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크라테스의 변명 ㅣ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8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대화편에서 특징적인 점은 소크라테스가 다른 대화편들처럼 특정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상으로 얘기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첫 서두인 ‘아테네인 여러분’에 드러난다. 이 구절이 지니는 의미는 직접적인 의미 그대로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아테네 ‘시민’이 아니라 ‘인’이라고 한 점이다. 대화편 「메논」에서 노예소년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점이나, 이 대화편에서도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 뿐 아니라 도공(생산계열)들을 찾아가 지혜를 구했다는 점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제자인 플라톤도 ‘인간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는 인식론적 명제를 나타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신’을 자주 언급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신이 제사 등을 포함한 관습의 상징적 의미인지, 어떠한 근본원리로서의 신을 상정하는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변명」이 플라톤의 초기 저작임을 생각하면, 전자의 의미로 생각하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사상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신과 가장 가까운 것은 ‘선의 이데아’, ‘형상 중의 형상’과 같은 개념들이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펼치기 이전이기에 신에 대해 깊은 고찰이 이루어진 상태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신에 대한 이론체계가 정립된 상태는 아닐 것이다.
소크라테스, 근본적으로는 저자인 플라톤의 지식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는 구절도 있었다. 22d의 ‘각 사람은 자기 기술을 멋지게 실행해 내니까 다른 가장 중요한 것들에서도 자기가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라는 구절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 앞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잘못을 두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첫째, 기술과 지혜는 질적으로 종류가 다른 것이므로 기술이 있다는 이유로 지혜롭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 그들은 수공기술에 대해 지혜로운 것이지, 다른 분야에 지혜롭지 않다, 즉, 양적으로 다른 종류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소피아(기술적 의미가 강함)와 프로네시스(실천적 의미가 강함, 사려)를 구분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즉, 그는 ‘지혜 일반’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그는 다른 대화편에서 건강함 자체, 훌룡함 자체 등을 문제삼는다. 그의 이데아론을 생각해 볼 때, ‘지혜의 이데아’라는 보편자가 있고, 수공에 대한 지혜, 운동에 대한 지혜, 정치에 대한 지혜 등의 개별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설명이 매끄럽다. 정리하자면, 플라톤(아마도 소크라테스도)은 기술에 대한 지혜와 사려와 같은 것들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개념은 아르테(arete)다. 이는 덕, 탁월성 등으로 번역된다. 아르테는 인간에게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20b에서 가축에게도 사용되고 있다. 또, 아르테는 인간에게는 ‘인간적인 덕’이란 명칭으로 사용되고, 가축을 대상으로 사용될 때도 ‘그들에게 알맞은 덕’이라고 서술된다. 즉, 덕이란 것은 특정 존재에게 알맞게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빗대어 이해하자면, 이데아, 또는 형상(aidos)과 같은 보편자는 개별자를 개별자이도록 하는 것이다. 보편자는 개별자에 앞선 것이며, 성립 근거다. 그리고 개별자는 보편자를 닮은 것이지만 완전하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개별자의 덕, 훌륭함은 그 보편자에 가까워지는 것에 있다. 플라톤에게 덕이란 보편자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변명」에서 플라톤은 덕을 갖추는 것이 그 존재를 ‘아름답고 훌륭하게’, ‘좋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름답다는 것이나 훌륭하다는 것은 어떠한 가치를 담은 표현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데아론을 통해 이해하자면, 플라톤에게 아름답거나, 좋은 것 등은 보편자를 더욱 더 닮은 상태에 붙여지는 수식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에게 존재론과 가치론은 결합되어있다.
소크라테스의 탐구관으로 잘 알려진 것은 ‘무지의 지’와 ‘대화’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에 비하여, 자신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기에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물론 자신이 ‘모른다’고 하는 것은 표면상의 의미로만 해석해선 안된다. 실제로 대화편에서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특히 옳은 것을 안다는 태도를 자주 내비친다. 특히 37a에서는 시간이 더 있다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 이유는 짧은 대화가 아니라 오랜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소크라테스가 길게 대화하는 목적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자신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의 이데아론, 덕과도 관련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받은 상황은 이데아론에서 이해된 덕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설득을 할 자신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데아론(이 시점에는 이데아가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표명되지 않을 뿐 이데아를 의미하는 것임), 덕이 옳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대화와 토론의 강조를 한다. ‘소크라테스식 대화’가 유명하게 알려진 만큼, 소크라테스는 오늘날의 대화와 토론이 강조되는 문화에 대해 모범이 될 수 있을 만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플라톤을 통해 그려진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대화와 토론’과는 다소 다르다. 플라톤을 통해 그려진 소크라테스의 세계관은 올바른 답이 자명하며,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생각이 자명하게 옳다고 여기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물론 대화와 토론의 과정에서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서로 깨닫지 못한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대화와 토론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내 주장이 이미 옳다’일 경우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하기보다 상대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을 부분을 찾는데만 집중하지 않을까? 대화와 토론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더 나은 답을 찾아보겠다’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