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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8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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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화편에서 특징적인 점은 소크라테스가 다른 대화편들처럼 특정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상으로 얘기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첫 서두인 아테네인 여러분에 드러난다. 이 구절이 지니는 의미는 직접적인 의미 그대로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아테네 시민이 아니라 이라고 한 점이다. 대화편 메논에서 노예소년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점이나, 이 대화편에서도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 뿐 아니라 도공(생산계열)들을 찾아가 지혜를 구했다는 점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제자인 플라톤도 인간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는 인식론적 명제를 나타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을 자주 언급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신이 제사 등을 포함한 관습의 상징적 의미인지, 어떠한 근본원리로서의 신을 상정하는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변명이 플라톤의 초기 저작임을 생각하면, 전자의 의미로 생각하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사상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신과 가장 가까운 것은 선의 이데아’, ‘형상 중의 형상과 같은 개념들이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펼치기 이전이기에 신에 대해 깊은 고찰이 이루어진 상태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신에 대한 이론체계가 정립된 상태는 아닐 것이다.

 

  소크라테스, 근본적으로는 저자인 플라톤의 지식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는 구절도 있었다. 22d각 사람은 자기 기술을 멋지게 실행해 내니까 다른 가장 중요한 것들에서도 자기가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라는 구절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 앞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잘못을 두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첫째, 기술과 지혜는 질적으로 종류가 다른 것이므로 기술이 있다는 이유로 지혜롭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 그들은 수공기술에 대해 지혜로운 것이지, 다른 분야에 지혜롭지 않다, , 양적으로 다른 종류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소피아(기술적 의미가 강함)와 프로네시스(실천적 의미가 강함, 사려)를 구분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 그는 지혜 일반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그는 다른 대화편에서 건강함 자체, 훌룡함 자체 등을 문제삼는다. 그의 이데아론을 생각해 볼 때, ‘지혜의 이데아라는 보편자가 있고, 수공에 대한 지혜, 운동에 대한 지혜, 정치에 대한 지혜 등의 개별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설명이 매끄럽다. 정리하자면, 플라톤(아마도 소크라테스도)은 기술에 대한 지혜와 사려와 같은 것들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개념은 아르테(arete). 이는 덕, 탁월성 등으로 번역된다. 아르테는 인간에게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20b에서 가축에게도 사용되고 있다. , 아르테는 인간에게는 인간적인 덕이란 명칭으로 사용되고, 가축을 대상으로 사용될 때도 그들에게 알맞은 덕이라고 서술된다. , 덕이란 것은 특정 존재에게 알맞게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빗대어 이해하자면, 이데아, 또는 형상(aidos)과 같은 보편자는 개별자를 개별자이도록 하는 것이다. 보편자는 개별자에 앞선 것이며, 성립 근거다. 그리고 개별자는 보편자를 닮은 것이지만 완전하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개별자의 덕, 훌륭함은 그 보편자에 가까워지는 것에 있다. 플라톤에게 덕이란 보편자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변명에서 플라톤은 덕을 갖추는 것이 그 존재를 아름답고 훌륭하게’, ‘좋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름답다는 것이나 훌륭하다는 것은 어떠한 가치를 담은 표현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데아론을 통해 이해하자면, 플라톤에게 아름답거나, 좋은 것 등은 보편자를 더욱 더 닮은 상태에 붙여지는 수식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에게 존재론과 가치론은 결합되어있다.

 

