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수사관 내전 - 검찰수사관의 “13년 만에 쓰는 편지”
김태욱 지음 / 바이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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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년 조국사태를 시작으로 검찰개혁 필요에 대한 범국민적 요구는 서초동 촛불집회에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운집시키며 그 절정으로 치달았다. 당시 조국사태로 인해 검경수사권조정과 공수처 설치에 대해 많은 국민적 관심과 공감이 집중되었다. 나는 법에 대해서도 검찰에 대해서도 문외한인지라 관련 이슈에 대해 잘 몰랐고, 보도되는 용어 자체도 낯설어 개략적인 이해만 하고 넘어갔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온 나라가 '조국'과 '검찰'이란 두 키워드로 연일 도배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인가'하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웬만해선 송사에 휘말일 일이 없다. 죄를 짓지않는 한 검찰에 기소되고 법정에 설일도 잘없다. 그러나 작년에 들었던 말 중 섬뜩한 말이 있었다.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광화문 거리 앞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라도 감옥에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국사태를 보면서 그것이 불가능 한 것이 아니겠다라는 불안의식이 생겼다. 검찰에 대해, 법에 대해 잘 모르는 평범한 사람인 나에게 작년 사태에 관한 보도 중 크게 눈에 띄는 것은 '과잉'이라는 단어였다.


검찰은 막대한 인력을 투입하여 100여건에 달하는 대대적인 영장청구를 통해 조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수색하였고 언론은 엄청난 양의 의혹 기사를 쏟아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미 검찰과, 언론은 조국을 유죄확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반년이 넘게 지났다. 도대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무엇일까. 오히려 몇일전 보도된 조국관련 권력형 비리혐의의 가장 핵심인물인 5촌 조카의 1심 재판부 판결문에는 조카 개인의 횡령, 배임으로 인한 유죄를 선고하나 검찰이 주장했던 조국의 권력형 범죄의 증거는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한다. 그토록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조국의 혐의란 반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실체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온 나라가 '홀렸다'고 표현했다. 누가 국민을 홀리게 했을까.


최근 근현대사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공작'이 보도되어 가슴을 쓸어 내리게 했다. 암울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 공작의 타겟은 유시민 전 장관이었다. 검찰의 고위 간부와 한 언론사의 기자가 모의했다 의혹받는 이 사건을, 세상은 '검언유착'이라 불렀다. 그리고 최근 언론에서는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합법적인 지휘권발동이 장관과 총장의 대결구도로 연일 보도되고 있다. 검찰은 법무부의 외청으로 법무부의 소속이다. 마치 행안부의 외청으로 경찰청, 소방청이 있는 것이나 기재부의 외청으로 국세청과 관세청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정부조직법에 따라 17개의 청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한 청에 불과한 검찰에 대한 보도의 비중과 우리의 인식 속에 자리잡은 그 이미지는 분명 다른 '청'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무엇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었을까.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권력의 발현은 법원의 형 집행 선고가 아닐까. 그러나 잘못을 했다고 다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형을 때릴 수 있는 형사사건은 반드시 기소가 되어야만 재판도 가능한 것이다.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은 '기소편의주의'로 범죄혐의자를 법정에 세울수도 세우지 않을수도 있는 막대한 권한이 있다. 하지만 기소권이 검찰에만 독점되어 있다보니 검찰이 저지른 잘못도 검찰의 기소권으로 기소해야되는 상황, 허나 팔은 안으로 굽는 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공수처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겠지. 또한 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것은 영장청구권도 대단한 권한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대구, 경북지역의 신천지 교회에 대해 경찰이 신청한 영장이 검찰에서 막히는 것을 보며 경찰의 수사를 지연시키거나 막을수 있는 힘도 보았다. 그당시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감염의심자 명단확보가 초를 다투던 시기, 법의 상식이 일반의 상식과 다르다는 영화의 대사를 감안하더라도 경찰의 압수수색 영장이 두번이나 반려되는 것은 국민의 법 감정으로 볼 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찰의 강력한 독점된 힘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 전 국민들에게 공감되었다는 것이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져 오는 검찰관련 이슈들의 가장 큰 의의라 하겠다.


장관의 법무부도, 대통령의 청와대도 어찌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검찰, 정계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고, 언론도 눈치보기 바쁜 검찰, 이것이 작년과 올해 검찰에 대한 보도가 내게 주는 인상이다. 여기서 느끼는 감정은 한마디로 두려움이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있는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 통제되지 못하다고 인식될 때 그것은 오히려 국민에게 두려움을 준다. 기존 검사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나오던 비리 검사의 모습을 단순히 영화는 영화라 생각했으나 드러나는 현실을 지켜보며 허구 속에 상당한 진실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마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라 촛불혁명과 같은 사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국민의 성숙한 민주의식에 비해 검찰이 민주검찰의 보조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서두가 참으로 길다. 이미 앞서 거듭 밝혔지만 공대 출신으로 법에 대해서, 검찰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던 내가 기소편의주의니 기소독점권, 영장청구권이니 하는 개념들을 찾아 볼 정도로 작년과 올해 검찰이 보여준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 이슈들 때문에 그렇게 온 나라가 난리인데, 도대체 무슨일이 난 것이며, 뭐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호기심과 의문이 검찰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던차에 오늘 이야기할 책 <검찰수사관 내전>도 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마 검찰이 이렇게 이슈가 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는 이 책을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검찰에서 근 30년의 세월동안 검사가 아나 '검찰수사관'으로 일했던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영화나 드라마, 언론 같은 외부에서 보이는 검찰의 모습이 아닌 내부인이 보는 검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몇년전 <검사 내전>이라는 검사가 쓴 검찰에 대한 에세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검찰수사관 내전>을 먼저 만난 것이 반갑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검찰 조직하면 먼저 떠올려지는 '검사'보다는 '수사관'들의 이야기가 조금은 더 진솔할 것 같다는 개인적인 선입견 때문이다. 회사 내부가 돌아가는 사정은 사장보다는 오래 근무했던 직원이 더 속속히 알고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핵심 수뇌부로 갈수록 필연적으로 조직과의 이해가 많이 겹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상대적으로 검사보다는 지위가 낮은 수사관들이 상대적으로 제3자의 입장에서 조직을 객관화하여 말하기 쉽지 않을까. 입장상 말이다. 특히나 정년을 바라보는 수사관이라면 떠나는 마당이라 더 초연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혹시 검사를 사장으로, 수사관을 직원으로 표현해서 불편할 분들이 계실까 조심스럽다. 그 어떤 누구도 폄하하고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음을 밝힌다. 하지만 대중의 인식이 그런 것은 실튼 좋든 현실인 것 같다. 저자가 검찰 조직에서 검사를 제외한 공무원들이 마치 이름없는 '아무개' 같다고 언급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듯 말이다.


검찰에 있는 공무원은 크게 4 종류로 나뉜다. 가장 잘 알려진 검사, 그리고 수사관, 실무관, 행정관이다. 검사가 약 2000명, 수사관이 6000명, 실무관, 행정관이 2000명이라 한다. 그러니 검사로 대표되는 검찰에서 검사의 비중은 20%, 그 외의 공무원들이 80%인 것이다. 나는 검찰조직이 이렇게 큰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검사와 그를 보조하는 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었지만, 구체적 숫자를 접하게 되니 또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저자의 말처럼 경찰 순경도 세월지나면 지서장이라도 하고, 행정직 공무원도 면장, 동장은 하는데, 검찰직 공무원은 퇴직할 때까지 작은 장자리 하나 해보지 못하는 것이 숙명이라, 20% 주연을 퇴직할 때까지 보좌해야하는 숙명인 80% 조연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은 세상의 소수보다는 다수에 속할 일 많은 나의 묘한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이 책의 서술방식이 독특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저자의 직장 선배에게 지난날을 회고하듯 써내려가고 있다. 그래, 이 책은 에세이 중에서도 회고록에 가깝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크게 5 장으로 나뉜다. 1장 '가벼운 수다'에서는 검찰수사관으로서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2장 '대장놀이'에서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수사관의 눈에 비친 '대장'인 검사들의 이야기다. 권위적인 검사에서 소신있는 검사까지 그가 경험했던 검사들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3장 '수사일지'는 수사관으로서 검찰청에서 근무하며 겪은 업무적인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4장 '검찰청사에도 꽃은 피어난다'는 검찰청의 미담이 소개되는데,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다는 메세지를 던져주는 것 같았다. 5장 '이제는 나를 찾아'에서는 30년 검찰 생활의 마지막을 앞두고 그간의 세월을 돌아보고 이제는 더이상 조직의 조연이 아닌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인생 제 2막을 준비하는 설레임이 담겨있다. 수사관인 저자에게 검찰하면 당연 수사관과 검사가 핵심이기에 수사관을 다룬 1장, 검사를 다룬 2장이 분량상으로도 가장 비중이 컸다.



<1장 가벼운 수다>

먼저 1장의 이야기를 해보자. 수사관들이 검사에 대해 갖는 감정에 대해 참 잘 와닿는 표현이 있다. "수사관들은 사법시험을 통과하여 들어온 검사들에게, 자신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열등감, 또는 자신을 뛰어넘은 능력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자신도 법학공부를 했었다는 근자감에 따른 경쟁심 등 복합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공부의 결과가 그렇게 실감나게 와닿는 곳도 드물 것 같다. 같은 법대를 나왔지만 사법고시를 통과 못한 선배는 수사관으로, 통과한 후배는 검사가 되어 만나는 곳이다. 물론 학창시절 반에서 공부 잘했던 아이가 소위 '사'자 붙은 직업을 가지고 나머지 아이들은 고만고만한 직업으로 사회적 지위가 갈리는 것은 현실에서 흔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한 직장에서 같이 일할 확률은 낮아 체감할 일은 다소 드물지만, 법대에서 같이 공부하던 선후배가 시험공부 결과로 사실상 '신분'이 갈려 한 조직 안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꼭 같은 학교가 아니더라도 같은 시험을 준비했던 사람인데, 누구는 붙고 누구는 떨어져 직위가 갈리니 '존경심', '열등감', '경쟁심'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이해는 된다.


이름처럼 수사관은 수사를 소임으로 하는 관리다. 모든 수사 내용은 서류로 만들어야 증거가 되는데, 이를 '조서'라고 한다. 검사는 조서를 근거로 기소와 불기소를 판단하게 된다. 따라서 수사의 핵심은 조서를 만드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조서 작성 대부분은 수사관이 하는데, 정작 명의는 검사의 명의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검사를 국민으로 부터 일을 받은 '원도급자'이고, 수사관은 '하도급자'라는 비유가 나온다. 일은 수사관이 다 하는데, 정작 드러나는 것은 검사 명의 뿐이니 기운이 빠질 법도 하다. 현실적으로 검사실에서 수사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수사의 '보조자'로 되어있으며 '검찰수사관'이라는 호칭도 법에도 없는 것이어서, 검사도, 경찰도 아닌 애매한 정체성에 아쉬움을 드러내며 명확한 신분규정이 필요하다는 푸념이었다.


실제로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여, 생전 처음 '검찰청법'을 찾아보았다. 54조까지 있는 검찰청법에서 45조에 이르러 검찰청 직원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검찰이라는 조직 자체가 검사를 중심으로 한 조직이라 어쩔수 없는 것도 현실인 것 같다. 또한 검찰수사관에 대해 경찰과 동일하게 '사법경찰관리'라는 형사소송법상 신분이 정해져 있고,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는 직무도 명문화되어 있기에 정체성의 혼란을 언급하며 그렇게까지 아쉬워할 필요가 있겠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자의 하소연은 단지 법에 나온 호칭이나 직무가 아닌 평생 검찰청에서 근무하며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느꼈던 신분 차이로 인한 불편함과 서러움의 토로이리라. 이야기가 새지만, 덕분에 법을 찾아보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되었는데, '사법경찰리'라는 말이 있었다. '사법경찰관'은 경찰관이겠거니 해도, '사법경찰리'는 생소했다. 형사소송법에서는 경찰 계급 순경, 경장, 경사까지는 '사법경찰리'로, 그 이상은 '사법경찰관'이며, 사법경찰리는 수사의 보조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관리'라는 말이 '관'과 '리'라는 별도의 직책이 합쳐 생긴 집합명사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 덕분에 다시 보게된 영화가 3편 있었는데, <아델라인:멈춰진 시간>, <부당거래>, <아수라>이다. <아델라인>은 2장에서 나오는데, 기왕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미리 같이 언급한다. <아델라인>은 부제에서도 알수 있듯이 늙지 않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시간이 흘러 세상이 변하면 어떤 존재라도 그에 맞추어 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검찰도 시대에 맞게 변해야한다는 것을 언급하고자 소개된 영화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뒤의 두 영화이다. <부당거래>에 나오는 배우 류승범이 연기한 검사는 비리가 드러나도 힘있는 장인이 끌어주고 당겨주는 소위 빽있고 줄있는 검사이고, <아수라>에 나오는 배우 곽도원이 연기한 검사는 야망은 있지만 지방대 법대 출신으로 라인을 잡기 위해서 '발악'할 수 밖에 없는 빽없는 검사다. 이 두 검사가 나오는 영화에 공통점이 있는데 두 영화 모두 배우 '정만식'이 수사관을 연기했다는 것이다.


같은 배우, 같은 역할이지만, 각 영화에서 보여주는 수사관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부당거래>에 나오는 수사관은 저자가 듣기 민망하고 자괴감을 느꼈다는 '검사 시다바리', '검사 따까리'라는 말을 부인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검사의 개인비서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검사 미용샵까지 따라가서 일일이 보고하고, 사람들 앞에서 검사에게 모욕과 핀잔을 듣기도 일쑤다. 수사관들을 향해 검사는 화가 나면 서류 뭉치를 던지고 소리를 지르니 화풀이 대상같기도 하다. 급기야 수사관의 직속검사에게 화가난 부장검사가 차마 검사에게 화를 다 못 풀자, 봉건시대 주인 대신 몸종이 매를 대신 맞듯, 옆에 있던 수사관에게 대신 조인트를 날리기도 하니, 듣는 수사관님들 기분 나쁘시겠지만 이쯤되면 적어도 영화 상으로 본다면 '시다바리', '따까리'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자는 이런 수사관의 모습이 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수사관을 이렇게 그리는 영화가 나오는 것은 대중의 인식이 현실의 차이에 기인한 것일테고, 영화로 말미암아 그 차이가 더 벌어지는 악순환을 안타깝게 보고 있었다.


<부당거래>의 정만식 수사관이 개인비서같았다면,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영화이지만 <아수라>의 정만식 수사관은 '폭력배'처럼 나온다. 수사를 위해 검찰청이 아닌 사적인 공간에 범죄자를 결박하고 검사의 지시에 따라 고문한다. 얼굴에 천을 씌우고 장갑을 낀 주먹으로 가격하니, 금새 천에 핏불이 스며든다. <부당거래>에서는 검사가 소리를 질러도, 종이를 던져도, 발로 차도 '예이, 예이'하는 환관같은 느낌이 있었다면, <아수라>에서는 때로는 검사의 부당한 지시에 거부도 하는 훨씬 거친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때로는 개인비서로, 때로는 깡패처럼 그려지는 검찰수사관의 모습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인식되겠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책 덕분에 코로나로 바깥 출입도 자제되는 요즘 같은 시기, 지나간 영화들을 다시 보는 계기는 책이 주는 덤, 별책부록쯤 되지 않을까. 그냥 지나쳤던 조연인 수사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점으로 보니 영화가 다르게 느껴진다. 역시 책이란 저자의 관점을 빌어, 같은 세상도 내가 보지 못했던 방향으로 다르게 볼 수있는 즐거움을 준다는 걸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수사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현직자가 본 현실과 얼마나 많이 동떨어졌는지 지적했던 것에 덧붙여, 이 장에서 저자는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한번 치뤘다하면 수십만의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이 몰리는 기사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요즘, 당연 검찰직 공무원에 대한 관심도 높다. 행정직 공무원, 경찰, 소방관 같은 공무원들은 일상적으로도 간간히 볼일도 있고, 어떤 일을 하는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검찰직 공무원에 대해서는 홍보가 부족한 것이 사실, 그래서 영화에 나온 것처럼 검사비서로만 알려져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검사에게 수사관이 쪼인트 까이는 영화 장면을 가족들과 같이 시청했던 수사관은 그 순간 자식들의 눈치를 보았고, 그런 수사관을 조심스레 살피는 아내의 모습이 책에서 그려지는데, 평생을 바쳐 일한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자식들 앞에 당당하고 떳떳하기 위해서라도 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도 한 몫 했던 것이다. 나 또한 그 모르던 사람 중 한명이었지만, 저자의 목적대로 수사관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렇게 글도 쓰고 있으니, 저자의 계획이 잘 먹히고 있는 것이리라.



