대와 차별과 통제는 가족이라는 개인에게 책임 지어진 복지의 최후 방어선에 의지할 수 없도록 합니다. 



2부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여성이 느끼는 노동 불안정성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가족으로부터 기인한 위험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한 정기적인 소득이 필수이지만, 청년여성들은 가정 내 가부장 권력의 부조리가 그대로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들은 노동 주변부에서 노동 가치가 절하된 저임금 노동자로 노동시장을 떠돌며 "직종 내 여성 비율에 따라 임금이 낮아지는 경향"과 "여성은 (가족의 존재로 인해) 남성에 비해 일터에 헌신하지 못한다는 편견에 시달리고" 이것이 다시금 "여성들의 일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져 임금 불평등을 초래"합니다. 



여성들이 주로 구직하는 일자리는 '저숙련'일자리로 불리지만, 이는 사실 남성 중심적 시각이 발현된 호칭이며 이러한 저숙련 일자리는 저임금을 정당화하지만, "실제 노동 현장에서 여성들이 주로 하는 일은 저숙련이라기보다는 '여성'이 한다는 이유로 손쉽게 저숙련'으로 치부됩니다. 



또한 남성과 같은 직종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밀리고 남성과 차이 나는 연봉을 바라보며, 이러한 사기업을 벗어나 일견 '공정'해 보이는 시험을 준비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특정한 삶을 향해 정진하도록 우리를 통치"하는 체제로 우리의 합리성이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면서 커리어를 쌓아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이때 모든 문제의 원인이 개인에게 전가되며, 우리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파악하는 눈을 잃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착취자가 되어지만 문제는 자신이 아니기에, 모든 것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3부 '청년여성이라는 존재론적 불안'에서는 신자유주의하 능력주의 서사와 결합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이들을 탈진시키고 자기혐오와 자살생각을 부추기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구조적 문제의 원인으로 나를 지목했을 때, "계급상승을 위해 자기 자신을 개선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자아실현 담론과 능력주의는 조직의 입장에서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환하는 유용한 정치적 도구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자아실현'과 '능력주의'라는 이야기는 우리를 속이고 마치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고 여성 개개인의 능력 혹은 노력의 부족이라는 평가 결과를 내놓습니다. 



이미 열심히 살아왔으나 앞으로의 타개책 또한 ‘열심히’ 말고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끼어 있는’ 존재가 되어 있다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165쪽



양 틈에 끼어 있는 존재로, 우리는 도대체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불안정성이 뉴노멀의 규칙으로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 위에 타오르려고 애쓰는 일 빼고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을 했던 건, "쉰다는 행위는 그녀를 오히려 힘들게 한다."라는 141쪽의 짧은 문장이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최대한 저자가 인터뷰한 인물들을 관조하는 태도로(그리고 그 태도를 고수하려고 했던 건 아직 '나'들을 직면할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읽어가던 도중, 불현듯 저 문장에 멈춰 섰습니다. 



쉰다는 것, 작년 4월에 기고한 오피니언 "지루함에 대하여: 피곤하게 지루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발 그냥 자면 안 돼? 



스스로 매번 묻지만,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여가를 활용해서 자기 계발을 해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압박감은 내게 쉽사리 눈을 감을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가함은 더욱더 멀어지고 내게는 해갈되지 않는 지루함 해소에 대한 갈증만이 남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일어난 내일,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나아질 수 없고, 나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낼 수 없고, 그러므로 나는 이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으로 사용될 수 없고, 사용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나는 사회의 잉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도태의 불안과 인간으로서의 지루함은 다음 날 떠지지 않는 눈꺼풀로 나타난다. 수면 부족으로 퉁퉁 부어버린 얼굴로도, 언제나 30퍼센트 정도는 자고 있는 머리로도 발현된다.


지루함에 대하여: 피곤하게 지루하기 中





왜 나는 아직도 "쉰다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도록 하는가. 그리고 왜 여전히 나는 증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저자의 분석에서 나를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우리'가 되었을 때 무엇이 달라질까, 우리가 '우리'라는 사실만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이 피곤한 눈과 부은 얼굴을 더 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가? 



끊기지 않은 질문이 튀어나온 순간, 책을 읽는, 사실을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도 끝까지 관조자이자 제3자로 남고 싶었던 저의 거리감을 무너뜨리는 짧은 문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소진 연구자가 3부에 풀어쓴,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 담론과 자아실현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페미니즘이 오히려 성공하지 못한 여성들의 문제 원인을 개인으로 치환하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긍정한다는 비판에는 깊이 공감했지만, 여전히 래디컬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경계를 만드는 일에 저는 조금 부족한듯합니다. 


저자가 "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호명하는 ‘여성’이 누구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라며 178쪽 각주에 달아놓은 논문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 페미니즘은 어떤 여성을 호명하는가>까지 찾아 읽었지만,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고 원인을 파악하고 비판하는 일이 페미니즘 담론 안에서 벌어질 경우에 느껴지는 불편함을 참 이겨내기 쉽지 않습니다.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로서 청년 여성에 무수히 많은 단어를 집어넣어 봅시다.




계급/젠더, 계급/생물학적 성, 능력주의/젠더, 성별/능력주의, 공정/혐오 등등. 모든 단어를 청년 여성에게 교차시켰을 때, 우리는 도대체 '청년 여성'이라는 집단을 호명할 수 있을까? 만약 '청년 여성'(예를 들어 이대남의 반대항으로서 이대녀 등)이 와해되었을 때 실제 청년 여성이 잃어버린 발언권은 또 어떻게 이들을 억압할까? 만약 우리가 교차시켜야 혹은 단일하게 정의해야 하다면, 그렇게 할 때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무엇이며, 잃는 이와 얻는 이는 또 누구인가?



도대체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수만 수 억 개씩 떠오르는 질문에 숨이 막혀갈 지경입니다. 


내가 죽고 싶은 건, 병리적 증상인 우울 때문일까? 일시적인 기분인 우울함 때문일까? 신자유주의 담론과 성차별과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 때문일까? K-장녀로서 가족 내 맡아진 역할 때문일까? 불안정한 노동 시장에 '노력하지 않은 나태한' 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을 읽으면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질문들은, 해결되기는커녕 보다 구체적인 단어들을 사용한 질문으로 변주될 뿐입니다. 언제까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요. 


도대체 우리는 자살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게 우리의 문제일까?


본질적인 질문에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에필로그 제목을 붙여 봅니다.


아주 조금만이 당신의 몫이다.


이제 '우리'는 그 아주 조금의 나머지는 누구의 몫인지 찾아갈 목표를 얻었습니다. 누가 나에게 나머지 몫을 얹었는지 찾아내기 전까지, 우리 앞의 위협을 언어화하여 '명명'할 명명권력을 얻기 전까지 말입니다. 질문에 질식사 하는 것은 그 이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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