  소크라테스의 탐구관으로 잘 알려진 것은 무지의 지대화.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에 비하여, 자신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기에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물론 자신이 모른다고 하는 것은 표면상의 의미로만 해석해선 안된다. 실제로 대화편에서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특히 옳은 것을 안다는 태도를 자주 내비친다. 특히 37a에서는 시간이 더 있다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 이유는 짧은 대화가 아니라 오랜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소크라테스가 길게 대화하는 목적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자신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의 이데아론, 덕과도 관련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받은 상황은 이데아론에서 이해된 덕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설득을 할 자신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데아론(이 시점에는 이데아가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표명되지 않을 뿐 이데아를 의미하는 것임), 덕이 옳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대화와 토론의 강조를 한다. ‘소크라테스식 대화가 유명하게 알려진 만큼, 소크라테스는 오늘날의 대화와 토론이 강조되는 문화에 대해 모범이 될 수 있을 만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플라톤을 통해 그려진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대화와 토론과는 다소 다르다. 플라톤을 통해 그려진 소크라테스의 세계관은 올바른 답이 자명하며,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생각이 자명하게 옳다고 여기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물론 대화와 토론의 과정에서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서로 깨닫지 못한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대화와 토론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내 주장이 이미 옳다일 경우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하기보다 상대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을 부분을 찾는데만 집중하지 않을까? 대화와 토론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더 나은 답을 찾아보겠다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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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심리
귀스타브 르 봉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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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에는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인간형에 대해 다루는 사상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대중'이란 용어를 사용한 니체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 시대는 서양의 전통적 토대인 종교의 영향력이 완전히 붕괴된 시기였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회 각 부분에 변화가 일어났으며 세계는 열강들의 경쟁판으로 변화하였다. 르 봉의 '군중심리'가 갖는 특수성은 개인과 군중의 구분이다. 예를 들어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에서 다루는 대중은 '특정한 정신구조를 가진 개인'으로 이해된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단지 수의 차이일 뿐 내면적 차이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르 봉은 개인과 군중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제시한다. 군중은 개인과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이 점이 르 봉이 동시기의 사상가들과 비교할 때 특히나 다른 점이다.

 

  르 봉은 군중 행위의 기원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여러 가지 논리다. 르 봉에 따르면 이성적 논리는 인간 행동에 일부만의 영향을 행사한다. 그 뿐 아니라 다른 요인에 의해 행위가 이루어진 후에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이성이 개입한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이는 이후 심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실험을 통해 지지되었다(선로 딜레마 + fMRI). 둘째는 인종의 영향이다. 인종과 관련하여 르 봉은 집단 무의식을 제시한다. 이를 르 봉은 유전의 토대라는 용어로도 표현한다. 그런데 이 유전이란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는 아닌 듯 하다. 역사적 맥락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성 + 유전성 의 의미로 이해하는게 적절할 것 같다. 셋째는 사상과 신념이다. 사상은 문명에서 천천히 인종의 무의식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 사상이 제시된 후, 시간이 흘러 뿌리를 내리게 되며, 이때 문명의 변화가 일어난다. 신념은 무의식적 기원을 가진 믿음 행위다. 르 봉에 따르면 이성은 그것(신념)의 형성과 무관하다. 이성이 신념을 정당화하려고 애쓸 때 이미 신념은 형성되어있다.’ 고 한다. 위의 세 요소를 토대로 군중 행위가 이루어진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민족(인종)은 유전의 토대로 인해 특별한 정신 구조를 갖는다. 민족의 행동은 보통 안정되어 있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상으로 인해 문명 내에서 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르 봉은 완만한 변화와 갑작스러운 폭발로 행동하는 것 사이의 연결고리로 군중의 개념을 제시한다. 인종을 이루는 개인이 군중이 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심리적 특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군중의 행위는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쉽게 암시를 받기에 지도자에 따라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도 행동할 수 있다.

 

 군중은 정신적 통일성을 갖는다. 물론 그 토대는 민족의 정신구조(집단 무의식). 하지만 민족의 정신구조는 인종으로서의 개인 또한 갖는다. 인종으로서의 개인에 특정 자극이 주어지면 군중으로 변화하게 된다. 자극은 숫자에서 비롯되는 힘을 가졌다는 감정과 책임을지지 않아도 된다는 감정이다(이후 몰개성화 현상으로 지지됨). 이러한 감정은 쉽게 전염이 일어난다. 이 내적 자극제 외에 외적 자극제가 있는데 그것은 암시다. 개인은 군중이 되는 순간 퇴행이 일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외적 암시에 취약하게 된다.

 