<2장 대장놀이>

2장에서는 수사관이 바라본 검사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상사가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상사치고 아랫사람에게 뒤에서 욕 안 듣기도 어려운 법, 검사를 상관으로 둔 수사관의 입장이기에 칭찬보다는 그 반대가 더 많이 담겨있다. 하기사, 사람 심리란 것이 간사하여 찬사보다는 흉에 귀가 솔깃해지니, 읽는 사람 입장에서 '뒷다마'가 나쁠리는 없다.


사소하게는 인사 안 받아주는 검사. 가운데 자리에 목매는 검사에 대해 꼬집는 것을 시작으로, 술자리에서 남녀직원 할 것없이 돌려 마시는 '사발주'를 고집하던 검사의 이야기도 있었다. 검사라고 말했지만, 상사라고 바꿔 써놓아도 어색할 것 없는 어느 조직에서나 있을 법한 상사의 이야기였다. 해당 청의 모든 직원들이 열외없이 돌아가며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방송 멘트를 하라고 '명령'한 검사도 있었고, 검사는 혼자서도 30평대 '관사'에 거주하면서도 수사관은 여러명이서 10평 이하 '숙소'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 개선건의를 요청하자 "억울하면 검사로 들어오시지"라며 날카로운 팩폭을 날리던 검사의 이야기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뭐 무난하다.


인상깊었던, 그리고 대조되었던 두 검사의 이야기가 있었다. 한 검사는 증거를 조작했다. 그것도 저자가 썼던 조서를 조작해서 졸지에 죄가 없다는 조서가 죄가 있다는 조서가 되어버린다. 그 사건은 결국 피고의 유죄로 판결나고, 다행이라 해야할지, 벌금형에 그쳐 피고는 항소없이 넘어갔다한다. 세상사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없고, 크고 작고의 문제이지 평생토록 죄 한번 안짓고 사는 사람 없다지만, 검사가 증거 조작을 했다는 것을 검찰 내부자를 통해 들으니 섬뜩하긴 했다. 차라리 심증은 강하나, 물증이 부족해, 정의를 실현하기에 현실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니 불가피하게 그랬던 것이라 믿고 싶었다.


다른 검사의 이야기는 부전지를 붙인 검사다. '부전지'라는 용어가 낯설어 찾아보았다. 간단한 내용으로 지시를 내릴때 작성하는 문서라고 되어있다. 지금은 전산화되어 결재 문서를 전자로 처리하지만, 과거 서면으로 할 당시, 반려라던가 내용 추가, 보완 필요시에 요구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서류가 되겠다. 나는 보고서 앞에 붙이는 포스트잇 메모가 떠올랐다. 회사에도 부장님이 계시듯, 검사들 위에도 검사들의 부장님인 부장검사가 있다. 한번은 검사가 사건에 벌금처분을 해서 보고를 했는데, 부장검사로부터 벌금 액수를 낮추라는 부전지가 붙어 반려가 되었다고 한다. 외부 청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되는 상황, 강단있는 검사는 다시 부전지를 붙여 원래의 액수 그대로 기재하여 부장검사에게 올린다. 그리고 그의 부전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한다, '본직의 소관임'. 멋지다. 이런 검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지만, 저자의 말대로라면 제도적으로 이젠 그런 검사는 더 귀해질 것으로 보인다. 부장검사의 지휘감독권한이 더 강화되어 검사의 의로운 '항명'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대단할 것은 없지만,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검찰청과 법원에 대한 것인데, 항상 검찰청과 법원은 붙어있다는 것. 물론 업무적 효율을 위해서 가까우면 좋겠지만 부지상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붙어있다고 한다. 그것도 들어가는 입구에서 왼쪽은 검찰청, 오른쪽은 법원으로 거의 굳어져 있고, 더 재밌는 것은 건물의 높이까지 맞춰져 있다고 했다. 높이에 대해서는 검찰과 법원의 묘한 경쟁심의 발로로 높이가 안맞을 경우 벽돌을 조금 더 쌓아서라도 맞추고, 건축구조상 도저히 맞출수 없는 경우 상대쪽에 양해를 구할 정도라고 한다. 건물의 높이가 높다고 지위가 높은 거라면 청와대는 63빌딩(이제는 더 높은데도 많지만)에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스운 생각도 든다.


궁금하면 또 찾아봐야 하는 성격이라 내가 살고 있는 부산지역의 검찰청을 찾아 보았다. 부산에는 연제구의 지방검찰청, 해운대구의 동부지청, 강서구의 서부지청 3군데가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 지방검찰청 옆에 지방법원, 동부지청 옆에 동부지원, 서부지청 옆에 서부지원이 검찰청이 왼쪽, 법원이 오른쪽으로 자로 잰듯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다 로드뷰를 통해서 건물의 높이도 보았는데, 사진상 확인했지만 분명 높이도 비슷했다. 심심할 때 한번 지도로 자기지역의 검찰청을 검색해봐도 재밌을 것 같다. 나는 검찰청과 법원이 바늘 가는데 실 가듯 같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앞서 검찰청 직원의 신분에 대한 이야기에서 검찰청법을 찾아보다 검찰청법 3조에 법원에 대응해서 검찰청의 위치를 선정해야한다는 내용이 있었으니, 이는 법에서부터 근거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위치야 업무상 편의를 위해 그렇다 하더라도 저자의 말처럼 건물 높이로 양해까지 구한다는 부분은 조금 많이 간 게 아닐까.


<3장 수사일지>

30년 가까이 검찰에서 수사를 하다보니 얼마나 많은 사건을 저자는 경험했겠는가. 자신의 아내와 외도한 친구를 살해한 이야기는 딱했고, 죄의식으로 고통 받는 범죄자의 이야기에서도 죄인은 응당 죄값을 치뤄야 하겠지만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오늘도 TV에서 부모로부터 방치된 유아가 구조된 이야기가 나오던데, 7개월 된 아기가 방치되어 굶어 죽은 일이 생겨 저자가 검사와 함께 검시를 나갔던 이야기에도 마음이 착찹해졌다. 듣기만 해도 안타까운 일인데, 직접 아이의 차가운 시신을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했던 저자는 오죽했을까. 마음이 아팠던 저자가 3일을 제대로 못잤다고 하니 죽은 사람도 안되었고, 직업상 사건으로 인한 시신을 마주해야하는 종사자들의 고생도 생각해보게 된다.


분위기를 잠깐 돌려서 '신문'과 '심문'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이것도 상식삼아 언급해본다. 신문은 물을 신(訊)에 물을 문(問)으로 묻고 또 묻는다는 의미로서, 캐내서 묻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수사를 하는 검찰이나 경찰에서 주로 사용된다. 반면 심문은 살필 심(審)에 물을 문(問)으로 살피어 묻는다는 의미로서, 판단을 위해서 묻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법원에서 주로 사용된다. 관련 분야에 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사실 궁금할 일도, 자세히 알아볼 일도 없는 용어이지만 또 이런 책 덕분에 알게된다.



<4장 검찰청사에도 꽃은 피어난다>

이 장에서는 차가울 것 같은 검찰청도 훈훈하고 따뜻한,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자신이 구속한 비행청소년을 정기적으로 검사실로 불러 멘토가 되어준 검사, 재소자들을 위해 검정고시 책을 선물하는 검사의 이야기를 통해 주변과 이웃을 살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검사의 미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여성 검찰수사관은 과거 작성했던 조혈모세포 기증서약을 했었다. 그리고 10년 후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12세 소녀에게 서약을 이행한 아름다운 사례도 있었다. 또 한 남자 검찰수사관은 늦은 시간 자상으로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는 소리에 흉기를 든 범인과 정면으로 맞서며 죽을 위기에 처한 목숨도 살리고 범인도 검거한 이야기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검찰 공무원들의 사명의식에 든든함과 감사함을 느끼게 했다.


그렇다, 검찰에서 일할 일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 이 책의 '쓸모'란 어쩌면 이런 부분에 있을 것 같다. 앞서 서두에 나는 검찰에 대해 부정적이고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정치검사, 비리검사, 언론과 유착하여 부정한 사익을 꾀하는 검사, 사건을 부당하게 조작하는 검사가 분명 존재하고, 그들로 인해 검찰이 욕을 먹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은 소수이고 대다수의 검찰청 직원들은 자신의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고 공무원으로서 국민을 위해 늘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리검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 영화 <더 킹>의 마지막 부분에 조인성은 이런 나래이션을 한다. "그 평범한 샐러리맨 같던 선배 검사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어 결국 부장검사가 되었고, 차기 검사장에 유력한 후보로 올랐으며, 안희연 검사(좌천을 감수하며 검찰 내부 비리를 밝히려던 검사)는 여성 검사 최초의 감찰부장이 되었다." 권력, 비리와 연루되지 않고도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다면 비록 화려한 스타처럼 세간의 이목을 끌지 않더라도 묵묵히 성실하게 맡은 역할을 해내면서도 충분히 성공할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작년 일본의 무역도발에서 현명한 우리 국민들은 '노 재팬'이 아닌 '노 아베'를 외쳤다. 대다수의 선량한 일본 국민과 극우 아베 정권을 분리한 것은 신의 한수였다. 그 덕분에 아베 정권의 잘못된 행동에 공감한 상당수의 일본 국민들도 한국을 지지하여 국제사회에 우리의 정당성을 제대로 알리고 아베 정권에 대한 압박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것처럼 검찰도 너무 싸잡아서 비난하면 성실하게 일하고 있던 이들도 사기가 저하되고 의욕이 상실될 것이다. 그러니 잘못된 검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본분에 충실한 대다수가 있다는 인식 위에서 비판도 해야 훨씬 개선의 폭도 커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5장 이제는 나를 찾아>

이 장에서는 30년의 검찰 생활의 종점을 향해가는 저자가 은퇴 후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은퇴 후의 계획이라는 것이 저자의 사적인 영역이라 가볍게 읽고 넘어가면서도, 나는 내용 자체 보다 평생을 한 직장 조직에 바친 사람이 그곳을 떠나올 때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의 아버지도 한 직장에서 40년을 근무한 분이다. 큰 조직은 아니지만 공채 평직원으로 입사해서 조직의 최고 결정권자까지 올랐다. 아버지로서 시시콜콜하게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 일일히 그것도 자식들에게 이야기하진 않을 것이나, 내가 어머니를 통해 듣거나, 아버지의 약주 기운을 통해 들었던 아버지의 직장생활은 굉장히 파란만장했었다. 하기야 누구의 인생이든 평생을 펼쳐놓고 보면 파란만장하지 않기가 드물고, 복받은 것이리라. 그래서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한번은 아버지도 자신의 평생 직장의 이야기를 써보시면 어떻겠냐 말씀드렸더니 전화기 너머의 정적이 느껴졌다. "아버지 회사생활도 파란만장했잖아요, 억울하게 좌천도 당했었고, 보란 듯이 다시 복귀도 했었잖아요." "...그렇지, 내 이야기도 한 파란만장하지, 하하하." 아버지도 나의 제안을 가볍게 지나가는 이야기로만 듣지는 않으시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도 정년퇴직을 하신 분들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어떤 분은 믿는 것이 있으신지 당당하고, 얼굴에서는 묘한 설레임 마저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분은 굉장히 우울해하셔서 보는 내가 안타깝던 적도 있었다. 저자처럼 글쓰는 재능을 발견해서 글을 쓰는 것도 좋고, 저자처럼 전원주택을 가꾸며 소소하게 밭을 일구는 재미를 느끼는 것도 좋고, 저자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할 꿈을 꾸는 것도 좋아보인다. 무엇이든 평생을 나 자신 보다도 가정의 누구, 조직의 누군가로 살아오며 충분히 수고하셨으니, 가정도, 회사도 이젠 내려놓고 자신의 꿈,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응원하고 싶다. 나의 부모님도, 다른이의 부모님도 말이다. 저자처럼 분명한 버킷리스트 같은 것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글을 통해 지난 날을 회고해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선택지라는 말을 하고 싶다. 꼭 책을 내지 않아도 되니까, 나의 한 생의 기록으로도 그 일의 의미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혹시 누가 아는가, 그 과정 속에서 평생을 모르고 살았던 숨은 재능을 발견할지도 말이다. 검찰 이야기에서 또 잠시 샜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화나고 짜증나고 속상하지 않을 무언가가 내 아내, 내 남편이 될 때는 화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속도 상한 것은 바로 그것이 '나의 무엇'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 공감가는 말이다. 그에게 검찰도 그랬다. 앞서 검찰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하고, 그 중에서는 좋은 이야기도 때로는 따가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기본적인 밑 마음은 그곳이 '나의 검찰'이라는 애정이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군대를 그렇게 싫어하고 욕할지라도, 전역할 때는 묘하게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2년의 정도 참 무서운데, 30년의 정은 더 말해 뭐할까. 비판의 글에서 조차도 애정이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검찰의 좋지 못한 모습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자이기에 검찰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도 뉴스에 '검찰'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눈과 마음이 가고 귀가 쫑긋해진다고 하니, '어쩌면 사랑일까'라는 저자의 말은 내가 보기에도 분명 사랑이리라.


이 책을 통해 검찰 수사관의 검찰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진득하게 들을 수 있었다. 딱딱하고 공식적인 언론이나 매체보도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그 내부인의 솔직한 글을 통해 한 걸음더 깊이 알게 되었고, 검찰 조직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검찰에 대한 외부인의 고발이나 문제제기는 있었지만 내부인의 글은 드물었기에 그의 용기있는 고백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검찰하면 검사가 아닌 검찰 수사관도 있음을 사람들이 떠올리는데 이 책이 큰 역할 할 것이라 기대도 해본다. 저자의 말처럼 그동안 검찰이라는 단어로 검찰수사관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가족 외에는 없었을 테니까. 잘 드러나지 않더라도 묵묵하게 소임을 다하는 이들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알아줄 때 세상은 한층 더 살만해진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여러 의혹과 문제제기로 검찰의 신뢰가 많이 떨어졌지만, 분명 그 속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고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몇몇 소수의 사람, 세력에 의해 검찰 전체가 이룩한 신뢰와 명예가 망가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구조적으로 잘못된 부분들은 법과 제도로 보완되어야 하며,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는 조직 내부의 인식개선을 통해 변화하여, 검찰이 다시 국민들에게 신뢰와 명예를 되찾기를 바라며, 검찰을 위한 검찰, 소수 기득권을 위한 검찰이 아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대한민국 검찰 화이팅, 검찰수사관, 검찰실무관, 검찰행정관, 그리고 검사들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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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길은 있다 -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발견하는 법
오프라 윈프리 지음, 안현모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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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그녀의 이름은 토크쇼의 전설을 넘어, 이미 세계적인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언제나 길이 있다>는 그녀가 만난 90명의 세계적인 인사들이 던지는 '영적' 가르침이 농축 주스처럼 알맹이만 압착되어 담겨 있는 책이다. 종교, 명상, 요가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영적'이라는 단어는 크게 거부감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 저 단어는 '사이비'나 '점집'같은 것을 떠올리는 낯선 단어일 수 있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적', '정서적'이란 단어로 치환하여 외부가 아닌 '내면', 육체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겠다.


우선 저자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이야기 해봐야겠다. 그녀를 토크쇼의 여왕으로 만들어 준 전설적인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를 25년간 진행하며 정치, 종교, 문화, 사회, 환경 등 굉장히 다양한 분야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과 대담을 나눌 수 있었다. 그것은 전세계의 시청자들에게도 대단한 영감을 주는 과정과 동시에 그녀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도전은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그치지 않았다. 토크쇼를 관두고 2011년 자신의 이름을 건 케이블 채널 OWN(Oprah Winfrey Network)를 개국하여 한층 더 그녀의 영향력을 높였다. 그녀의 자산은 약 4조원대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 흑인들을 포함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며 인권을 포함한 여러 사회분야에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1000억 달러(약 120억)를 기부하여 또다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렇듯 그녀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볼 때, 앞번 미국 대선에서 그녀의 출마설이 큰 이슈가 되었던 것도 사실 무리가 아닌 것이다.


