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요가 - 인도 최고의 지성과 영성, 비베카난다의 말
스와미 비베카난다 지음, 김성환 옮김 / 판미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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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요가>는 19세기 인도에 등장한 후 지금까지 세계인의 마음 속 영적 지도자로 남아있는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강연집이다. 우리는 그보다 6살 어린 간디는 알아도 비베카난다는 잘 모른다. 인도의 국부이자 위대한 사상가 간디는 "그의 글을 만나고, 나의 사랑은 1,000배 불어났다."라는 말로 그를 향한 존경을 드러냈다. 내가 비베카난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인도서 요가를 배우면서다. 만나는 요기(요가 수행자)들 마다 그를 스승으로 칭송하는 것을 보았다. 후에 그의 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 통통한 얼굴과 투박한 체형으로 그가 과연 요가를 잘 할수 있겠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런 생각은 당시 나의 요가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요가는 요가의 한 부분인 '아사나(행법)'이다. 실제 요가는 인도 사상과 힌두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수행법의 총체를 뜻한다. 비베카난다의 요가는 몸의 요가보다는 영적 요가, '마음의 요가'였다. 사족이지만 책 제목을 <마음의 요가>로 한 것은 신의 한수라는 생각이 든다. '비베카난다의 가르침'과 같은 이름이었더라면 과연 인도나 인도철학사에 관심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대부분 이 책을 그냥 지나쳤을 테니까. 다행이 요즘 웰빙, 워라벨, 소확행과 같은 행복과 내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음'과 '요가'라는 키워드는 사람들의 눈낄을 끌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의 요가', 아직은 몸의 요가가 더 익숙한 우리들에게 참 매력적인 이름 아닌가.


비베카난다는 그와 그의 글을 접한 세상 모든이들의 영적 감수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엄청난 명성에 비해 너무도 짧은 39세의 일기로 생을 마친다. 당시 나에게 요가를 가르쳐주던 한 요기는 스와미 비베카난다를 이해하는 것은 인도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도 했었다. 나는 그의 삶과 가르침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급한대로 현지에서 그의 책을 몇 권 샀지만 언어의 장벽을 넘지는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 그와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으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마음의 요가>라는 비베카난다의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설레임마저 느꼈다.


책은 지금부터 120여년 전 그가 영국과 미국에서 했던 12번의 강연을 12개의 챕터로 담고 있다. '이 삶이 진짜일까?', '자유를 향하는 길',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당신은 태어난 적도 없고, 죽지도 않습니다.'와 같은 챕터 제목은 비단 요가 수행자들이나 영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흥미로운 주제일 것이다.


인도 철학은 베다를 근원으로 하며 '베다의 끝'을 의미하는 '베단타 철학'으로 발전한다. 비베카난다의 강연은 베단타 철학과 다양한 요가 수행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베단타 철학의 이해에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비베카난다의 업적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종파로 갈린 힌두이즘을 집대성하고, 종교적 맹신과 허황은 걷어내고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재정비하여 현대화를 이뤄내고, 종교와 민족을 넘어 누구라도 수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일반론적 가치를 발굴하여 대중화를 실현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 디자인을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일단 책의 첫 인상은 예쁘고 신비스럽다. 저채도의 연분홍 톤은 '마음'을 다루는 책답게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양장본을 채택하여 고급스러움과 종교적 이미지가 어우러져 신성한 분위기도 연출해낸다. 글자에는 핑크골드를 금박하여 세련된 느낌도 주었다. 특히 측면 모서리와 전면에 '무드라(수인)'를 연상시키는 손 모양의 포인트를 주어 인도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러한 무드라는 델리 공항에서도 볼수 있는데 인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상징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치 이 무드라가 베단타 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그와 같이 환영해 주는 것 같다. 요즘은 책도 패션을 입는 시대이며 책의 기능 중에는 분명 심미성도 존재한다. 아무리 내용이 좋다고 하더라도 어울리는 디자인을 갖추질 못한다면 독자의 이목을 끌수 없다. 내용과 더울어 겉에도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보였다.


