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교육학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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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프레이리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자신의 대표작인 페다고지에서 논의한 개념들을 현대적(당시 기준) 관점에서 재조망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씌여진 것이다. 그렇기에 프레이리가 겪은 일화들이 다른 저서들에 비해서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어서 프레이리라는 한 인간의 모습들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제목이 희망의 교육학인 이유는 제목 그대로 저자가 희망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프레이리는 서문에서 희망을 변화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 설명한다. 희망만으론 아무것도 바뀔 수 없고 지나친 낙관은 오히려 무기력을 낳기에 희망에 대한 무제한적 신뢰는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희망이 없다면 우리의 행위를 지속할 수 없다. , 희망은 일종의 동기인 셈이다. 행동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는 꿈을 꾸어야만 한다는 것이 프레이리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프레이리가 강조하는 지향점은 사람들의 의식화다. 의식화는 비판적 사고를 하는 법을 배우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역사적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억압된 현실은 어떠한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프레이리가 제시하는 방법들은 메타적 속성을 가진다고 볼 수도 있다. 희망의 교육학에서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점은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는 4장에서 교육 내용이나 방법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프레이리의 의식화에서 억압은 어떠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특정 지역과 상황에서 특정 모순점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는 그 상황을 살아가는 민중이다. 이 맥락에서 프레이리는 민중을 텅 빈존재로 여기고 이들에게 사회의 문제점을 알려줘야지, 식의 권위주의적 접근법을 모두 거부한다. 여기에는 다수의 사회운동도 포함될 것이다. 프레이리가 마르크스주의자와 다른 점은 마르크스주의자가 구조변혁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반면, 프레이리는 의식의 변화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변화되어야 할 의식의 지향점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정답이 있으니까 이걸 채워넣으면 된다, 식의 접근은 할 수 없으며 민중들 개개인에게 귀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중들이 아는 수준에서 끝내지 않고 더 나아가려면 교육자와 민중들 간에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프레이리는 이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본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프레이리가 사용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는 정치체제적 의미라기 보다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번역이 깔끔해서 읽기가 매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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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정치의식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한준상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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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의 문제로 읽기가 어려웠다. 프레이리의 논의의 토대는 페다고지에 다 담겨 있다. 이 책에서 페다고지와 다른 점은 교육의 정치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 스스로도 페다고지에서는 정치적 의미에 주목하지 못했었다고 회고한 데서 드러나는 점이다.

 