내가 해외 저자의 책을 선택할 때, 옮긴이의 이름이 영향을 미친 것은 '류시화' 시인이 유일했다. 그러나 이 책으로 그 유일함은 깨지게 되었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옮긴이 '안현모'라는 이름이 나의 눈길을 멈추게했다. 혹시 동명이인일까 해서 검색도 했으나 역시나였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TV를 잘 보지 않는다. 그래서 연예인도 잘 모른다. 하지만 얼마전 우연히 <라디오 스타>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그녀가 나왔다. 차분하게 말도 잘하고 웃는 모습이 예쁜 굉장한 미인이였는데, 통역가라고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빌게이츠 같은 유명 인물들의 통역을 맡았고 북미정상회담 때 CNN, 아카데미, 오스카 시상식의 동시통역도 한 적있는 실력있는 통역가였다. 그녀를 포함해서 집안에 통역가가 4명이나 되는 통역가 집안 출신이었다. 서울대 언어학과를 거쳐 한국외대 통번역 대학원을 나온 엘리트이기도도 하여, 미모와 지성과 실력을 두루 겸비한 여성이라는 인상을 지울수 없었다. 이야기가 조금 새는 것 같지만, 그녀가 보여준 매력은 결국 내가 그녀가 광고 찍은 유산균 제품마저 구매하게 만들었다.(사람이 참 이렇게 단순하다.) 이름을 잘 못 외우는 나였지만, '현모'라는 이름은 '현모양처'를 떠올려, 기억하기도 쉬웠다. 그랬던 나였기에 시간이 흘러 우연히 이 책을 만나게 되었을 때, 오프라 윈프리 만큼이나 '안현모'란 이름이 반갑게 느껴진 것이다.


<언제나 길은 있다>는 제목의 '길'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바로 '내 삶의 길'을 말하는 것 같다. 내 삶의 길이란 결국 내 삶의 목적과 부합되는 길을 말할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프롤로그 첫 문장에 "나의 목적은 무엇일까?"하는 물음으로 채웠다. 우리는 고민이 많다. 걱정도 많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다. 나의 욕망도 이루고 싶고, 타인의 기대도 채워주고 싶다. 더 성장하고 싶고, 더 성공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가 않다. 때론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건지 방황하기도 하고, 내가 왔던 길이 허무하게 느껴지며 앞이 캄캄해지는 순간도 있다. 안현모는 그럴 때 이 책은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앞길을 밝혀줄 '손전등'이 되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책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내 삶의 길을 찾는 '손전등'이 되어 줄 10가지 '씨앗', '뿌리', '속삭임', '구름', '지도', '길'. '등반', '나눔', '보상', '집'을 주제로 각 장을 이루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와 명사들이 나눈 영감과 지혜가 10개의 주제로 정리되어 있다. 이것은 책 제일 마지막 장에서 고스란히 '길을 잃을 때마다 펼쳐보는 오프라의 10가지 조언'으로 귀결된다. 200페이지 정도 되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은 결국 책의 제일 마지막 단 한장에 실려있는 '오프라의 조언'을 위한 보충 설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특별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Image Credits'을 별도의 페이지로 소개했어야 할 만큼 많은 '사진'이 실려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과 계절별 정경을 담고 있어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다. 자연의 형색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사막의 붉은 빛, 단풍의 노랑, 거센 파도의 파랑, 눈 내린 숲속은 하양, 라벤다의 보라, 여러 형형색색의 자연의 빛깔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또한 웅장한 자연을 보면서 좁게 같혀 있던 시야가 넓어지길 바라는 오프라의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Chapter 1. 씨앗 : 나로 살겠다고 선택하라>

첫번째 장의 주제는 '씨앗'이다. 씨앗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씨앗'이란 무엇일까. 그에 대해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왔는가"라는 고민, 즉 '소명'에서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이 장의 씨앗은 소명을 상징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명확하게 알 때만이 내 안의 잠자는 거인을 깨울 수 있다. 소명을 알지 못하는 '나'는 진실하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우리가 하는 착각은 우리의 소명이 단 한가지 일 거라는 생각이다. 오프라는 소명이란 꼭 불변하는 것도 유일무이한 것도 아니라 말한다. 한 사람의 삶에는 여러가지 소명이 있을 수 있으며 소명은 때로는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 많은 스승들은 그들의 소명은 무었이었는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붓다를 포함한 모든 영적 스승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는 세상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소명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내 처지에 따라 소명은 바뀌기도 하고 늘거나 줄기도 한다. 어쩌면 삶이란 매 단계마다 나의 소명을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오프라는 "나로 살겠다고 선택하라"했다. 소명을 찾는다는 것은 바로 나를 찾는 것으로 이어진다.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의 답을 찾는 것, 그리고 내가 선택한 답을 믿고 내 여정의 첫 발을 과감하게 딛는 것, '나로 살겠다'는 여정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Chapter 2. 뿌리 : 매순간 성장하라>

두번째 장의 주제는 '뿌리'다. 뿌리라는 것은 나무를 지탱해주는 본질, 근원을 뜻한다. 이번 장은 우리를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번 장에 나오는 스승들의 뿌리로는 적성, 호기심, 독특한 시선, 진실, 비전, 등이 있었고 심지어 슬픔, 결핍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도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과거 내가 읽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창의적인 삶'이란 이미 내 안이 있는 것들을 제대로 발현하는 삶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힘을 끊임없이 발산하는 과정이 아닐까. 오프라는 내 안의 뿌리를 언급하며 매순간 성장할 것은 강조했다.


이 장에서는 '도토리 안의 떡깔나무'라는 비유가 나온다. 커다란 떡깔나무의 씨앗은 작은 도토리다. 지금 비록 우리가 도토리처럼 작고 보잘 것 없이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도토리가 아닌 그 속에 들어있는 떡깔나무로 볼 줄 알아야한다. 도토리가 우람한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떡깔나무가 될 수 있음을 떠올리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믿고 뿌리를 키워나가야 한다. 웅장한 떡깔나무가 당당하게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뿌리가 튼튼히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Chapter 3. 속삭임 : 내 안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라>

'내 안의 속삭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번 장에 나오는 스승들에게 '속삭임'이란 신의 음성, 마음의 소리, 직관, 영혼, 본능이었다. 각자의 '속삭임'의 주체는 비록 달랐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여라"는 것이다. 솔직히, 메세지는 심플하나 결코 간단하지 않은 조언이다. 왜냐하면 그 '속삭임'만을 따라 살기에 우리는 나약하다. 걱정도, 두려움도 많다. 그래서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조직의 비리를 파헤치는 내부 고발자나,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 독재시대의 민주화운동가들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고 있으나 현실의 문제는 결코 녹록치 않다. 거꾸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시대의 잘못된 조류에 역행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용기있는 사람들이고 위대한 사람들이다.


내가 너무 이야기를 거창하게 끌어간 건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으나 오프라의 삶에 견주어 볼 때도 이는 사실이다. 그녀는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흑인이라는 인종차별의 높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다른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해왔고 굶주리고 못 배우는 아프리카 흑인 아이들을 구제하는 활동을 꿋꿋이 해왔다. 그간의 활동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녀 또한 시대와 세상의 벽과 마주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 장에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장 피켓을 들고 뛰어 나가거나 생업을 걷어내고 전 재산을 기부하라는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직업에 있어서라면 적성을 택할 것인가, 돈을 택할 것인가. 이성에 있어서라면 외모인가, 능력인가, 성격인가. 성공을 위해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과의 시간을 최우선순위로 둘 것인가. 대단한 사회운동이 꼭 아니더라도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갈림길과 조우하게 된다.


그 선택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스승들이 줄 수 있는 조언은,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듣는 것과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르다. 우주든, 신이든, 양심이든, 무엇이라 부르던지 간에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우리에게 경종의 메세지를 던진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못 알아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 속에서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해보자. '읽지 않음' 태그가 붙은 중요한 이메일이 우리가 들여다 보기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나는 한때 꾸준히 3년간 명상을 했었다. 불안이 많고 덤벙대는 내 모습이 그때 많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고, 내면이 강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지금은 그때처럼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내면의 목마름이 느껴질 때 명상을 한다. 나는 내 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라는 오프라의 조언에 많은 공감이 간다. 내가 그 효과를 직접 경험했었끼 때문이다. 이른 새벽, 남들은 다 자는 고요한 시간, 오롯히 홀로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의 소리에 집중해보자. 단 10분이라도 좋다. 명상의 방법은 다양하여, 호흡에 집중하거나, 감각에 집중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본래 명상은 떠오르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집중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지만 때로는 생각의 들판에 나를 마음대로 풀어놓기도 했었다. 내가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과거의 상처가 떠올라 나를 더 알게되었꼬 앞으로 해야할 일들이 떠올라 좋은 영감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반성하는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때로는 충만하거나 감사한 마음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것들이 오프라가 말하는 내 안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Chapter 4. 구름 : 자기 의심을 넘어서라>

여기서 말하는 구름이란, 두려움이다. 오프라는 "어떤 행위가 우리 영혼의 진화에 더 긴요할수록 그에 대한 저항감은 더 커진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저항감이 여기서 말하는 구름이다. 하늘의 구름은 태양의 빛을 가로막아 어둠을 만든다. 여기서도 구름은 그 은유적 상징처럼 빛나는 우리 앞을 가로막고 어둡게 만드는 모든 장애물을 뜻한다. 이 장에서는 여러 스승들이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카카오톡 알림말은 "깨달음의 기회는 재앙의 모습으로 온다"이다. 그 말과 이 장의 교훈이 상통하는 것 같다. 임상심리학 박사 '셰팔리 차바리'는 우리는 우리 안의 공허함을 직면하길 두려워한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 공허함 바로 밑에 광할한 영혼의 확장이 있다는 것은 모른채 말이다. 많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자서전을 보면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엄청난 시련의 터널을 지나왔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시련을 통해 성장한다. 우리는 시련을 두려워하지만 이 장의 스승들은 시련이 곧 기회임을 말해주고 있다.


직관의학의 개척자인 '캐롤라인 미스'가 이런 말을 했다. "그 일은 이미 벌어졌어요" 그렇다. 이미 그 일은 벌어졌다. "그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했다"거나, "그때 다른 선택을 했어야했어"라는 것은 '이미 벌어진' 문제 해결에 아무 소용이 없다. 내 앞에 장애물이 이미 생겨버렸다면, 주저 않아 울거나, 과거 나의 선택을, 타인을, 조건을, 환경을 탓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할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작가이자 명상가인 '이얀라 반젠트'는 진짜 문제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에 있다고 했다. 일어난 일이 막막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두려워하던 그 일은 이미 생겨버렸고, 그 '장애물'이 내 앞에 떡하니 지금 서있다는 것이다. 후회, 원망, 좌절같은 나를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기 의심을 넘어 나를 믿고 그 '구름'에 당당히 맞서라는 것이 스승들의 조언이다. 그러다 보면 구름이 지나가면 더 맑은 햇살이 우리에게 비치듯, 분명 우리의 삶은 한 단계 더 성숙해져 있을 것이다.



<Chapter 5. 지도 : 의도에 따라 행동하라>

지도란 우리의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 장의 주제가 지도인 것은 길을 나설 때, 먼저 나의 경로를 제대로 알고 가자는 것이다. 오프라는 뛰어들기 전에 명확히 비전을 드러내야 한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비전'은 "의도에 따라 행동하라"는 충고의 '의도'와 같은 말이다. 우리가 삶의 목표를 정할 때 우리는 무엇을 고려했는지 돌아보자. 지위, 명예, 돈, 그런 것은 '중간단계의 목표'로서 '수단'이지 '궁극적인 목표'인 '의도'는 아니다. 의도란 "왜 그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니까. '지위'가 아닌 '지위로 무엇을 할 것인가', '명예'가 아닌 '명예로 무엇을 할 것인가', '돈'이 아닌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살다보면 수단과 목표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혼동하며 살았던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얼마나 떳떳할수 있을까. 대학을 선택할 때도 점수에 맞춰서 남들이 좋다던 학교, 학과를 지원하고, 직장도 남들이 선호하는 직장 중에서 골랐으며, 배우자 또한 이런 저런 세상의 조건에 맞추어 고른다. 온전히 나의 판단, 나의 비전, 나의 의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드문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SNS를 통한 자기과시와 남들과의 비교는 더욱 나의 기준이 아닌 '대세'를 따르는 삶을 조장하고 있다.


트랜스젠더 인권운동가 '재닛 모크'는 "당신의 경로를 남들 때문에 변경하지 말라"고 했다. 흑인이라는 인종적 배경과 성소수자로서 결코 만만치 않은 세상의 저항을 겪었을 그녀였기에 세상이 당신의 경로를 바꾸게 내버려두지 말라는 메세지는 더 울림있게 들렸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말했다. "의도된 선택이 반복되면 인격이 된다"고. 매 순간 마다의 결정을 남의 손에 맡겨두면 나의 인격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니게 된다. "의도에 따라 행동하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 의도에 따른 행동이 곧 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핵심은 나의 '의도'에 있다는 것을 여러 스승들은 말해주고 있었다.



<Chapter 6. 길 : 흐름에 맡겨라>

일단 나의 비전, 의도를 설정하고 길 위에 올랐다면 그 흐름에 충실해야 한다. 과거의 '흐름'은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의 '흐름'은 아직 오지 않아 알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흐름'은 오직 '현재의 흐름'뿐이다. 심신통합의학의 창안자 '디팩 초프라'의 관점으로 보면 이번 장의 주제 "흐름에 맡겨라"는 곧 "현재를 살아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지금'이 당신이 가진 유일한 순간이란 걸 이해한다면, 당신은 현재를 살게 될 것이고, 흐름에 맞춰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성공회교 사제이자 작가인 '바버라 브라운 테일러'의 말에 공감한다. 그는 삶은 기차가 아니라 돛단배처럼 흘러간다고 했다. 머릿 속으로 그려볼수록 참 맞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멀리서 보면 어떤 정해진 트랙이 있어서 고스란히 그것을 따라가는 것 같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대학교, 취업, 결혼, 출산, 육아, 퇴직... 결국 마지막은 죽음. 어떤 단계가 순서대로 정해져 있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탁탁 밀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고졸학력도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얻는 사람도 있지만 검정고시 패스로 얻는 사람도 있다. 한 직장을 들어가서 평생을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직장을 옮기거나 자신의 회사를 세우는 사람도 있다. 결혼도 평생 독신이 있는가 하면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삶은 트랙이 있어 앞으로만 달려나가면 되는1차원적인 기차가 아니라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는 망망대해의 돛단배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한번 올라타서는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풍향과 조류를 확인하며 목적지를 향해 경로를 수정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정한 길의 흐름에 우리를 맡길 때 때로는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흘러가기도 한다. 세상살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영적 스승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에 관해 "가장 중요한 건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다"라고 했다. 일은 이미 벌어졌다. 우리는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있는 어떠한 통제권도 없다. 지금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에 연연하지 말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일어난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며 이것에 따라 앞으로의 흐름이 우리에게 유익할지 불리할지가 결정된다.



<Chapter 7. 등반 :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

이 장에서 오프라가 '등반'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도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딜 가나 차질은 있을 거야. 그렇다해도 잠시 돌아가는 것뿐이지, 길이 끝나는 건 아니야. 실패를 딛고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이번 장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라는 말로 그녀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포기하지말고 나아가라는 것이 아닐까.


종교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와 통찰의 가르침을 주는 법륜 스님이 말씀했던 가르침 중 나의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일어난 모든 일은 다 좋은 것이다." 언듯 생각하면 저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어떻게 모든 일어나는 일이 다 좋을 수 있을까. 살다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직장에서 실직을 하거나, 사업이 망하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 병에 걸리기도 하며, 종국에는 죽는 일도 생길 것이다. 어떻게 일어난 일이 다 좋은 것이란 말일까.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과거의 사랑과 헤어졌기 때문에 지금의 사랑을 만날 수 있었다. 불만이 있었지만 차마 관두지 못했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나의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수많은 실패 덕에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아파보았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고, 세상에 그토록 아픈 사람이 많다는 것도, 그들을 돌보는 고마운 사람들도 있다는 것도 눈에 보인다.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삶의 무상함을 배우고 욕심의 덧없음도 깨달을 수 있었고, 종국에는 나도 죽는다는 사실은 내 삶에서 정말로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 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어떻게 일어난 일 중 나쁜 일이 있을 수 있겠나. 불교의 관점에서보면 애시당초 일의 호불호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좋고 나쁨은 그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법륜 스님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오프라 윈프리가 이 장의 핵심이라고 말한 다음의 문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실은 그들이 예정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수단이란 거예요. 그 어떤 일도 이유 없이 제멋대로 일어나진 않아요." 만약 그냥 이 문장을 덜컥 먼저 만났다면 울림있는 말이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까지 파악하지는 못한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륜 스님의 말씀과 결부하여 생각해보면 깊은 삶의 통찰을 담고 있는 말임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자, 어떤 일도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일은 모두 좋은 일이라 했다. 내 여정에 시련의 높은 산이 나타났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히 등반하자. 그 산은 시련의 산이 아니다, 이유 없이 나를 괴롭히려 있는 산도 아니다, 나를 예정된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산일 테니까.