 군중은 사고를 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행동한다. 또한 공통적으로 어떠한 기대를 갖고 있기에 암시에 취약하다. 또 군중은 이미지를 통해 생각한다. 말의 내용이나 논리가 중요한게 아니라 떠오르는 이미지, 감정에 따라 조종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군중을 제어하려는 자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 사용해야 한다. 군중은 그들의 영웅, 지도자에게도 과장된 감정을 요구한다(지나친 도덕성, 덕성 등). 이미지를 떠올리는 위력적 단어는 대개 모호함을 특성으로 갖는다(ex-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군중의 암시와 행동을 제어하는 메커니즘은 확언 반복 위엄이다. 여기서 위엄은 획득된 위엄과 개인적 위엄(성격적)으로 나뉜다. 개인적 위엄은 소수의 사람많이 갖는 특성이다(나폴레옹 등). 아마도 올포트의 주 특질과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르 봉은 법령의 변화로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본다. 훌륭한 제도는 국민의 정신구조와 역사에 들어맞는 제도여야 훌륭한 것이다. 물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고쳐나가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르 봉의 사회개혁관은 점진적 개선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극단적인 변화를 일으킬 경우 군중이 등장하여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이다(아마도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르 봉은 사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변하고 사람들의 무의식에 스며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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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리의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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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프레이리가 죽은 직후에 출간된 것으로 자유의 교육학과 더불어 프레이리의 마지막 저서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교사가 되려는 사람에게 프레이리가 해주고 싶은 말들이 적힌 것이다. 70년대 대표 저서인 페다고지에서 프레이리는 문해교육을 강조하였다. 문해교육이란 단순히 문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자 이면에 반영된 세계를 읽어내는 활동이다. 자신이 프레이리의 의견에 어떠한 견해를 갖든, 프레이리의 사상에 대해 이해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프레이리에 대해서도 세계 읽기가 가능할 것이다.

 

 프레이리의 전작들을 읽으면서 정리가 되지 않았던 점은 교사의 정치성 문제다. 교사의 교육 행위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서 적극적으로 정치적 행위를 하라는 것인지, 현실을 인정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라는 것인 명확하지 않았던 점 말이다. 아무래도 전작들에 비해 교사에 초점을 맞춘 저서인지라 내 의문점을 명확하게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교육의 정치성 문제는 프레이리가 80년대 교육과 정치의식에서부터 논의해온 문제다. 교육과정 사회학적 연구나, 재개념주의와 같은 교육과정 관점에서 볼 수 있듯이 교육과정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교육과정의 구성에는 여러 이해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의 지배집단의 이해관계가 반영되기 쉽다. 따라서 프레이리는 교사가 정해진 교육과정을 충실히 교육하는 것 만으로도 기존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본다.

 

 교사는 교사의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편향된 가치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교사의 정치적 행위의 악영향에 대해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하지만 프레이리는 우리의 통념과는 다르게 교육적 효과에 초점을 맞춘다. 교육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교육의 사회적 목적 중 하나가 학생들을 민주적인 시민으로 기르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을 없을 것이다. 프레이리는 민주 시민이란 민주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민주적 성향이란 주권을 위임받은 정치인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법과 약속을 어기는지 감시하고, 필요에 따라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대화와 토론에 참여하는 성향을 말한다. 교육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학생의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학생들과 신뢰로운 관계를 쌓을 수 있으며 진정으로 대화와 성장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사가 학생들이 민주 시민으로써 하길 기대하는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프레이리는 주장한다.

 

 프레이리의 지식관은 구성주의적 지식관과 유사하다. 그렇기에 전통적 의미의 좌파와 같이 정답이나 진리를 정해두는 입장을 철저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정답을 정해둔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교육의 형태가 어떠하든 본질적으로는 교화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급진적인 사상가와는 달리 프레이리는 사회 변화의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변화되어야 할 사회상의 정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변화는 시대적인 맥락에 따라서 늘 새롭게 모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레이리에게 있어 일차적인 목적은 국가의 구성원들을 민주적 성향을 갖춘 민주시민으로 기르는 일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장된 것이 대화를 중시하는 문제제기식 교육이다. 프레이리는 거의 모든 저서에서 자신의 사상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치부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프레이리가 의미한 방법론이란 교육의 형태가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프레이리가 거부한 전통적 의미의 좌파 사상가들의 교육도 겉으로는 대화의 형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교육의 활동 속에서 학습자가 도달해야 할 정답은 정해져 있다. 지배층이 피지배계층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깨닫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배층이 피지배계층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단 한 개의 정답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교화인 것이다. 프레이리의 문제제기식 교육이 단순한 방법론에 그치지 않으려면 교사와 학생이 함께 문제를 발견해가는 과정 자체가 중시되어야 한다.