 「페다고지에서 제시된 주요 개념인 의식화, 프락시스, 은행저축식 교육과 문제제기식 교육, 생성어를 통한 교육과정 구성은 이 책에서도 등장하며 다시 강조되었다. 페다고지에서부터 등장하는 이 개념들은 프레이리 사상의 기본 골자라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이 책에서 중점을 두고 봐야 할 부분은 (제목에서부터 강조하는 것처럼)교육의 정치성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이 논의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페다고지에서 설명한 내용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답이다. 페다고지에서 프레이리는 억압자는 피억압자로 하여금 다양한 방법을 통해 침묵의 문화를 유지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그 교육적 방법이 은행저축식 교육이었다. 은행저축식 교육의 이면에는 특정한 전제가 깔려야만 한다. 지식은 절대적인 것이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가치롭기에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는 전제가 바로 그것이다. 프레이리가 보기에 이는 일종의 신화다. 그렇기에 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무리 중립성을 유지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지식을 가르치는 시점에 이미 침묵의 문화 형성에 기여하게 된다. 침묵의 문화 형성에 기여한다는 것은 억압자의 이데올로기의 유지에 기여한다는 것이기에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프레이리는 교육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으며,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려면 필연적으로 급진적인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교사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일반적 통념을 생각해 볼 때, 프레이리의 견해는 매우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이 정치적이라는 것은 부분적으로 프레이리의 지식관과도 연관된 것이다. 프레이리의 지식관은 비고츠키의 사회적 구성주의적 시각과 유사한 것 같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지식이 구성되는 것이다. 프레이리는 피억압자가 목소리를 내고 역사적 과정에 참여할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억압자와 피억압자간의 변증법적 과정에 의해 문화가 형성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 문화가 곧 지식이 된다. 지식은 대화 속에서 구성되고 변화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계는 점진적이지만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 당장의 효과는 미미하지만, 교사 중심에서 학습자 중심으로 옮겨가는 교육과정의 흐름은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업 방식이 구성주의적 영향으로 인해 일방적인 강의식에서 직접 의미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형식으로 변하는 것도 부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변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우리 교육계가 지향하는 방향과 프레이리가 제시한 뱡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학습자가 지식을 구성하는 것을 장려한다는 점에서는 프레이리와 우리 교육이 유사한 방법론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프레이리의 문제제기식 교육의 핵심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아니라 학습자로 하여금 사회적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우리의 교육은 정치적인 중립성을 표방하며 사고능력 계발의 수단으로 구성주의적 수업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입장은 겉으로 보기엔 유사할 수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매우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교육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중립적일 수 없다면 교사는 이를 인정하면서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려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도를 갖고 교육에 임해야 할 것인가? 이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문제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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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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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인류학의 고전으로 많이 읽히는 책이다. 이 책은 미국인이 미국인으로써의 시선을 최대한 배제하고 일본인의 사회적 성격구조를 밝히는 데에 목적을 둔다. 바로 이웃 나라에 살지만 이 책에서 기술된 일본인의 모습은 너무나도 생소했다. 미국인의 문화는 이성에 기초하여 합리성을 추구하는 문화다. 그렇기에 2차대전을 겪으며 그들이 본 일본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민족이었다. 죽을때까지 항복을 하지도 않고, 신체의 고통을 돌보지도 않고, 그러면서 항복 후에는 그 전투적인 일본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친절하게 대하니 말이다.

 

 저자가 진단한 일본인의 성격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계층 제도에 대한 신뢰다. 계층 제도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식 자유주의적 사고에 기초하면 계층 제도란 불합리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은 계층 제도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진심으로 신뢰한다. 이 계층제도는 개인 간이나 사회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까지 포함한다. 여러 국가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위치를 갖는다. 저자의 시점에서 일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세계가 평화롭지 못한 것은 저마다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본은 자신들이 나서서 국가들마다 적절한 위치에 있도록 하려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p.64). 계층 제도를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왜 자신들이 그 계층 제도의 상층부에 있어야 하는지는 따로 설명이 없다.

저자는 일본인들의 덕 관념에 대해서도 분석을 하였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덕이란 온, 기무, 세상에 대한 기리, 이름에 대한 기리를 말한다. 온이란 채무를 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명확하게 이해하질 못했다. 아마도 이 온을 갚는 것이 뒤이어 나오는 기무와 기리가 아닌가 한다. 기무는 의무를 말한다. 기무에서 또 천황이나 국가에 대한 기무인 주, 친족에 대한 기무인 고, 자신의 일에 대한 기무인 닌무로 나뉜다. 기무는 갚는데 한계가 없다. 기리는 자신이 받은 은혜나 부채를 갚아야 할 것을 말하며 수량이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덕들로 인해 계층제도 속에서 각 계층마다 지켜야 할 덕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이 덕들은 서로 부딫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하나를 지키고, 다른 하나를 어기게 되기에 그에 대한 책임으로 자결을 해야 한다.

 