올해(2020년) 11월 미국에서는 대선이 있다. 공화당의 트럼프가 재선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대항마 민주당의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될 것인가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언제나 길은 있다>에 등장하는 90명의 스승 중에는 바로 그 '조 바이든'이 등장한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과거 오바마 정부 때 부통령을 지냈다는 것과 현재는 트럼프의 대선 상대 후보라는 것 뿐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조 바이든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 이번 기회에 그에 대해 조금 알게 되는 수확이 있었다. 특히 이 장에 나오는 그의 일화가 눈길을 끌었다. 과거 교통사고로 그의 아내와 딸은 목숨을 잃고, 두 아들은 중상을 입었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두 아들 중 장남은 델라웨어주 검찰총장까지 지냈으나 결국 뇌암으로 사망했고, 차남도 사고의 후유증으로 뇌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가족의 끔찍한 비극으로, '좌절'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아픔의 수렁 속에 그가 빠져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들아,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그 안에서 뭔가 좋은 일이 생겨날 거란다. 열심히 찾으려 한다면 말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졸지에 둘이나 잃은 사람에게 저런 말이 과연 귀에나 들릴까. 어쩌면 도리어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조 바이든도 당시에는 잔인한 말로 여겼으나 점점 그 말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가족이 죽었는데도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극단적인 낙관을 지니라는 말이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 해온 것처럼 너무나 부정하고 싶겠지만 그 일은 이미 일어나버렸다.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누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뿐이다. 그 속에서 그 일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것인지, 아니면 그 일의 부정적인 의미에 함몰되어 그 일이 내 삶을 갉아먹게 내버려 둘 것인지는 온전히 "내가 그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달렸다. 조 바이든은 이를 두고 '고통을 흡수하는 능력'이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원한다. 아쉽게도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통을 흡수하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우리를 삶의 베테랑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Chapter 8. 나눔 : 알려주고 나누어라>

'나눔'이라는 주제가 '기부'나 '봉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의미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지만, 오프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훨씬 더 근원적이다. 그녀는 말했다. "하나하나의 결정을 한결같이 진심과 자비로 가득한 삶의 태도에 바치자는 거예요." 나눔을 이야기하는데, '진심'과 '자비'가 왜 나오는지 의문이 들수도 있겠다.


다음 문장을 보면 좀더 뚜렷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네가 한 말이나 행동은 기억 못해도, 네가 그들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했는지는 언제나 기억할 거야." 이 말을 나는 참으로 공감한다. 우리가 누군가와 다퉜다고 하자.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무엇 때문에 다퉜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사람에 대한 나쁜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이지만 참으로 감성적인 동물이다. 기억도 그렇다. 기억은 이성적인 것 보다는 감성적인 것이 훨씬 더 오래가는 것 같다. 오프라는 '진심'과 '자비'의 마음으로 모두를 대하라고 했다. 오프라가 말하는 '나눔'이란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주면 상대는 그것을 감정으로 간직한다. 진실한 마음인 '진심'과 타인을 아끼는 마음인 '자비' 위에서 금전적인 '기부'도, 육체적인 '봉사'도 빛을 발할 것이다.


여성운동가이자 정치활동가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힘이 있을수록 경청의 선물을 나누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다 이루어 줄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 줄 수는 있다. 우리의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우리가 어려울 때, 비록 상황은 바뀌지 않은 채 누군가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 만으로도 큰 힘이 된 적이 있을 것이다. 꼭 돈이나 재능이 있어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 없어도, 재능이 없어도, 스타이넘의 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마음을 담아 귀를 내어주는 '경청'도 나눔의 대상이 될수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 나는 불교의 '무전칠시'가 떠올랐다. 무전칠시란 말그대로 재물, 돈이 없어도 나눌 수 있는 7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따뜻한 눈길(안시), 온화한 표정(화안시), 부드러운 말(언시), 몸으로 돕는 행동(신시),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심시), 상대에 대한 배려(좌시), 상대의 어려움을 알아주는 관심(찰시)이 그것이다. 오프라가 말하는 "진심과 자비의 마음을 나누는 것"은 불교의 '심시'와 매우 닮아있다.


더불어 이 장에서는 이 땅에 잠시 머물다 갈 '지구별 여행자'인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내가 '나눈 것'은 결국 내가 떠나더라도 이곳에 남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인권운동가이자, 시인, 소설가, 그리고 오프라가 말한 그녀의 궁극적 스승인 '마야 안젤루'는 내 존재로 인해 삶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이 곧 자신의 유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알면 가르치고, 얻으면 나누라"는 말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 우리의 존재는 사라지고 우리 유산만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다.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본다면 결국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나누기 위해서'가 아닐까.


반체제 통합 사상가인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나눔'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다. 그는 '고통'의 다른 이름은 '분리'라고 했다. 나눔은 분리의 간격을 줄인다. 그래서 나눔이 커질수록 고통이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조건과 상황에 따라 딱 드러맞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장에서 내가 알고 있는 '나눔'이라는 개념을 좀더 확장할 수 있었다.



<Chapter 9. 보상 : 자기 존중감이라는 보상을 받아라>

이번 장의 주제는 '보상'이다. 다른 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 장의 '보상'도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일의 댓가로서의 보상을 굳이 오프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녀는 "나에게 중요한 보상이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나의 진실을 집행했을 때 찾아오는 영속적인 만족감과 자기 존중감"이라고 했다.


우리가 하는 많은 행위의 동기는 그것의 보상에 근거한다. 안타깝게도 그 보상은 대부분 '돈'과 관계되는 것 같다. 누군가는 돈이 아닌 다른 것이라 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것 조차도 곰곰히 따져보면 끝끝내 금전의 가치로 귀결되지 않던가. 어쩌겠나,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업보인 것을. '돈'을 이야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돈을 쫒다보면 어느 날 나의 목표가, 나의 가치가, 내가 돈이 된다. 한달에 100만원 버는 사람이 있고, 한달에 1000만원 버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저 '월급'이 10배 차이가 날 뿐이었다. 하지만 돈을 너무 쫒다보면 월 100만원 버는 사람은 '100만원 짜리 사람'으로 인식되고, 월 1000만원 버는 사람은 '1000만원 짜리 사람'이 되어있다. 여기서 무서운 일이 생긴다. 월급의 차이였을 뿐인데, 돈이 최고의 기준이 되는 순간,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도, 비교해서도 안되는 존엄한 '인간의 가치'가 혼동되기 시작한다. 월 1000만원 버는 사람의 목숨이 월 100만원 버는 사람의 목숨보다 10배 더 가치있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인식 속에서 가진 것이 없으면 당연히 불행해야 하는 것이되고 가진 것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가진 자의 앞에서는 한없이 작고 비굴해지며, 가지지 못한 자의 앞에서는 한없이 커지고 오만해진다. 오프라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고민했고, 자신만의 답을 찾았다. "나는 돈을 위해 노동하지 않겠다. 나는 내 자신을 소중히 여기겠다. 절대로 내 가치를 내가 버는 돈으로 규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오프라가 한 것은 성공 기준을 가늠하는 자신만의 측정법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세상이 강요하는 '돈'으로 자신의 성공을 규정하고 가늠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잣대를 만든 것이다. 그런 나만의 성공 기준을 스스로 찾아 낼 때, 우리는 세상의 잣대를 과감히, 가소롭게 무시할 수 있고, 나만의 성공을 자축하고, 나만의 길을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대단한 부를 쌓고 성공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열심히 돈을 쫒다보니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판 아이언맨이라 불리는 '엘론머스크'의 경우도 늘 꿈을 향해 달려왔다.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은 코웃음 쳤지만, 그의 '스페이스X' 발사 성공은 인류 최초의 민간 유인 우주선 시대를 열었다. 그의 재산은 한화로 10조가 넘는다고 한다. 어떤 매체에서는 23조라고 하고 어떤 데에서는 49조라고도 했다. 그의 정확한 재산이 얼마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가다보니 부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는 것 포인트다. 오프라도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경제적인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나의 초점이 돈에 맞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이번 장에 나오는 많은 스승들은 같은 메세지를 던지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아카데미 수상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골디 혼'은 "외적인 것들로 자신을 규정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링크드인의 전 CEO인 '제프 와이너'의 언어로는 "일반적 잣대의 '성공'에 집착하지 말라" 했다. 진정한 나의 가치에 대한 보상은 세상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나에게 줄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오프라 윈프리가 말하는 '자기존중감'과 그대로 상통한다. 그냥 '존중감'이라 하지 않았다. '자기' 존중감이라 불렀다. 진정한 보상, 진정한 만족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이 자신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Chapter 10. 집 : 언제나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걸 기억하라>

이번 장을 읽으면서 나는 <오즈의 마법사>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어렸을 때 봤던 <오즈의 마법사>, 그때는 그저 TV에서 나오는 만화영화로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7살의 오프라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교훈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오즈의 마법사>를 영적 여행기라 정의했다. 특히 착한 마녀 글린다와 허수아비의 대화를 소개했는데, 내 입에서 '아!'하고 돌터지는 소리가 나왔다. 착한 마녀 글린다가 말한다. "도로시, 네겐 더이상 도움이 필요 없단다. 넌 언제나 그 힘을 지니고 있었거든." 그러자 허수아비가 되묻는다.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죠?" 글린다는 답한다. "그랬으면 날 믿지 않았을 테니까. 스스로 알아내야만 했던 거야." 오프라는 이 문답이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다고 했다.


어렸을 때 한번은 들어본 '파랑새'이야기를 기억하는가.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를 찾아 머나먼 여정을 떠났던 주인공은 결국 어디에서도 파랑새를 찾지 못한채 빈 손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처음부터 파랑새는 자신의 집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는 '낫 놓고 기역자 모르듯' 우리 앞의 파랑새를 보고도 파랑새인 줄 알지 못한다. 파랑새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여정은 헛수고가 아니다. 그 여정은 파랑새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준 수업료인 셈이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글린다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부터 도로시에게는 그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설령 알려줬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도로시의 여정이 그녀 안의 힘을 그녀가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번 서평에서 나는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다. 내가 억지로 불교의 이야기를 끄집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가 하는 영적인 가르침이 불교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과 너무도 닮은 점이 많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에서는 '개유불성'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존재에게는 부처의 씨앗이 있다, 즉 모든 존재 안에는 부처가 있다는 말이다. "에이, 내 주제에 부처는 무슨" 우리는 그 말을 믿지 못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깨달음을 얻은 수많은 선사들은 저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몸소 증명해왔고, 설법해왔다. 부처, 깨달음은 내 안에 이미 있었다. 불교의 수행은 바깥에 깨달음이라는 실체가 있어 그것을 구하고, 부처라는 외부의 다른 존재가 있어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광반조로 밖을 향하던 관점을 내 안으로 돌리는 깨달음을 얻고, 견성성불로 내 안의 부처를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리라.


신부이자 작가인 '리처드 로어'도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영적인 지식은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재인식'하는 것이다"라고. 진리에 다가선 이들의 말은 그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놀랄만큼 유사하다. 우리가 밖에서 찾으려 했던 것들이 사실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든, 자유든, 만족이든 말이다. 이번 주제 '집'은 건물의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고유한 공간, 나의 내면을 뜻한다. 늘 세상의 가치에, 타인의 목소리에 맞추어 원하는 것을 얻고자 공허하게 살아왔다고 후회할 것 없다. 언제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돌아 올 수 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좌절, 슬픔, 외로움, 허무, 분노로 고통스러울 때 이것을 떠올릴수 있다면 좋겠다. 평온한 내 영혼의 안식처는 언제나 내 안에 있었고, 모든 문제의 열쇠도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길은 있다>를 읽으며 '묵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책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은 이 책의 글귀를 조금씩 읽고 오래 묵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주교와 기독교에서는 '묵상', 불교에서는 '참구'라는 말을 쓴다.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종교를 초월한 영적 스승들의 강렬하고 깊은 메세지를 곱씹는 과정은 우리 내면을 밝혀주고 힘을 준다. 과거 'Carol Bolt'의 <The book of Answers>라는 책을 산 적있다. 그 두꺼운 책에 페이지마다 짧은 답이 있을 뿐 별다른 내용은 없다. 스스로 고민하는 질문을 생각하고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책이 답을 주는 것이다. 물론 엉뚱한 답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이 준 답에 영감을 얻어 고민하던 문제를 잘 해결한 사람들도 있었기에, 이 책이 한 때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언제나 길이 있다> 속에도 여러 스승이 들려주는 다양한 가르침이 들어 있어, 혹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대양 한 가운데에 표류하고 있는 듯한 막막한 기분이 들 때, 이 책을 펼쳐본다면 <The book of Answers>가 그랬던 것처럼, 난관을 극복할 힌트와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마지막에 나오는 에필로그에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삶을 단순히 살 것을 충고한다. 이는 그녀만의 하는 충고는 아니다. 최근의 미니멀리즘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이것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니까. 영적이거나 행복의 차원 뿐만 아니라 환경적 차원에서도 삶을 단순하게 하는 것은 빛을 발한다. 삶의 진실은 사실 너무도 단순한데 오히려 우리가 삶을 필요이상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에게 되물으며 그녀는 글을 마친다. "거짓일수록 복잡하며, 진실일수록 단순하다"는 격언은 삶에서도 진리인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오프라와 함께 우리에게 가감없는 삶의 조언을 주었던 90명의 스승들에 대한 소개가 있다. 중간중간 아는 이름들이 보여 반갑다. 특히 아디야샨티, 페마 초드론, 에크하르트 톨레의 경우 이전부터 관심있던 작가들이었기에 특히 반가웠고, 조 바이든의 경우는 최근 언론에서 많이 접하는 이름이라 그의 조언뿐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 대해 알게 되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인사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쓴 책들도 함께 소개되어 있어, 추후 읽을 책들을 결정할 때 참고해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삶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의 귀로에 있다면, 혹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신뢰할 수 있는 멘토의 조언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참고해보면 어떨까. 내가 먼저 읽었던 사람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가능하면 이 책을 한번에 다 읽지말고 읽는 것은 조금씩, 묵상하는 시간은 충분히 가져보길 권하고 싶다. 이 책의 글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숙제가 아닌 바에야, 우리가 책을 읽는 목적은 그 책을 읽어버리는데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을 통해 통찰과 영감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음식도 체내에 들어오면 충분히 소화하는 시간을 가져 내 몸에 흡수가 잘 되도록 하는 소화의 과정이 필요하듯, 이 책 또한 '과식'하지 말고 적당히 섭취하여, '묵상'이라 부르든, '명상'이라 부르든, '참구'라고 부르든, 내 영혼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짧게라도 가져본다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분류했다. 하지만 나는 앞의 이유로 '묵상집'이라 말하고 싶다. 영혼을 신장시키고 삶의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말씀이 담긴 책 말이다. 밤에 자기전에 이 책의 한 부분을 읽고 아침에 일어나서 10분이라도 스마트폰, TV, 라디오를 떠나 전등도 켜지 않고,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있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개그맨 김병만이 이런 말을 했었다. "안해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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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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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청소업이라는 것이 있다. 죽은 사람이 남긴 흔적을 잘 치우는 일이다. <죽은 자의 집 청소>는 한 특수청소업 종사자가 일을 하면서 겪은 것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요즘 시대에 사람은 사고가 아닌 이상 대부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집에서 사람이 죽는 경우란 고독사, 자살, 살인범죄가 아닐까. 이 사인은 그대로 이 책에 등장하는 '고객'들의 사인이 된다. 인체는 죽는 순간부터 체내의 미생물에 의해 분해된다. 상온에서 며칠만 지나도 냄새가 나고 모양은 흐트러진다. 피가 새어나오고 근육이 풀려 변을 포함한 여러 분비물이 나온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구더기도 들끓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시체의 모습은 살아있을 때의 모습에서 단지 눈감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가의 임무는 이런 흔적들을 말끔하게 치워주는 것이다.