책을 읽다보면 그의 통찰력 있는 비유와 마법같은 설명에 여러번 감탄하게 될 것이다. 마치 거대한 도서관을 머리속에 넣고 다니다가 강연장의 빈 공간에 수천년 동안 인류가 쌓아온 진리를 차곡차곡 꺼내어서 구현해내는 느낌이었다. 이 잘 짜여진 문장들을 실시간으로 대중 앞에서 술술 풀어내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설명은 쉽고 명확하며 거침없었다. 살아있던 그는 분명 언어의 마법사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주장을 풀어내는 과정이 더 흥미로웠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을 그는 신과 인간에 대한 한 편의 시로써 표현해내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참으로 문학적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천재성도 있겠지만 사회적 배경도 한 몫했을 것이다. 인도 카스트의 2번째 크샤트리아(무사) 계급으로 어려서부터 승마, 수영, 성악, 기악 같은 각종 교양을 습득하고 자연과학, 천문학, 수학, 철학 같은 여러 학문을 익혔다. 인도 고대 문헌을 탐독하고 명상 같은 영적 수행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서양의 종교와 철학도 공부하였다. 나중에는 성자 라마크리슈나의 지도 아래 인도 전역을 유랑하며 수행자의 길을 걷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인류의 지성과 영성을 양분 삼아 그는 놀라운 통찰력을 피워낼 수 있었다.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쉽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신'이다"라는 것이다. 360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은 이것의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 황당해 할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옮긴이가 서두에서 한 말처럼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읽고 소화해 가다보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마야(무지)로 인해 분리된 다수성인 것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베단타 철학이 주장하는 불이일원론이다. 이것은 신과 내가 분리되어 있다거나 너와 내가 따로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부정하고 동시에 모든 것은 변하기에 불멸부동 불가분의 존재는 있을수 없다는 불교의 불이론 마저도 부정한다. 정확히는 부정이라는 표현 보다는 두 가지 설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뺀 '하이브리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불이일원론의 흔적을 타종교 속에서도 찾아내어 이것이 보편적인 개념이며 지혜로운 성인들은 이미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논한다.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일찍이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었다.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주', '인내천'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 속에는 신이 존재하므로 모두는 평등하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베카난다 또한 모든 세상의 만물의 본질이 하나의 '신'이라는 존재인 것을 주장함으로써 사랑의 당위성과 증오의 부당성을 설명한다.


불이론과 불이일원론에 대해 조금더 이야기 해보면 불이론과 불이일원론의 차이는 이해하지만 그 차이가 있든 없든 궁극적으로 이 생각이 추구하는 길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서는 연기법을 통해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베단타 철학에서는 모두가 같은 신이라는 것으로 하나라고 말한다. 연결된 것이나 하나라는 것이나 말의 차이일 뿐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변하므로 나라고 할 어떠한 실체도 없고 본래 나라고 할 것이 없기에 생과 사도 없다며 불생불멸을 설명한다. 다만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관점에 따라 생도 있고 사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베단타에서 모든 것이 하나의 '그것'이기에 생과 사는 마야의 현현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뿐 실재는 나고 죽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불생불멸을 설명하는 것이 과정의 차이지 의도하는 바는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불교 또한 인도 철학 토대 위에서 생기다보니 서로 뿌리는 공유되어 있어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비베카난다의 위대함이 잘 드러내는 부분은 마지막 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이상적인 종교란 모든 마음에게 양식을 공급할 정도로 커야한다고 설명하면서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를 융합할 때라야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배척이 아닌 포용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포용이라고 말한다.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고 모두와 함께 예배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적극적인 포용의 태도에서 깊은 인류애가 느껴졌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를 복을 구하는 종교로 생각하면 오해하기 쉽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앞에서 언급된 것 처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종교다. 힘이 필요한 이에게는 힘을 붇돋아주고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는 위로가 되어주는 영혼의 양식을 키워내는 영혼의 밭말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타종교에 다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종교 자체를 경멸시하는 모습도 보인다. 실로 지금은 종교가 사라져가는 시기다. 불교의 본산이라는 조계종에서 스님들의 각종 비리와 비행이 공중파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고발되는가 하면 정치적 극우세력의 중심을 자처하는 목사님들의 사랑과 용서가 아닌 증오와 저주의 발언이 매체를 통해 들려온다. 과거에 비해 사람들은 지적 수준은 높아지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일반화 되면서 종교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 들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보자.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나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외로운 사람들도 늘었으며 그에 따라서 자살율도 높아졌다.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면서 육체의 영역이 아닌 두뇌의 영역 또한 AI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때 일수록 '인간의 고유한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종교적 해답의 요구는 커질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종교의 의미가 사라져가는 이 시기가 역설적으로 마음과 영혼에 양식을 주는 종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시작은 이미 120년전 비베카난다가 주장했듯이 '포용'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베카난다가 한 말 중에서 이 말이 인상깊었다. "사람들이 종교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설교자들이 청중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것일뿐 적합한 진리를 주는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무신론자나 유물론자였다 했을지라도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사람으로 변모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책이 종교로 분류하자면 힌두교 서적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 이유로 타종교인들이 기피할지 모르겠으나 12장에 담긴 내용은 길 잃은 양을 이끌어야 하는 목자가 도리어 길을 잃고 헤맬 때 그 목자에게 길을 찾아주는 지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 그래서 좋은 책이었다. 위대한 사상가란 잘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혼란스러운 대중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는 사람일 것이다. 이 책 속에 인도의 위대한 사상가가 제시해놓은 그 길이 담겨있다. 그러니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귀 있는 자 와서 들으라. 서평은 이 정도로 줄이고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현재를 딛고 서 있지만, 우리의 가슴은 무한한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현재의 빛을 즐기면서, 앞으로 도래할 모든 것을 향해 모든 마음의 창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이렇게 기도드리기로 합시다. 과거의 모든 예언자들에게 경배를! 현재의 모든 현자들에게 경배를! 미래의 모든 성인들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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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아 2020-04-30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분...정체가..? 안살수가 없게 만드시네요

따부시향덕 2020-05-21 11: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