 

 교사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프레이리의 입장은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교사가 학생들에게 편향된 시각을 갖지 않도록 하면서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현실성이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레이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의도는 깊게 고민해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의 불변성을 추구하는 근대성이 깨어지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스트모던 담론들이 등장함에 따라 세계적으로, 사회적으로 다양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포스트모던의 배경을 고려할 때, 여러 담론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의심과 독단을 경계하며 대화를 하려는 자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특정 담론이 근대성에서의 탈피로 인해 생겨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를 진리로 여기고 다른 입장을 들어보지도 않고 배격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정치적 입장 또한 그렇다.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보수 정당을 지지한다고 배척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진보 정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극우단체들도 어떤 시대에는 진보적이었던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는 내용들도 시대가 흐르면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보수나 진보가 주장하는 내용 자체가 아니다. 그 내용에 이르는 과정이 어떠한가가 진보와 보수를 결정짓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대화에 임할 때 정답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대화의 형식을 취할 뿐이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기르는 일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가정, 사회 등 모든 곳에서 대화하는 생활양식을 형성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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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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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윤리적이고 가치론적 문제를 다루는 책을 읽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이들을 두 분류로 나눈다. 하나는 문제의식을 갖도록 하는 책으로 우리의 생활환경 속에서는 인식할 수 없었던 사람, 문제들에 대해 알리고 정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논의의 주제로 끌고갈 필요성을 느끼도록 하는 부류다. 다른 하나는 논의를 위한 책으로 특정 주제에 대해 학문적으로 심도있게 다루는 전문서적이다. 다른 이름을 붙이자면 전자는 가슴으로 읽는 책’, 후자는 머리로 읽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내 개인적인 분류에 따르자면 이 책은 가슴으로 읽는 책에 해당된다.

  책에는 저자의 특성으로 인해 겪었을 사회적 경험들이 잘 묻어난 것 같다. 왜냐하면 저자는 흑인계 여성이고, 이 책의 내용은 인종, 젠더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동성애자). 아무래도 미국을 배경으로 쓰인 책이다보니 미국의 문화들에 대해서는 확 와닿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일 테니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담아낸 정서는 내가 느낄 수 있는 정도까지는 체험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저자에게 공감하고, 함께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성찰의 기회 또한 가질 수 있었다. 남성이면서 살고있는 나라에서 차별받는 인종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와닿는 것이 많았으니, 저자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자신의 얘기 같고, 책을 붙잡고 울고, 분노하고 한탄하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워낙 잘 담아냈기에 이 책이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인종을 주제로 연설을 하며 변화를 위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으며, 우리가 그렇게만 행동한다면 어쩌면 진짜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거라는 부분이다. 여기서 저자는 괄호를 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하지만 흑인 소녀들은 잊혀졌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이라고 말이다.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이전 사회에서 억압된 부분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여기서도 정신질환자의 차별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는구나라고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자가 오바마를 비판할 의도가 아니었듯(내가 파악한 맥락에서는 그렇다) 나는 저자가 왜 정신질환자는 언급을 안해주냐! 라고 비판할 의도는 전혀 없다. 저자가 겪어온 경험들이 인종과 젠더에는 민감하게 될 수 있었지만 정신질환자에 대해서는 민감해볼 기회가 없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종차별이 더 중요하다, 성차별이 더 중요하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권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는 소모적인 얘기를 하고싶지 않다. 미국 철학자 존 듀이는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이란 저서에서 자유의 의미는 시대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바뀌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각종 소수자에 대한 차별도 결국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에 대한 문제다. 처음에 인종차별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었을 때 성차별에 대한 문제는 사람들에게 잘 인식되지 않았다. 어쩌면 인종차별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급진적 실천가들 중에서도 성차별에 대한 인식 없이 왜곡된 성 도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재는 성차별에 대한 담론이 계속적으로 형성되며 주목받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 급진적인 사람들도 다양한 정신질환에 대한 지식이나 그들이 겪는 심리적 경험을 모른다면 정신질환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졌을 수도 있다. 정신질환자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소수자들은 존재할 것이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소수자들이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고 우리는 이들에 대해 아직 무지하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공동체에 속해 살아간다. 각각이 처한 입장이 다르기에 수많은 갈등이 생겨나고 각자 저마다의 얘기를 반복적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들고 일어나서 바꾸길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 다만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자신의 인식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겸손이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 말이다. 자신이 인종문제든, 젠더 문제든, 그 외 기타 소수자 문제든 문제의식을 갖고 급진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급진적이라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며, 이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며 더 많이 안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런 착각 속에 빠지게 될 때 어떤 급진적인 사상이라도 그 무엇보다 보수적인 사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독단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겐 자신의 무지를 알고 겸손하고자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이 어떤 주제에 대해 확실히 알때까지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며 현실은 우리가 답을 찾을 때 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불완전함 속에서 결단을 내리고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인식하지 못한 문제가 논의될 때, 내가 옳다고 믿고 열성적으로 달려온 길에 문제가 있었음을 마주하게 될 때, 자신의 잘못을 과감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열성적으로 추구한 믿음을 포기하려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다양한 윤리적 문제에 대해 어떠한 명쾌한 답을 내릴 순 없지만 아는 것에 대한 겸손, 믿었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는 여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기본적 태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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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9-1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를 통해 문제의식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리뷰안에 다 담겨져 있네요. 저자도 저와같은 다른 독자들에게도 좋은 리뷰인 것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S.HYoon 2017-09-15 20:58   좋아요 0 | URL
시간내서 읽어주시고 좋은 피드백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중고] 심리학과 종교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이은봉 옮김 / 창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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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에 의해 생겨난 이후로 수많은 분파, 입장들이 생겨났다. 그중 융은 자신의 입장을 분석심리학이라 불렀다. 분석심리학의 입장에서 종교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융에 대답이 이 심리학과 종교의 주제다. 이 책을 읽으며 주의해야 할 점은 제목에서 말하는 심리학이 현대적 의미의 심리학을 대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분석)심리학과 종교내지는 정신분석학과 종교정도가 의미를 잘 나타낼 수 있는 제목이 아닌가 한다.