나는 죽음에 관한 책에 잘 끌리는 편이다. 보통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크게 두려움과 호기심 두 가지가 아닐까. 죽음은 불가역적이다. 한번 죽었던 사람은 되살아날 수 없다. 따라서 사후세계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산 사람이란 없는 것이다. 이런 최고의 무지는 최고의 두려움을 야기한다. 또한 죽음은 그만큼 미지의 영역이기에 오랜세월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소재가 되어왔다. 모든 사람이 피하고 싶은 주제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언젠가 한번은 맞딱드려야 하는 대상이기에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두려움의 척력과 호기심의 인력이 만들어 내는 묘한 감정의 밀당 때문에, 나는 죽음에 관한 책을 좋아한다. 기존에 내가 접했던 죽음에 대한 책이란,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수기나, 그들을 보살피는 의료진의 기록, 또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영적 스승들이 쓴 책들 정도였다. 몇 년전 부검을 전문으로 하는 법의관이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책도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조명하여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마침 그(유성호 교수)가 남긴 짧은 평이 이 책의 뒷 표지에 실려 있었다. 죽은 자들이 남긴 흔적을 청소하는 사람이 바라 본 죽음이라는 기존에 없던 참신한 관점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구성은 내용에 따라 크게 두 장으로 구분된다. '특수청소업'의 '특수'라는 단어 뒤에 숨어있는 '죽음'과 '청소'라는 단어가 가지는 '치우는 업', 이 두 키워드에 따라 내용을 구분하였다. '1장 홀로 떠난 곳을 청소하며'는 그가 만났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고, '2장 조금은 특별한 일을 합니다'는 그가 하고 있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저자는 시를 전공했고 출판과 트렌드 산업에 종사하다가 전업작가의 꿈을 위해 산골생활을 한다. 그리고 취재와 집필을 위해 일본에 살면서 죽은 이가 남긴 것과 그 자리를 수습하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했다. 그의 특수청소업에 대한 인연은 일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특수청소 서비스회사를 설립하여 현재 종사하고 있다. 책에 소개된 저자의 과거로는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이유로 이 일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나에게 의미있게 보이는 것은 그가 '시'를 전공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여러번 놀랐다. 바로, 저자의 작문실력 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구사하는 어휘는 다양하고 세련되었다. 그의 문학적 구사력의 절정은 '왜소한 밤의 피아니즘'이라는 글에서였다. 글을 읽는데,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피상적으로 보면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서로 절묘하게 이어진다. 현실과 과거 기억 사이의 장면 전환이 기묘하게 시간의 간격을 널뛰기 한다. 작가가 영화 시나리오를 써도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잘 못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표적인 팁으로 "문장 호흡을 짧게 하라"는 것이 있다. 한 문장이 길어지면 주어나 서술어의 일치가 깨지거나 비문이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그의 문장은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대로 읽는 사람이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특히 현장에서 그가 하는 작업에 대해 서술한 글에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가 과거에도 책을 냈던 적이 있었는지 찾아보았다. 동명의 다른 작가가 쓴 책은 있었으나 그가 쓴 것으로 보이는 책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장담하건데, 그는 분명히 또 책을 낼 것이다. 이런 필력을 가진 사람을 출판사 직원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에필로그에 아내에게 감사를 전하는 말에서 그의 아내 또한 글쓰는 사람임을 알수 있었다. 표현에 능한, 글쓰는 작가 부부의 부부 싸움은 얼마나 고상하고 문학적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이런 이유로 그의 프로필에서 '시'를 전공했다는 부분이 나에게 무게감 있게 보인 것이다.


우선 그가 만났던 죽음들을 통해 그의 일이 어떤 것인지 소개해본다. 시체는 장의사들의 영역이고 그에게는 시체를 수습한 후 연락이 간다. 그래서 그가 직접 시체를 마주할 일은 잘 없는 것 같다. 대신 죽은 사람의 마지막 흔적들을 마주한다. 한 건이 얼마나 힘들지 아닐지는 '죽은지 얼마만에 발견되었는가'에 달렸다. 원룸의 고독사나 자살의 경우 죽은지 한참 지나서야 발견되는데, 이 일로 경험이 충분히 쌓인 저자는 문 앞에만 가도 그 냄새를 알수 있다고 했다. 의뢰인의 요청을 받고 찾아간 '현장'의 문 앞에서, 그 문을 열기 전 항상 한숨을 고른다는 말 익숙해질 수 있는 일과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은 분명 따로 있음을 느끼게 한다.



현장의 모습은 다양하다. 이 책에 나오는 자살의 경우 대부분이 목을 매는 것 또는 착화탄을 피워 죽는 것이다. 줄을 거는 대상은 가스배관, 냉장고, 벽걸이 못 등이 나온다. 목을 맬 줄로는 빨랫줄, 인터넷 랜선 같은 것도 있었다. 착화탄의 경우는 온 집안의 틈이 다 테이프로 막혀있다. 사람이 침대에 누운 채 죽은지 오래 지나 발견되면 피는 아래로 흘러 굳어져 매트리스 안에서 덩어리가 되어있고, 썩으면서 뿜어낸 기름기는 주변 가구에 뭍어 난다고 한다. 특히나 이 책에 나왔던 것 중 끔찍한 장면은 사람과 침대가 맞붙은 자리에 썩어 녹아내린 사람의 피부조직이 그대로 말라 붙어 있어, 마치 스타킹을 벗어놓은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길가에 죽은 동물을 치우는 것도 비위가 걸리는데, 사람의 형상을 간직한 채 눌러 붙어 있는 시체 조각을 처리하는 것은 얼마나 고역이겠나. 고독사를 그린 장면 중에 기억에 남은 것도 있었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괴롭게 기침을 하며 죽어갔던지, 침실 천장에 산란된 피의 흔적이 그 고통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치우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썩은 시체가 아닐까. 이미 마지막 단계까지 갔기에 세상 못 치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집을 치우는 것 외에도 일반사람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청소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그 중 하나는 썩은 고양이 치우기였다. 아파트 집 안에 열마리의 고양이가 폐사해 썩어있었다. 고양이의 사체라고 알아보기도 힘든 모양, 복부가 파여진 사체도 나온다. 그는 사체가 만들어 내는 악취와 가스를 막기 위해 방독마스크를 쓰고 청소를 한다.


또 인상적인 케이스 하나는 고시원이었는데 믿기 힘든 화장실이 있었다. 휴지와 똥으로 처음 변이 막혔을 때 뚫지 않고, 그 위에도 또 볼일을 본 것이다. 그렇게 쌓고 쌓여 변기가 가득 차자, 그 후로 공용 화장실을 쓰고 있었던 의뢰인은 퇴실할 때가 되어서야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를 부른 것이다. 역시나 방독마스크를 하고 고무장갑을 낀채 똥을 손으로 걷어 비닐에 담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오래된 상부의 똥들이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있고 손으로 부서트려 퍼내자 아래쪽엔 축축한 변들이 있다. 아랫쪽에 있는 변을 손으로 끄집어 낼 때는 똥이 미끌거려 잘 안꺼내 지는 것까지 묘사하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해오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은 사람의 뒷정리를 한다는 그의 직업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일을 배우겠다고 오거나, 언론이나 학교에서 인터뷰가 들어오기도 한다. 아직 공식적인 직종 분류를 가지지 못해 관공서에서 협조요청도 온다. 위에서 언급한 그의 필력으로 저자는 인터넷에 글도 올리는 것 같은데, 한번은 그것을 보고 모르는 사람이 연락이 온다. 척화탄으로 자살을 하려면 몇개가 있어야 하냐는 물음이었다. 그의 기지로 경찰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찾아내 자살을 말렸던 에피소드도 있다.



죽음의 흔적을 접하다보니 자살하는 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은 자살하는 도구가 그의 직업과 연관이 되더라는 것이다. 화학약품을 납품했던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몸에 독극물을 주입하여 자살했고, IT회사에 다니던 어떤 사람은 랜선에 목을 매 자살했다. 농촌 사람들이 주로 선택하는 자살도구는 농약이였다. 생계를 위해, 살기 위해 배운 직업능력이 종국에는 죽기 위해 사용되는 아이러니함이 조명되어 있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위 직업병이라는 것이 있다. 작가가 일하러 갔을 때 가장 먼저 현장을 감지하는 감각은 후각이라 한다. 문을 열면 시체와 배변이 만들어 낸 악취가 제일 먼저 작가를 맞이하는 것이다. 하루는 까페에서 차를 마시는데, '그 냄새'를 감지한다. "아, 여기 천장 덕트 어딘가에 고양이가 죽어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주인에게 말을 하자니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 같고, 안하자니 직업의식이 가민있질 못한다. 로스팅 냄새가 판치는 가운데, 공조기에서 나오는 공기에서 '그 냄새'를 먼저 맡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직업병이라 했다. 또 죽음의 현장을 자주 보다보니 묘하게 그 쪽 방면으로 촉도 좋아지는데, 때론 너무 과할 때가 있는 것이다. 옆집 대문 앞에 배달된 물건이 며칠동안 고스란히 있는 것을 보고,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닐까, 경비실에 알려서 문을 따야하나 말아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결국 며칠후 옆집 사람의 귀가로 상상속의 자살사건은 일단락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그의 말처럼, 하도 죽음을 많이 겪다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의 가능성이 먼저 떠오르게 되는 직업병이 생긴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는 그가 일본에서 죽은 이가 남긴 것과 그 자리를 수습하는 일에 관심을 두게되었다는 정도만 언급되어 있다. 솔직히 그의 일은 평범한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죽은 이의 뒷정리를 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나와 있지 않다. 말없이 죽은 사람들의 사연을 그가 알수 없듯, 이런 일을 하게 된 그의 사연을 우리는 알수 없다. 무엇이든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덤덤해지기 마련이다. 그도 죽음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유독 그의 글에서는 울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보였다. 형의 죽음에 정돈된 방 속에서 소리없이 우는 동생의 들썩이는 어깨가 애처로와 그는 눈물을 흘린다. 그 소리가 행여 동생에게 방해가 될까 시끄러운 장비를 틀어 소음 속으로 숨긴다. 글을 읽다보면 그가 참 마음이 여리고,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이란 것이 느껴진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되었을까. 다시한번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고 아는 지인에게 이런 직업이 있다고 이야기 했더니 그런 일도 있냐며 깜짝 놀란다. 처음에는 장의사를 말하는 줄 알았단다. '시체'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시체가 남긴 '흔적'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걸 왜 다른 사람이 치우냐고, 가족들이 치우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이 되돌아 왔다. 화목한 가정이 있고, 죽음을 잘 목격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기에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법하다. 나는 치울 가족이나 친척이 있어도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사람이 죽고 바로 사망사실을 알면 그나마 보통 사람이 뒷정리 할수 있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썩어서 가족이라도 쉽게 근처에 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말을 해주니 이해를 한다. 그럼 이런 반문이 떠오를 것도 같다. "일반청소부들이 치우면 안되나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는 비위의 문제였다. 아무리 더러운 것을 치우지만 사람 핏자국이나 살점을 치우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정말 드물게 그것을 치울 일반청소부가 있다하더라도 기술적인 문제로 치워진 자리에 다시 구더기가 나오고 썩은 냄새가 사라지지 않아 도로 특수청소업을 찾는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 서양권 영화였던 것으로 얼핏 기억나는데, 거기서 주인공의 직업이 특수청소부였기에 이런 직업이 앞의 지인 만큼 생소하지는 않았다.



죽은 이가 목 매달았던 끈을 자신이 푼다는 글을 읽었을 때 나에게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과거 우리 어머니는 숙박업을 하셨다. 하루는 손님이 나오지 않아 들어가보니, 재난시 건물탈출을 돕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설치된 간이완강기에 젊은 여인이 목을 매단채 죽어있었다. 자살현장을 제일 먼저 발견한 어머니가 얼마나 놀래셨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프로였다. 곧바로 신고를 하고 줄을 풀어 시체를 내렸다. 당국이 시신을 수습해가고 나서 방안을 청소하신 것도 어머니셨다. 어머니가 프로로 보였던 주요한 이유는 한동안 그 방에 들어가지 못했던 청소 아주머니와 아버지의 상반된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작가처럼 시간이 한참 지난 흔적을 치우는 것은 아니었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주는 거부감도 있었을 텐데, 어머니는 담담하게 뒷정리를 하셨다. 어머니는 죽은 여인이 참 예뻤는데, 그런 창창한 아가씨가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저런 선택을 했을까 굉장히 안타까워 하셨던 기억이 난다.


죽음의 흔적을 정리한다는 이야기에서 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우리 외삼촌은 장의사를 하신다. 내 사촌인 그의 두 아들도 장의사의 길을 가고 있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에서는 공공서비스 차원에서 뒷정리를 해주는 것이 있나보다. 그럴 때 경찰이나 검찰은 작가를 찾는다고 한다. 우리 삼촌도 경찰에서 의뢰를 받는다. 도로에서 사상사고가 나면 끔찍한 경우에는 사람의 '파편'이 사방에 튄다. 로드킬을 당해 죽은 동물도 비위 약한 사람은 잘 보지도 못한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 특히 살점이 여기저기 튀어있으면 경찰이나 구급대원도 치우기 분명 꺼려질 것이다. 그럴 때 외삼촌에게 연락이 온다. 장갑을 끼고 살점 하나하나를 주워모아 챙겨주고 핏자국을 지워주면 임무가 끝나는 것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삶의 무상함을 깨닫기 위해 '부정관'이라는 수행법을 한다. 시체를 두고 보면서 수행하는 것이다. 죽은 이의 육체를 보면서 삶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 나라할 것이 본래 없으며, 나라고 여기는 이 육체 또한 영원할 수 없음을 머리의 알음알이가 아닌 직접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장의사나 특수청소부들은 생계를 위해 늘 죽음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다보니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늘 부정관 수행을 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일까, 죽음에 가까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수행자의 향기가 난다. 작가의 글에서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고, 지금 나는 무엇을 발견하려고 하는가?"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는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궁극적인 공안이다. 불교의 화두를 연상하지 않더라도,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 온 이래, 수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했왔던 저 질문을 특수청소부가 현장에서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주는 무상의 지혜가 작가에게 구도자나 철학자의 향기를 베게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죽음에 관한 책을 읽으면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또 당연한 것들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것만으로도 죽음에 관한 책의 소용은 충분하다. 이 책은 거기에 작가의 '특수한' 직업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도 한다. 또 문학적 감수성 짙은 작가가 처첨한 현장에서 얻은 깨달음도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의 훌륭한 필력 덕에 참 잘 읽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게 되었고, 우리가 죽은 후에 어떤 모습이 되는지 실감나게 알게 되었다. 작가가 죽은 이들의 말라 붙은 살점과 까맣게 굳어버린 피를 치우며 망자에게 동정을 느낄 때 나도 함께 애도했다. 자살하려는 일면식도 없는 어느 여인을 구해주고 비록 '나쁜새끼'라 욕을 듣지만, 죽지 않았기에 욕도 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며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미도 느껴졌다. 다른 죽음에 관한 기록들이 죽음의 발생에서 끝이 나지만 이 책은 죽음의 발생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우리가 그동안 잘몰랐고 알기 어려웠던 죽음의 현실적인 모습에 대해 이 책을 통해 가늠해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작가가 이 책의 의미에 대해 언급한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해 경도되고 그 엄숙함에 자니치게 몰입한 탓에 죽음에 관한 언급 자체를 불경한 일로 여겼습니다. 어쩌면 이 기록도 그런 면에서는 급진적이라고 할 만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묻는 행위, 인간이 죽은 곳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과 존재에 관한 면밀한 진술은 오히려 항바이러스가 되어 비록 잠시나마 발열하지만 결국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고 굳세게 만드는 데 참고할 기전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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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셰익스피어 4대 비극 (1577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금장 양장 에디션) -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민애.한우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 그의 작품을 한편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그의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부심과 찬사는 대단하다. 알게 모르게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이야기'하면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커플, '로미오'와 '줄리엣'도 셰익스피어가 쓴 희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왔다. 나는 그간 귀동냥한 이야기로 추측을 섞어 그의 작품을 대강 줄거리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지,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었다.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아는 척 고개만 끄덕이는 상태로, 유명한 고전을 읽지 않은 어떤 부채의식 같은 것도 느끼곤 하던 차, 이 책 <초판본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만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1564~1616)와 그의 작품은 지난 400년 간 전세계인들에게 읽혀져 왔다. <햄릿>만 하더라도 국내에 무려100여 종이 넘는 책이 존재한다. 그래서 막상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려 할 때 어떤 책을 고를지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원작'이 존재하기에 사실상 선택의 차이는 '번역'과 '디자인'에 달렸을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은 김민애 번역가와 한우리 번역가가 했다. 두 사람 모두 영문학전공 박사과정과 꾸준한 번역활동으로 전문성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김민애 번역가는 드라마와 연극을 공부한 경험이 있어 극작품 번역에 최적화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 한우리 번역가는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을 번역했던 경험이 있어 원작가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강점이 있다. 누가 어떤 번역을 맡았는지 책에서는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 작품을 이미 번역출판 했던 이력을 볼 때, <오셀로>는 김민애 번역가가, <햄릿>, <리어왕>, <맥베스>는 한우리 번역가가 맡았을 것이다. 전문성과 경험을 겸비한 번역가들이기에 신뢰가 간다.