 이러한 덕들은 성장함에 따라 내면화된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유아기 시절에는 이러한 덕들을 어기게 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들은 자유롭다. 하지만 조금씩 성장하면서 덕을 배우고, 하나씩 제한이 생기게 된다. 그 결과 아이들은 불연속적 양육을 받게 된다. 더군다나 일본인은 특이하게도 육체적 쾌락에 대해서는 크게 제한을 두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자신의 계층을 지키고, 그 계층에 따른 덕만 지킨다면 육체적 쾌락을 어떻게 추구하든, 얼마나 추구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쾌락을 향유하고, 어린 시절엔 마음껏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렸던 일본인이 크면서 중요한 일들에 마주하게 되면서 자유를 억압하고, 쾌락을 정신적으로 인내할 것을 요구받는다는 점에서 그들 내부에서 두 요소의 긴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적어보았지만 뭔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저자가 쓴 일본인에 대한 분석들이 파편화된 상태로 머릿속에서 떠도는 것 같다. 이후 기회가 된다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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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아틀란티스 - 세상을 보는 글들 6
프랜시스 베이컨 지음, 김종갑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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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랜시스 베이컨은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 학문의 문을 연 사람이다. 수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데카르트와 달리 베이컨이 관심을 가진 건 자연 세계였다. 근대 실험과학의 시조라 할 만 하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베이컨이 그린 이상사회에 대한 내용이다.

  베이컨의 이상사회 이전에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책 전반에 걸쳐 기독교적 배경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17쪽에서 기독교임을 우선 확인하고 대접이 달라진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역자의 주석에도 언급되었듯, 이는 당시 유럽인들이 기독교 문화 이외의 사람들은 미개인으로 취급했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이컨이 그린 새로운 아틀란티스 섬은 풍요의 왕국으로 그려진다. 그 풍요의 원동력은 자연세계에 대한 탐구,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왕국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솔로몬 학술원의 취지는 자연에 대한 탐구과 왕국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베이컨의 사제인 로울 리는 서문에서 이 책에서 베이컨은 대학의 모델을 제시하려 하였다.’고 썼다. 솔로몬 학술원과 같이 자연의 탐구와 나라의 풍요가 대학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대학의 목적에 대한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이란 잣대를 들이댈 경우 나라의 풍요는 외재적 목적으로 분류되어 꼭 동의할수 만은 없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풍요를 진리탐구의 부산물로 이해한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베이컨의 구상을 읽고 드는 의문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과학기술의 부작용에 대한 염려이다. 책에 등장하는 솔로몬 학술원의 연구자의 서술에 따르면, 과학기술은 많은 풍요를 생산하였다. 들어가기만 하면 건강해지는 온천, 마시기만 하면 건강해지는 물 등 너무나도 멋진 세상이라 할 만 하다. 하지만 그 부작용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기에 판타지 세계에 나올법한 마법과 유사하다. 베이컨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부작용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한 모양이다.

  다른 의문점은 윤리, 가치에 대한 탐구의 부재다. 대학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연의 탐구다. 그리고 섬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덕이 넘친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까? 좋은 통치 제도라거나 윤리법칙에 대한 연구는 따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유일한 예외가 결혼제도). 아마 두 가지의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나는 윤리, 가치와 관련한 문제는 기독교의 문제로 떠넘긴 것이다. 그렇기에 베이컨은 따로 논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부덕의 원인이 물적 궁핍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할 경우다.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선 물적 풍요가 넘쳐나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을 굶주리지 않게 할 정도로는 배분되고 있기에 사람들이 덕을 갖춘다고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종교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았을 때, 베이컨이 윤리적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은 전자의 이유 때문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내가 베이컨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하기에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고 단지 그렇지 않을까?’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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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성 동서문화사 월드북 108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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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최고의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내용에 깊이가 있다.
저자는 실존주의적 윤리관에 토대를 두고 현상학적 방법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불평등의 이유를 경제적 문제르만 본 엥겔스의 견해를 비판한 부분이었다.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여성은 주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의존적인 생활양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이를 매~우 길게 서술하였다. 매우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오늘날에 남,여를 불문하고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위치를 동일하게 보아선 안될 것이다. 같은 사회적 문제라도 양성에겐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
다만 애초에 양성 모두가 사는 세상은 객체로 존재하도록 조장하는 세상이기에 양자의 차이는 객체로 존재하느냐 더 심한 객체로 존재하느냐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사회구조적 개선은 필요하며 이는 주체적인 삶을 사는데 용이한 환경을 낳을 것이다.
하지만 주체적인 삶을 살도록 시작하는 것은 환경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의식적인 몫이다.
양자는 병행되어야 한다. 사회구조의 변화는 주체적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지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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