  융은 우선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힌다. 자신이 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 뿐, 그에 대한 가치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융이 하려는 것은 종교현상이 옳다, 그르다, 사실이냐 허구냐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먼저 융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개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융에 의하면 정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우리가 인지하는 의식과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이다. 의식의 차원에서 우리의 성격을 집행하는 중심이 바로 자아. 자아는 자신의 정신을 의식의 범위까지는 파악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부분은 파악할 수 없다. 융은 우리가 인간의 정신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라 하며, 이론적 논의를 위해 인간 정신의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상징적 개념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자기.

  자기 라는 정신의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의식도 나의 일부이며 무의식도 나의 일부다. 그렇기에 무의식은 우리가 인지할 순 없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 정서, 행동에 영향을 행사한다. 융은 무의식에 대한 여러 개념을 설명한다. 대표적인 것이 콤플렉스그림자. 이들은 우리가 자신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들이나 감정들이다. 열등한 기능일 수도 있고, 지나치게 원시적인 욕구, 감정이라서 문명사회에 적합하지 않기에 거부한 것일수도 있다.

  융은 종교나 종교적 체험들을 특정한 심리적 현상으로 규명한다. 종교적 체험을 할 때의 심리적 현상은 특정한 패턴이나 형태를 가지는데, 이것은 그 종교의 종류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렇기에 융이 말하는 종교는 카톨릭이냐 이슬람이냐 불교냐는 관계가 없는, 종교적 경험의 원천적 형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종교적 체험은 매우 신비로우며, 과학적,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융은 이것을 우리 정신, 무의식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본다. 개인적 의견을 덧붙이자면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경험을 종교적 체험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융이 주목한 것은 상징과 원형들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적 체험을 위한 정형화된 형식들이 있다. 의식, 상징물, 전해내려오는 신화 등이다. 융은 시대,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의 상징과 원형들에는 공통되는 부분이 많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몇몇 사례들을 통해 특정 개인이 그러한 종교적 상징과 원형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의 꿈에서는 공통된 상징들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한다. 융은 이러한 경향성은 인류에겐 공통적인 심리적 경향성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제시한 개념이 집단 무의식이다. 집단 무의식은 인간이라는 종이 공통적으로 가진 심리적 경향성인 원형들이 모여있는 곳을 말한다. 책을 마무리하며 융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탐구한 방법들을 통해서 특정한 형이상학적 진리를 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인간정신의 기능을 확인하고 관찰할 수는 있다. 고 말이다.

  무의식의 정신적 내용들 또한 우리의 일부분이며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무의식을 억압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행위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경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는 우리의 무의식을 통합하여야 하며 이것이 융 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분석적 관점에서의 심리치료 목표이자 조건이 된다. 융의 관점과 방법론은 매우 특이하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융을 통해서 어떠한 진리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사실이다. 융의 관점과 방법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정서적 정화경험을 겪을 수도 있다.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 심리치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융의 방법을 통해 주어진 해석이 특정 개인의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는가 반영하지 않는 허구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 개인이 얼마나 새롭고 특이한 정신적 체험을 하고(융의 의미로 이를 종교적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정신적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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