나는 이 책의 최고 강점은 '디자인'에 있다고 생각한다. 방송에 어떤 전문가가 나와 인터뷰하는 장면에 유독 내 눈을 잡아 끄는 것이 있다. 전문가 뒷쪽으로 보이는 책들이다. 병원에 진료를 보러가도 의사 선생님 뒤쪽 책들은 내 시선을 당긴다. 그런 책들은 대게 언어는 영어가 찍혀있고, 두께도 상당하다. '외국어'가 있고 '두꺼운' 두께에 '양장'된 책은 지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허영이라 꼬집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지적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그런 이미지가 고객의 신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한 지인이 사무실에 '소품책'을 비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탓일까, 요즘 출판업계에서는 적당한 높이에 두꺼운 양장, 소위 '벽돌책'이 유행하고 있다. 특히 고전들을 중심으로 '특별 에디션'이란 이름하에 나오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 두꺼운 두께를 맞추기 위해 여려 작품이 묶이기도 한다. 이 책도 그렇다. 본래 개별로 나온 비극이 '4대 비극'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한 권의 두꺼운 책이 되었다. 거기다 157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으로 고전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표지를 싸고 있는 겉지만 걷어내면 마치 16세기 당시 셰익스피어 원본을 소장한 기분이다.


디자인의 화룡정점은 화려한 '금장'에 있지 않을까. 금장은 멋스러움을 넘어 신성한 분위기까지 낸다. 정말로 이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성경은 왜 읽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 경험에 비추어보면, 금장된 책의 대표적인 단점은 금장이 조금씩 손에 묻어난다는 것이다. 이 책도 그럴 것 같아, 피부가 예민한 나는 살짝 조심스러운 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간 인쇄업계의 금장기술이 발달했는지 몰라도, 이 책의 금장된 부분을 일부러 문질러 봤는데, 묻어나오는 것이 없었다. 책을 '거칠게'대하는 편이라 읽는 동안 금장된 부분이 찍히고 긁히긴 했지만 과거의 경험처럼 손에 금색 반짝이가 묻어나지 않았다. 오래 지켜봐야 확실히 드러나겠지만, 현재까로 볼 때 금장 처리의 완성도는 높은 것으로 평가한다.


고백하건데 평생 안 읽던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갑자기 읽게 된 것은 이 책의 '겉모습'이 풍기는 고상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이렇듯 책은 지식의 전달 수단이라는 기능적인 부분 외에 디자인도 상당히 중요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내용만으로 충분했다면 값싸고 편리한 디지털 책에 벌써 종이 책은 멸종당했을 것이다. 이 책의 디자인은 이 책을 매우 특별하게 한다. 고상함에 돈을 이야기하면 뭔가 격이 떨어지는 감이 있다. 그래서일까, 책 정가는 겉지에만 적혀있을 뿐, 책 자체에는 어디에도 가격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세세한 '기분'의 영역까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신경 쓴 걸까.


구성에 대해 살펴보면 4대 비극은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순으로 실려있고, 모든 비극은 5막으로 되어 있다. 비극 제일 앞부분에는 등장인물 이름과 역할이 정리되어 있어, 익숙치 않은 어려운 외국 이름들이 여럿 등장하여 혼란스러울 때마다 참고하니 좋았다. 소설과 달리 극작품이기 때문에 인물의 이름과 대사가 나오고 괄호를 사용하여 상황묘사가 되어있어 머릿 속으로 나만의 극을 연출하며 읽는 맛도 있었다. 지금부터는 내용을 살펴본다.



<햄릿>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다. 왕인 아버지는 숙부(클로디어스)에게 독살당한다. 어머니(거트루드)는 아버지가 독살당하고 며칠이 안되 숙부와 재혼한다. 클로디어스는 햄릿에게 '숙부'이자, 어머니와의 재혼으로 의붓'아버지'이자, 아버지를 죽인 '원수'다. 원래는 아버지가 독살 당한 것은 몰랐으나 아버지 유령이 등장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 재혼한 숙부인 왕은 햄릿에게 태자의 신분을 보장하여 자신의 후계 왕임을 공언하나 이미 부친의 억울한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된 이상, 햄릿은 복수의 칼날을 간다. 그는 일부러 미친척을 하여 광기 뒤어 숨어 왕과 왕비 싫어할만한 일을 하며 애를 태우고, 숙부에게 달라 붙은 간신배들을 뼈 있는 말로 꾸짖기도 하며, 왕을 죽일 기회를 엿본다.


왕에게는 아첨과 간교에 능한 재상(플로니어스)이 었었다. 재상은 현란한 말재간으로 왕에게 큰 신임을 얻고, 왕은 국사와 더불어 왕실의 문제까지 그에게 의논한다. 햄릿의 이상한 행동에 불안한 왕과 왕비는 그에게 자문을 구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꾀에 자기가 당하게 된다. 왕비의 침실에 숨어 왕비와 햄릿의 이야기를 엿듣다가 햄릿이 왕으로 착각하여 찌른 칼에 죽게 된다.


재상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딸(오필리어)를 한때 햄릿이 사랑했지만 아버지의 복수 때문에 멀리하게 되고, 재상인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필리어는 정신이 나가 결국 익사한다. 재상의 아들(레어티즈)은 햄릿에게 복수를 결심하고 왕과 함께 햄릿을 제거할 모의를 한다.


햄릿을 제거하기위해 레어티즈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레어티즈는 칼애 독을 묻히고, 왕은 햄릿의 잔에 독을 타서 햄릿을 죽이기 위한 이중 함정을 만든다. 그러나 레어티즈의 칼은 치열한 결투 중 햄릿의 칼과 바뀌게 되고 둘다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게 된다. 또 왕비는 모르고 햄릿의 독잔을 마셔 제일 먼저 죽고, 레어티즈는 죽는 마당에 햄릿에게 왕이 독을 썼음을 알려준다. 햄릿은 왕을 독 묻은 칼로 찌르고, 독이 든 술까지 억지로 먹여 죽인다. 햄릿을 죽이기 위해 왕이 이중으로 준비한 것에 도리어 자신이 당한 것이다. 이후 상처의 중독으로 레어티즈도 햄릿도 죽는다. 결국 어부지리로 엉뚱하게 노르웨이 왕자(포틴브라스)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비극답게 다 죽는다. 다 죽으니 비극이겠지. 의붓아버지 클로디어스에 대한 원망으로 일부러 미친척 행동하는 태자 햄릿은 아버지 태종에 대한 원망으로 일부러 기이한 행동을 하는 세자 양녕대군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의붓이냐, 친이냐, 복수가 있냐, 없냐의 차이는 있지만 후계를 받은 왕자가 왕에 대한 불만을 고의적 광기로 표출하는 면에서는 비슷해 보였다.


햄릿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대사를 꼽으라면 바로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3막1장)가 아닐까. 너무 유명한 저 대사를 직접 작품 속에서 눈으로 보게 되니 '성지순례(유명한 게시글을 찾아 보러가거나 그 글에 댓글을 다는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를 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학창시절 영문학을 전공한 영어 선생님이 "아직 햄릿도 안 읽어봤냐"면서 언급했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1막2장)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 그 대사도 만났다. 이외에도 "친절하되 천박하게 굴지는 마라."(1막3장), "모든 이에 귀를 기울이되 네 말은 삼가야 한다."(1막3장),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라."(1막3장), "젊은이는 분별심이 없어 탈이지만, 늙은이는 지나치게 걱정해 탈이다."(2막1장), "간결은 지혜의 핵심이며, 장황함은 겉치레에 불과하니."(2막2장), "세상엔 좋고 나쁜 것이 없어, 다만 생각이 그렇게 정해 줄 뿐이야."(2막2장), "신은 여자들에게 하나의 얼굴을 주었지만, 여자는 또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 낸다네."(3막2장),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것이지만 그 결과는 아니라오."(3막2장)와 같은 대사들은 눈길을 끌었다. 때로는 적절한 비유로 웃음짓게 하고, 때로는 깊은 삶의 지혜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명대사들이었다.


<오셀로>

오셀로는 베니스의 장군이다. '무어인'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슬람교도를 뜻하는 말이라 한다. 그래서 영화화 된 <오셀로>에서 오셀로 역은 흑인 배우들이 맡는다. 그의 인종적 특징을 언급하는 것은 그에 대한 사회적 멸시와 차별이 상당했음과 동시에 그 모든 부정적 요인들을 극복하고 장군이 될수 있었던 그의 탁월한 능력을 말하기 위함이다. 오셀로는 사랑의 힘으로 출신(흑인)의 벽을 뛰어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한 베니스 의원(브러밴쇼)의 딸 데스데모나와 결혼한다.


오셀로에게는 충직한 부관(캐시오)과 그 아래 기수(이아고)가 있다. <오셀로>에서 최고의 악역으로 주인공 만큼 중요한 역이 바로 '이아고'다. 그는 자신이 부관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캐시오와 오셀로 사이를 이간질하여 부관자리를 꿰차려는 모략을 꾸민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악은 악을 부른다. 이아고의 잔꾀에 속아 오셀로는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가 부관 캐시오와 간통한 것으로 오해하고, 결백을 주장하는 그녀를 목졸라 살해한다. 진실을 알고 있는 이아고의 아내(에밀리아)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폭로하다 남편 이아고의 칼에 죽는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오셀로는 이아고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하고 하루 아침에 나라를 구한 덕망있는 영웅에서 아내를 죽인 파렴치범이 된 그는 명예도 잃고 사랑도 잃어 아내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자결한다.


이아고가 저지른 악행으로 비롯된 결과는 참으로 비극적이지만 그가 영리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기수라는 낮은 신분이지만 상관인 부관과 장군을 포함해 여러 인물들을 언변과 잔꾀로 마음대로 조종한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주어진 제한된 조건을 잘 활용해서 불리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능력있는' 인물인 것이다. 씁쓸하게도 세상은 우리에게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교과서가 틀렸다는 사례를 너무도 많이 보여주었다. 힘있고 배우고 가진 사람들은 옳은 곳에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리사욕만 채우기 바빴다. 어떤 사람들은 '법꾸라지'가 되어 온갖 나쁜 짓을 하고도 법망의 허점을 찾아 죄를 피하며, 어떤 사람들은 하지도 않은 죄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일이 세상에선 벌어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러니 거짓말이나 아첨은 잘하는 것이 오히려 미덕이 되고, 그것을 못하는 놈이 바보가 되는 씁쓸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악당은 훌륭한 '처세가'로 불리게 된다.


옮긴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많은 현대인들이 이아고를 비난하기보다 그의 입장에 공감하거나 그를 변호하리라는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나 역시 그녀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이아고가 영리하고 처세술 좋은 사람으로 보였기에 그녀가 말한 '많은 현대인'에 나도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 풍진에 물들어버린 내 인식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녀의 '불길한 느낌'은 '정확한 예상'으로 받아들여져 씁쓸해진다.


술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나는 체질상의 이유로 술을 못 마시는데, 16세기의 글에서 내가 했던 생각이 담긴 대사가 있어 반가워 소개한다. "술을 마시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기분도 안 좋아지는 편이라. 예법에 오락을 즐기는 다른 관습이 생겼으면 하고 얼마나 바라는지 모르겠어."(2막3장) 과거 술을 못마셔서 고민이 컸던 적이 있다. 모든 모임 장소에는 어김없이 술이 등장하는데, 술 못마시면 실망과 비난, 원샷은 미덕인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술자리의 분위기 깨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다. 지금은 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 남자들도 술집 외에 까페에서도 만나고, 술을 강요하는 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술 외에는 오락거리도 별로없고 지금처럼 다양한 가게도 없던 시절, 저 대사를 하는 인물의 고민이 남일 같지 않게 읽혔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작가이다 보니 아무래도 영국 중심의 인식을 드러내는 대사도 보인다. "덴마크 사람도, 독일 사람도, 배불뚝이 네덜란드 사람도 영국 사람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요."(2막3장)에서 영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돋보인다. 그리고 "무지한 인도인처럼"(5장2절)에서는 타민족인 인도인에 대한 멸시도 보인다. 셰익스피어는 16세기 말 사람으로 17세기 초까지 살았다. 그 시기는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 국가로 만들기 위해 서서히 사전작업을 해가던 때이다. 그러다 17세기 중반에 동인도 회사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인도진출이 시작된다. 인도를 집어 삼키려는 그 시절 영국인들의 우월의식은 제국주의의 토대가 되었으리라.


수명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사가 있어 소개한다. "아, 사내 인생 살아봤자 삼만육천 일. 술 한잔 마신들 어떠하리."(2막3장)에 나온 것으로 보아 16세기를 살았던 셰익스피어는 사람의 생을 100년으로 보고 있음을 알수 있다. 같은 시기 16세기 일본에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다이묘(지방영주)는 '인생 오십년'이라는 시를 남겼다. 참고로 이 인물은 자신보다 자신의 신하(가신)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같은 시기 '동양'에서는 '인생 오십'을 노래했고, '서양'에서는 '인생 백년'을 노래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실제는 어떨까. 셰익스피어 당시 영국의 통치자는 엘리자베스 1세로 그녀는 70세에 죽었다. 셰익스피어 본인은 52세에 죽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48세에 죽었으나, 살해당한 것이므로 제 수명으로 보긴 어렵다. 당시 일본의 통치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1세에 죽었다. 같은 시기 조선의 통치자는 선조임금으로 56세에 죽었다. 통계적 의미를 가지기 어려운 표본수이지만 현재까지 나열한 것만 보면 서양이 동양보다는 오래 살은 것으로 보이나, 100과 50의 두배 차이를 낼 만큼은 아닌 것 같지 않은가. 갑자기 '오십보, 백보'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오셀로> '공식적 주인공'은 '오셀로' 장군이지만, 극적인 효과, 문학적 갈등, 전개의 긴장감을 주면서 관객들을 잡아끄는 역할은 사실상 '이아고'이기에 <오셀로>에 '오셀로'는 없어도 되지만 '이아고'는 없어서는 안된다 할 정도로 이아고의 비중은 크다. 그런데 나는 동명의 다른 '이아고'를 안다. 유명한 디즈니 만화영화 <알라딘>의 악당 두목은 '자파', 그의 부관이자 최측근인 앵무새가 있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이아고'다. 영리하지만 교활하고, 거짓, 배신을 밥먹듯 하며, 속임수와 이간질에 능하고, 앞에서는 말못하고 뒤에서 욕하는 비굴한 성격을 가진 <알라딘>의 '이아고'는 <오셀로>의 '이아고'와 많이 닮아있다. 어쩌면 <알라딘>의 작가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오마주'로 '이아고'의 이름을 끌어다 쓴 것은 아닐까.



<리어왕>

리어왕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늙은 그는 이제 상왕으로 은퇴를 하고 싶었다. 딸들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도록 경쟁을 붙여 그에 따라 유산을 물려준다고 선포한다. 첫째(거너릴)와 둘째(리건) 모두 화려한 수사와 과장된 표현으로 얼마나 아버지 리어왕을 사랑하는지 장황한 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정직한 셋째(코딜리어)만은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음을 말한다. 언니들만큼 거창한 아첨이 없는 그녀의 말에 리어왕은 진노하고, 셋째를 내쫒고 두 언니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준다. 셋째의 억울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프랑스 왕자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프랑스로 데려간다.


리어왕에게는 두 명의 충신이 있었다. 한 충신(켄트 백작)은 그가 셋째 딸을 쫒아낼 때 위험을 무릅쓰고 부당한 처사에 대해 직언했다가 변절자로 낙인 찍혀 추방당한다. 비록 왕은 자신을 버렸지만 왕에 대한 충심은 전혀 꺽이지 않고 고귀했던 출신 마저 버리고 낮은 신분으로 변장하여 후 왕에게 접근, 자신을 종으로 기용해 줄 것을 요청한다. 추호도 그가 켄트 백작인 것을 모른 채 왕은 그가 시중을 들게한다.


한편 또 다른 충신(글로스터 백작)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적자(에드거)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서자(에드먼드)였다. 서자는 야망이 크고 영리했지만 성품이 좋지 못했다. 적자인 형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는 순리를 거스르고 순진한 형을 모함하여 아버지와 원수가 되게 만든 후 쫒아낸다. 적자에게는 수배령이 떨어지고 그는 미친 거지 흉내를 내며 자신의 정체를 숨겨 살아남는다.


첫째 공주(거너릴)의 남편은 올버니 공작이고, 둘째 공주(리건)의 남편은 콘웰 공작이다. 탐욕 많은 콘웰에 비해 올버니는 충직하다. 두 공주는 리어왕의 전 재산을 다 상속받고는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빈껍데기만 남은 왕을 쫒아낸다. 심지어 왕을 죽일 음모마저 꾸민다. 쫒겨난 왕은 딸들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서서히 미쳐간다. 두 공주의 욕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언니와 동생은 서로의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충신 글로스터 백작은 쫒겨난 왕을 도우려다 공주의 미움을 사서 성을 뻬앗긴다. 셋째 공주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출병하는데, 그 소식을 글로스터 백작에게 알린다. 백작의 서자(에드먼드)는 아버지가 프랑스와 내통했다고 둘째 공주 부부에게 일러바치고, 공주의 남편(콘웰)은 글로스터 백작을 잡아다가 두 눈알을 뽑아버린다. 덕망있던 글러스터 백작이 처참히 당하는 것을 더이상 지켜볼수 없던 하인들이 목숨을 내걸고 저항한 덕분에 백작은 실명된 채 목숨만 간신히 건진다. 하인들의 저항 중 콘웰 공작은 치명상을 입고 결국 죽게 된다. 모함으로 형을 내쫒고, 밀고로 아버지를 쫒아낸 서자(에드먼드)는 드디어 자신이 글로스터 백작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첫째 공주는 남편(올버니)이 정의롭고 야망이 없어 불만이었고, 둘째 공주는 콘웰이 죽자 과부가 되었다. 그런 두 공주는 글로스터 백작이 된 서자(에드먼드)를 마음에 품는다. 두 욕심 많은 공주는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하려 서로 경쟁하다가 이제는 한 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 이른다. 에드먼드는 두 여자 모두에게 양다리를 걸친다. 여인에 대한 욕망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녀 둘이 가진 재산과 권력을 합치면 사실상 왕이 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공주는 아버지 리어왕을 찾아내고 모녀는 눈물 겨운 재회를 한다. 리어왕의 정신은 돌아오고, 딸에게 지난 날의 어리석음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훈훈한 모녀간의 상봉도 잠시, 안타깝게도 셋째 공주의 프랑스군은 두 언니의 군대에게 패하고 셋째 공주와 리어왕은 포로가 된다. 첫째 공주의 남편(올버니)은 에드먼드가 아내와와 불륜을 저지른 것을 포함해서 그동안 에드먼드가 저지른 만행을 알게 되고 그의 군대를 해산시킨다. 이때 형 에드거가 등장하여 서자 에드먼드와 결투를 신청하고 치열한 싸움 끝에 에드거가 에드먼드를 죽인다. 그 사이 첫째 공주는 둘째 공주를 독살하고 자신도 자살한다. 다 죽는다. 올버니 공작은 포로가 된 리어왕과 셋째 공주를 살리려 했으나 이미 에드먼드가 자객을 보낸 후였다. 셋째 공주는 죽고 리어왕도 죽는다. 모든 오해와 의혹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올버니 공작은 에드거에게 왕국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과거 한 개그맨이 "코미디 보다 정치가 더 웃기다"라며 국민정서와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현실정치를 비꼬던 것이 기억난다.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후안무치의 모습에 국민들은 그저 어이가 없어 웃음 밖에 나오지 않으니, 정치인들의 '웃기는 소리'에 개그맨들이 실직하겠다는 풍자였다. 그런데 16세기 영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나보다. <리어왕>에서 "광대들이 설 자리가 없다네"(1막4장)라는 대사가 나온다. 재물과 권력을 위해 인륜을 저버리는 귀족들의 모습에 대해 광대는 저렇게 말한다. 위의 개그맨의 대사와 <리어왕>의 광대의 대사가 비슷하게 들린다.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주는 사실은 똑같은가보다. 부디 그 웃음이 실소나 조소 보다는 박장대소가 되는 경우가 많아지기를 바래본다.


당시 작문 스타일이 그랬던 것 일까, 작품을 읽다보면 수사가 참 거창하다는 것을 느낀다. 4대 비극 전체에 이런 경향이 드러난다. 이런 과한 수사법은 고전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다. 잠을 잘 때도 단순히 '잔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운명의 여신이여, 안녕히 주무시오. 다시 한번 미소 지으시고,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려 주시게"(2장2막)라고 신까지 끌어오면서 길게 표현한다. '아니다', '맞다'도 그냥 심심하게 말하지 않는다. "주피터에 걸고 맹세하건대, 아니다.", "주노에 걸고 맹세하건대, 맞습니다."(2막4장) 무슨, 말 길게 하기 대회라도 하는 것 같다. 시대적인 문학 성향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점잔 떨고, 품위나 기품을 말하던 시대를 대략 상상해 볼수 있어 재밌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한자를 섞어 말을 길게 하곤 했었다. 편지나 통신문의 첫 문장에는 항상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고..."라는 어려운 수사를 습관처럼 붙여 썼던 것이 기억난다. 언어에도 효율성이 강조되는 요즘 시대에는 무분별하게 글을 줄여 문제가 되곤 하는데,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늘어뜨려 말하는 것이 대세였다는 게 대조적으로 보여 재밌게 느껴진다.


고전에 나온는 대사들 중에는 심오한 철학이나 삶의 깊은 성찰이 담긴 것들이 있다. "우리가 불행에 처하면 흔히 우리의 행동이 그 원인인데도, 그 재앙을 해와 달, 별의 탓으로 돌린다. 내가 태어날 때 아무리 순진한 처녀별이 반짝였대도, 나는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여전했을 것이다."(1막2장) 운명론을 철저히 거부하고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이 느껴지는 대사다. 개인적으로 사주팔자나, 점, 운세, 작명을 신뢰하지 않는다. 년월시로 내 운명이 정해진다면 동해, 동월, 동일, 동시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같은 운명이어야 하지 않을까? 작명에서는 한자로 이름을 풀이하는데 그러면 영어로 이름을 만든 외국사람들은 풀이할 운명조차도 없는 것인가.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점과 같은 것은 현실적 모순이 많다는 것을 알수 있다. 물론 단순한 재미나, 위로를 얻고 싶어 찾는다면 괜찮겠지만 너무도 맹신하는 사람들은 좀 걱정도 된다. 400년 전의 사람들도 그런 모순을 생각했던 것 같다. 서양에서는 별자리로 운세를 보는데, 태어난 때에 따라 정해지는 별자리가 운명을 결정한다는 별자리 점을 과감하게 부정하고 있다. 우리가 처한 불행은 운명이 아닌 과거로부터 계속된 우리의 행동에서 기인한다는 대사는 정말 통찰력 있는 말이라 생각하고 깊이 공감한다. 누구라도 바라는 바가 있다면 헛된 미신에 기대기 보다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 외에도 "궁핍이란 놈은 신묘한 재주가 있어 하찮은 것을 소중한 것으로 바꿔주는구나"(3장2막), "더 심각한 병에 걸려 있으면 작은 병은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3막4장), "마음이 편하면 육체의 아픔을 느끼기 쉽다."(3막4장), "다 가진 인간은 오만해진다면, 다 잃은 인간은 오히려 얻는 법이라네."(4막1장)과 같은 대사들은 곱씹을수록 삶의 통찰과 깨달음이 느껴진다. 네 가지 대사 모두 고난이 오히려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고, 근심을 덜어주며, 육체를 편하게하고, 모든 것을 얻게 해주는 것이라 말해주고 있다. 즉. 고난이 축복이라는 소리다. 고난이 축복인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문장들이 주는 교훈은 그동안 봐온 마음이나 행복을 주제로 하는 책들의 핵심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맥베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장군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왕(덩컨)과 사촌지간이다. 노르웨이가 스코틀랜드를 쳐들어왔을 때 장군 맥베스는 용맹하게 싸워 승리하고 국민적인 영웅이 된다. 왕의 총애와 신임은 더 깊어지고, 공을 인정받아 새로운 영지도 하사받는다. 성공가도를 달리며 덕망을 얻던 맥베스에게 어느날 마녀가 나타나 그가 왕이 될 것을 예언한다. 그 예언이 잔잔한 맥베스의 마음에 왕좌를 향한 야망을 불러넣은 것일까, 아니면 원래 맥베스에게 그 야망이 있었던 것일까. 맥베스의 성에서 승리 축하연을 열고 사촌인 던킨 왕이 그 성에 묶게 되었을 때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전쟁터를 누비던 맥베스였지만 막상 왕을 살해하려고 하니 인정과 양심에 주저하기 시작한다. 이때 맥베스의 아내가 그를 꾸짖고 부축인다. 보통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악행을 막거나 폭로하고 선을 권하는 역할이라면 <맥베스>에서는 맥베스보다 그의 아내가 더 적극적이다. 왕을 살해한 맥베스가 반쯤 정신이 나가 돌아왔을 때에도 피 묻은 칼을 도로 현장에 가져가 술에 골아 떨어진 호위병들이 그런 것인냥 꾸며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도 맥베스의 아내 작품이다.


다음 날 왕이 살해된 것이 발견되자 충격적인 역모 상황에 성은 난리가 난다. 막 술에서 깨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호위병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해명도 하기 전에 맥베스에 의해 처단된다. 맥베스는 그들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왕을 시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해버린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첫째 왕자(맬컴)와 둘째 왕자(도널베인)는 각각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피신한다. 왕자들이 자취를 감추자 곧 그들이 모든 혐의를 받게 된다. 맥베스는 왕이 되고 그의 아내도 왕비가 된다. 맥베스가 가장 신경 쓰이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장군 밴쿠오였다. 맥베스는 연회를 열어 밴쿠오와 그의 아들(플리언스)을 초대하는데, 사실 자객이 준비하고 있는 함정이었다. 결국 자객에게 밴쿠오는 살해당하고 아들만 겨우 도주하여 살아남는다. 억울하게 죽은 밴쿠오의 유령은 맥베스의 주변에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환영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망가져가는 맥베스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귀족 중에 맥더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뭔가 낌새를 느끼곤 잉글랜드에 있는 첫째 왕자(맬컴)를 찾아간다. 잉글랜드에서 병사를 일으켜 부왕의 복수와 스코틀랜드의 수복을 권한다. 그러는 사이 맥더프의 배신을 눈치 챈 맥베스는 그의 성에 자객을 보낸다. 다행히 맥더프는 잉글랜드에 있어 화를 면하였으나, 애꿎은 그의 가족들은 처참히 살해당한다. 왕이 되는데 죄 없는 피를 너무도 많이 흘린 탓에 강인하던 맥베스의 아내도 두려움과 죄책감에 서서히 미쳐가기 시작한다. 깨끗한 손에 계속 피가 지워지지 않는다며 몇 번이고 씻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다가 결국 자살한다. 잉글랜드에서 왕자 맬컴과 귀족 맥더프가 끌고 온 군대는 맥베스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전투 중 맥베스는 맥더프에게 죽는다. 이렇게 맬컴은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하고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민망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할까한다. '음주 후 관계시 발기가 잘 안되는 것'은 비뇨기적 의학 상식에 해당한다. 체질에 따라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19금' 느낌의 이야기를 꺼내서 놀랐을 것 같다.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이런 언급하기 민망한 증상에 대해 셰익스피어가 너무도 '문학적'으로 표현해 놓았기에 흥미로워 소개하려 한다. "(술은) 색욕을 자극시켰다가 안 했다 합니다요. 욕망은 일으키되, 실행 능력은 빼앗으니 말이죠. 고로, 과음은 색욕에 관해서는 애매한 말로 거짓을 일삼는 놈입니다요. 그것은 그놈을 일으켰다가 쓰러뜨리고, 부추겼다가 힘을 빼고, 설득해 놓고는 실망시키고, 착수시켰다가 꽁무니를 빼 버린답니다."(2막3장) 어쩌면 단순히 지나칠 수 있는 생리적 현상을 400년 전의 세익스피어는 술을 의인화하여 해학적으로 묘사해놓았다. 술은 성욕은 돋우지만 발기는 되게 않게 하는 것을 두고 '거짓을 일삼는 놈'이라고 표현한 것이 재밌다. 웃음이 빵터지는 사람도 있을 것 같고, 무슨 소린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더 이상 설명하면 글이 이상하게 흐를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혹시 이해가 안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되니까.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는 친족간의 살인이 많이 등장했다. <햄릿>에서는 왕이 되기 위해 형을 독살한 아우(클로디어스), 의도치 않게 아내를 독살하는 남편(클로디어스), <오셀로>에서는 외도를 의심하여 아내를 목졸라 살해하는 남편(오셀로), 진실을 폭로하는 아내를 막기 위해 칼로 찔러 죽이는 남편(이아고), <리어왕>에서는 유산과 남자 때문에 동생을 독살하는 언니(거너릴), 더 이상 뽑아 먹을 것 없는 아버지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짜는 자매, <맥베스>에서는 왕좌를 위해 사촌을 칼로 죽인 장군이 나온다. 가까운 관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은 비극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또 눈에 띄는 것은 유령이다. 셰익스피어는 유령이라는 장치를 잘 활용했다. <햄릿>에서는 아버지가 독살당한 것을 몰랐던 햄릿에게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진실을 알려준다. <맥베스>에서도 암살당한 밴쿠오 장군의 혼령이 나타나 맥베스를 두려움과 공포로 망가뜨린다.


책의 말미에는 옮긴이들이 각 비극에 대해 평한 글이 실려있다. 자신이 작품에서 보았던 것과 옮긴이가 보았던 것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나는 그들의 글을 읽으며 내가 너무 작품을 띄엄띄엄 읽은 것은 아닌가 돌아보았다. 분명 같은 작품을 읽었는데 옮긴이들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관점을 가지고 다시 작품을 읽는다면 작품이 또 다르게 느껴지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햄릿>에서는 햄릿에 대해서 뒤틀린 시대를 바로 잡으려는 근대적 인물이라 평했다. 보통 '햄릿'하면 아버지의 복수를 질질끄는 우유부단한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거기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조로 반박하고 있어 참신하게 느껴졌다. <오셀로>에서는 이아고의 내면에 악이 어떻게 진화해갔는가 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리어왕>에서는 'Nothing'이란 키워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맥베스>에서는 위에서 나도 언급했듯 맥베스 아내의 남성적 세계에 대한 도전을 주목했다. 타인은 어떻게 작품을 보았는가 하는 관점의 공유는 우리가 같은 작품을 보다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 말로만 듣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직접 읽으며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니, 주변에 그의 작품을 공연하는 포스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포스터들이 내가 이 책을 읽기 기다렸다가 지금에야 '짜잔'하고 나타난 것은 아닐 것이다. 늘 공연은 있어왔고 포스터도 있었을 것인데 내가 작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 극작품은 활자로 읽는 것이 아니라 연출을 보기위해 만들어 진 것 아니던가. 작품을 글로 읽었기에 이제 전반적인 내용은 알고 있다. 하지만 각 장면들을 실제 배우들은 어떻게 살려낼지 궁금해져 공연에 관심이 간다. 책은 이전에는 관심갖기 않았던 것에 관심을 갖게 해주거나,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볼수 있도록 해주기에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한번 읽어봐야지 했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드디어 읽었다. 이젠 어디선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400년 동안 전세계인들에게 사랑받아온 고전 중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 밀린 숙제가 해결된 기분이다. 이 중에도 나와 같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번 읽어봐야 할텐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다면 이 책 한권으로 털어버리면 어떨까. 분명 "사람들이 이래서 고전을 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촌스럽거나, 지루하지 않고, 공감과 재미뿐 아니라 지혜도 배울 수 있는 <초판본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이번 기회에 도전해보면 좋겠다. 90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처음에는 압도될 수도 있으나, 분명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불후의 명작이 그러한 명성을 얻게 된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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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김수현 지음 / 놀(다산북스)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저자 김수현 작가의 4년 만의 신작이다. 나는 이 책의 '사전 독자단'에 참여했었다. 약 두 달전 그때는 제목도 아직 정해지지 않아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법>이라는 가제를 달고 스프링 제본의 모습으로 나에게 왔었다. 이전에도 정식 출판 전의 도서를 받아 본 적이 있었지만 출판 전후라는 시기나 책의 정식여부의 차이만 있었지만 이 책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사전 서평의 독자가 책을 읽으며 자유롭게 첨삭이 가능했다. 나는 단순한 오탈자에서부터 어색하게 느껴지는 표현, 문장, 그에 대한 대안에 대해 첨삭했다. 그런 기술적인 부분뿐 아니라 해당 페이지를 읽고 느껴지는 감정이나 거기에서 나오는 표현과 관련된 내용을 덧붙였다. 마음이 동하는 부분은 색연필로 줄도 그었다. 돌아보면 혼자서 작가 코스프레나 편집자 놀이를 했다.



그렇게 첨삭한 페이지가 약 40페이지 정도 되었다. A4 용지 한 면에 다단이 되어 정식 책 두 면이 인쇄되었기에 실제 첨삭은 40군데를 훨씬 넘을 것이다. 이렇게 내가 남겨 놓은 흔적은 고스란히 출판사 측에 전해져 참고자료로 쓰기로 되어 있었다. 김수현 작가를 포함한 출판 관계자들이 첨삭을 찾기 어려울까봐 해당 페이지에는 포스트잇 플래그를 달아 학창시절에도 안하던 짓(?)까지 했다.



그 스프링 제본이 얼마전 완성된 책과 함께 나에게 돌아왔다. 정식 제목은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였다. 그리고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예쁜 파스텔 칼라의 모나미펜 5자루와 김수현 작가의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이미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나는 지금 자랑을 하고 있다. 단순히 일방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첨삭, 제안이 전달된 책이기에(설령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남다르게 느껴졌다. 책의 탄생 '목도'했다는 '특별함', 살짝은 '관계자'에 발가락, 아니 발톱이라도 걸친(발톱도 안되겠습니까...) 사람으로써의 '뿌듯함'같은 것들이 어우려져 만들어내는 애착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함과 뿌듯함은 책 내부와 겉표지에 실린 '사전 독자단'이란 이름으로 '공인'(이정도면 발톱은...)되어있다.



앞서 언급한 책과의 인연과 내 이름 석자와 단 몇자의 내 한줄평이 실렸을 뿐인데도 이렇게 책에 색다른 애정이 생기는데, 작가뿐 아니라 책의 제일 뒷쪽 출판관계자로 명기된 분들의 책에 대한 애착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아무튼 나에게 특별한 경험이었음은 틀림없다.



본래 이 책의 서평을 4월 초에 썼었지만 출판사 측에서 정식 발매 후에 글을 올려주길 요청하였기에 이제야 올린다. 사실 서평이라기 보다는 사전 독자단으로 책을 다 읽고 마지막 빈 공백에 손으로 몇 자 적은 글을 옮긴 것이다. 평소 주저리주저리 쓸데없이 길게 글을 쓰는 평소의 내 서평과는 달리, 펜으로는 글쓰기도 느리고 손도 빨리 아파오는 나의 신체적 결함덕에 글이 짧다. 말이 새는데, 앞으로 서평을 너무 길게 안써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사람들은 긴 글 싫어한다... 아래는 그때 올리려 했던 글이다.



이번에 서평할 책은 아직 출간이 안되었다.(이 글은 출간 전인 20년 4월에 쓰였고, 현재는 정식 출간되어있다.) 사전 독자 평가단에 선정되어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를 쓴 김수현 작가의 신작이다. 제목도 확실히 정해지지 않아 가칭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법>이라고 했다. 가칭처럼 관계에 대한 글이다. 관계하면 타인만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에는 나와의 관계 또한 다루고 있다. 타인의 관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나와의 관계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던 노래 처럼 우리 안엔 우리가 너무 많고 그 여러 우리들과 우리는 함께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행복하기 어렵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마음과 관계에 대한 통찰력에 여러번 놀랬다. 이 책에서 작가가 하는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가 한번 씩은 생각했거나 경험해 본 평범한 것들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경험은 순간의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사라지기 쉽다. 작가는 그런 사라질뻔한 것들을 붙잡아 거기서 한 걸음 더 깊이 고민했고 성찰해 보면서 평범한 것들을 특별한 깨달음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당연한 현실의 이야기를 뒤집어 생각해보면서 "으레 그렇겠거니" 하고 지나쳤을 것들을 작가의 눈을 통해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글에서 작가 내면의 깊이와 단단함이 전해져 나이가 있는 분일거라는 생각에 호기심이 발동해 검색을 해보았다. 그런데 젊은 여성분의 사진이 나와 놀랐다.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 놓을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사연이 있었을까. 중간중간 마다 인용되는 적재적소의 문구들도 관계와 심리에 대해 작가가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오래 연구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돌아봄'이라는 표현이 유독 눈에 띄인다. 종교수행을 했거나 마음공부를 해온 사람에게서 느낄수 있는 분위기를 감지했었는데 마음공부명상을 했다는 이야기에서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마음을 돌아보고", "현재에 머무르며", "세상에 다정하자"는 작가의 이야기에서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는 밖이 아닌 내면을 살피는 것에서 얻을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앞서 관계에 대한 책으로 소개했는데 더 자세히는 '관계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위로와 조언이 담긴 책'이다. 작가의 관계에 대한 지혜롭고 유용한 충고 만큼이나 따뜻하고 포근한 위로가 빛나는 책이다. 당장 다친 사람에게 앞으로 조심하라는 충고보다는 괜찮냐는 위로가 더 필요한 법이니까. 주변에 지금 힘들거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 글을 읽으며 작가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 들어 다 읽고 난 지금 작가와 묘한 친밀감을 느낀다. 김수현 작가의 이번 책이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관계의 통찰을 길러주기를 기대해 본다.


아래는 좋았던 구절들을 모아보았다.

1-1) 그걸 꼭 말로 해야 압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냐고 묻고 싶지만 그걸 꼭 말로 해야 할 때가 있다.

1-2) 표현에도 준비운동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걸 나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느끼고 바라는 모든 것이 바람직한 건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 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 마음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1-3) 상대의 마음에 머무르는 것.

타인의 고통을 들을 때는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 것.

공감이 필요한 상대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이야기는 "괜찮아? 지금 마음 어때?"하고 그 마음을 물어주는 일이다.

위로나 조언이 필요할지라도 우선은 상대가 충분히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물어야 한다.

만약 힘든 누군가의 곁에 있다면 상대가 충분히 말 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물어 주자.

"네 마음이 그랬다면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대의 마음을 수용해야 한다.

우리 삶에 가장 필요했던 위로는 존재의 무게를 담아 그 마음에 머무르는 일이다.

1-4) 아주 작게라도 표현합시다.

삶을 파괴하는 무력감은 고통의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 생겨난다.

매번 싸울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삶을 지켜내고 무력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쉬운 단어가 있다.

그건 바로, "네?"이다.

요즘 세상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순수한 놀라움을 담아 아주 짧게 "네?"라고 말하며 놀라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건 인간에 대한 예의는 필요하다는 것.

종종 후회로 남는 자기 표현은 표현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중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무례한 상대에게 친절할 필요는 없지만, 같이 무례해질 필요도 없다.

정중하게 내가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조금씩 알려주는 거다.

1-5) 나만의 언어를 찾을 것.

화법은 천성이 아닌 기술이다.

저절로 완성되지 않고 타고난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여겨서도 안된다.

조금 더 매끄럽게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고 나를 지킬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하며

연습하고 수정하고 시도해 나가자.

나의 언어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1-7) 일단 표현해야 상대의 진가를 안다.

갈등을 만들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이며

갈등을 이야기하고 해결할 수 있을 때 이 정도에는 깨지지 않는다는 안심이 생길 수 있다.

1-9) 사람은 고쳐 쓸 수 없어요.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아무리 삶이 고단하더라도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관계, 진심과 사랑이 있는 관계였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은 변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자조적 체념이 아닌 타인을 원하는 식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겸손의 깨달음이어야 한다.

2-1) 테이커(taker)와는 상종하지 말 것.

착하다고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아무에게나 착했기에 손해를 본 거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만 사는 디즈니 월드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당들이 넘치는 고담 시티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나친 경계심이나 분별없는 이타심이 아닌 세상의 양면을 함께 바라보는 힘이자 테이커를 걸러낼 수 있는 안목일 뿐이다.

내가 가진 걸 뺏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 마음껏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착취적인 관계가 지속된다면 거리를 두자.

기꺼이 당신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기게 하라.

단, 그럴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만.

2-5) 피할 수 있는 건 피해 보자.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여기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들이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전술은 종잡을 수 없는 칭찬과 비난 또는 침묵인데 이들의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게 되면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쩔쩔매게 되고 그들의 조종 대상이 된다.

이런 경우엔 말려들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들의 칭찬을 기다려서도 안 되고 그들의 비난을 진실이라 여겨서도 안되며 그들의 침묵의 이유를 추측하려 애써서도 안된다.

칭찬과 비난, 침묵 모두에 거리를 두고 그들로부터 관심 없는 사람의 지위를 차지하는 걸 목표로 하는 게 좋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상대를 우리 삶에 주연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한 걸음 물러나자.

모두에게 정중하되 누구에게도 쩔쩔매지 말자.

2-7) 헤이터의 기본값.

아무리 좋은 식당도 아무리 좋은 영화도 아무리 좋은 음악도 모두가 좋아할 수는 없듯이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누군가 당신을 미워한다 해도 그 사실이 당신의 존재를 훼손할 수 없고 여전히 당신에게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당신을 상처 내는 이들의 목소리가 아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그게 그들의 애정에 대한 우리의 보답이다.

2-10) 아무 말 대잔치에 흔들리지 마세요.

야, 넌 살 좀 빼.

널 빼는 게 더 쉽겠어.

2-11) 둔감함이라는 위로.

우리는 나 혼자 상처받았다는 생각에 자기연민과 분노에 빠지지만 우리가 받은 상처를 상대가 전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

상처에 대한 너그러움 없이는 우리 모두는 상처투성이가 된다.

상대의 실수에 조금은 눈감아주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상대의 행동에 의도를 찾지 않는 둔감함이 필요하다.

3-2) 좋아 보이려 애쓰지 말자.

좋아 보이는 건 쉽지만 진짜 좋을지는 별개의 문제였고 좋아 보이는 사진 속 모습이 행복까지 인증하지는 못한다.

가중 중요한 건 당신에게 좋은가,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

남들에게 좋아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당신에게 좋은 것을 찾고 당신의 마음을 돌봐야 한다.

3-3) 돌아올 힘을 남겨두자.

지금 당장은 너무 즐겁고 조금 더 갈 수 있어도 돌아갈 시간과 힘을 남겨두는 것이다.

자치기 전에 돌아올 수 있어야 좋았던 순간을 망치지 않는다.

이건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만날 사람이라면 전력을 다해도 문제가 없지만 장기적인 관계에선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다.

3-4) 인싸가 아니라도 괜찮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만족스러운 관계의 열쇠는 관계의 양이 아닌 관계의 질에 있다.

3-5) 호의는 돼지고기까지, 이유 없는 소고기는 없다.

호의는 돼지고기까지, 이유 없는 소고기는 없다는 말처럼 희생을 동반하는 지나친 호의에는 반드시 이유가 붙는다.

3-10) 기초 믿음의 회복.

곁에 머무는 이들은 변하겠지만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한다.

세상은 그렇게 가까이 보면 늘 변하지만 멀리서 보면 늘 그대로다.

그러니 관계가 영원하지 않았음에 너무 오래 서글퍼하거나 너무 이르게 겁낼 필요는 없다.

계절 내낸 나무는 모습을 달리하지만, 늘 그 나무인 것처럼 강물은 늘 흐르지만 강은 여전히 강인 것처럼 누군가는 떠날 것이고 누군가는 올 것이며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4-3) 예쁜 것만 보세요.

어떻게 해야 마음에 새겨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불확신과 예민함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꾸 불안과 우울에 빠져버리는 내 맘 안의 웅덩이가 있다면, 웅덩이를 메우는 것보다는 적당히 피해가며 마음의 무리를 주지 않는 게 효율적일 수 있다.

뉴스를 보며 불안을 늘려가고 있다면 실시간 이슈들을 확인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면 고개를 들고 진짜 눈앞의 삶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에 물드는 법이다.

4-4) 부당한 요구 들어주지 않기.

내 거절이 야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내가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게 되면 상대는 무리한 요구를 가능한 요구였다고 생각하게 되고 '지난번에 다른 사람은 해줬는데', '지난번에 다른 사람은 괜찮다고 했는데'라며 더 당당히 부당한 요구를 하게 된다.

때론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게 최선의 선의이자 우리의 연대일 수 있다.

4-6) 그냥 해보자.

라캉이 말하길 사람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만 살피다 보면, 내가 뭘 원하는지 자기 욕망에 대해서는 무뎌진다. 그래서 '그냥'이라는 감각은 소중하다. 누구의 욕망도 아닌, 온전한 나의 욕망, 나라는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일 수 있기에 우리는 그냥이라는 감각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그리고 그냥 한번 해봐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망하지 않는 나름의 방법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최소한 생계에 대한 대책은 세우는 게 좋다.

한 가지 꿈에 장렬히 전사할 필요는 없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퇴로는 열려있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한다.

5-1) 화해의 기술.

친밀한 관계에서 싸움은 피할 수 없이 생겨나고 때론 숨겨둔 서로의 진심을 이야기하기 위해 싸움도 필요하다. 하지만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누가 더 옳은지 잘잘못을 논하며 불필요한 상처를 낸다면 뻔하고 식상한 전개와 소모적인 논쟁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싹둑 잘라버리는 게 답일 때가 있다. 상대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다면 뭐가 됐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감정의 일방적 억압이 아닌 덜 상처 주기 위한 화해의 기술이 필요한 거다. 어차피 화해라는 결론이 정해져 있다면 사소한 논쟁보다 상대가 더 소중하다는 마음을 담아서 이야기하자. "그대, 나에게 오라."

5-2) 엄마의 기본값.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는 말은 엄마를 초인적 존재로 여기게 했는데 기본값이 이렇게 높게 책정되면 일단은 엄마가 힘들다. 사람이기에 그럴 수도 있는 일도 '그래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일'이 되어 엄마는 자신의 모성을 의심하기도 하고 아이는 자신을 비운의 주인공처럼 느끼기도 한다. 결국 모성에 대한 상향평준화는 우리 모두를 죄책감과 상처에 취약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엄마도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 엄마도 실수할 수 있고 엄마 자신 역시 상처가 있는 연약한 사람일 뿐이며 때로는 삶의 구렁텅이에서 버둥거릴 수 있는 한 개인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또 누군가의 부모이기에 같이 행복해져야 한다.

5-3) 번아웃 금지.

당신은, 당신을 아낄 수 있어야 한다.

5-5) 각자의 고독의 몫.

우리는 언제나 혼자인 순간이 있다. 지방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단백질이 채워지지는 않듯이 관계를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혼자의 영역이 존재한다. 개별적 인간이 되지 못한 허기와 결핍은 타인과의 관계로 결코 채워질 수 없고 그 공허에서 도망친다 해도 언젠가는 갚아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자기 스스로 기쁨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어차피 혼자라며 쓸쓸해 하지도 나만의 외로움일 거라 착각하지도 말자. 우리는 모두 공평하게도 각자의 고독의 몫을 이겨내고 있다.

5-9) 다 같은 중생 아니겠습니까.

나는 행복의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건 마치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꾸준히 운동하세요'라는 건강 조언처럼 언제나 익숙했던 이야기였다. 감사하고, 명상하고, 남을 돕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 행복해 보이는 누군가를 향해 샘내고 억울해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마음과 싸우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행복을 달성한다면 그건 그들의 것이다. 누구도 그 행복을 샘낼 자격은 없다. 그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마음을 돌봐야 한다. 감사하고, 현재에 머무르며, 세상에 다정하자.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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