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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순간 - 20kg의 짐, 779km의 거리, 40일의 시간
방멘 지음 / 방 / 202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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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께 엽서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인상적인 풍광을 엽서로 만드셨을 테니 순례길의 감흥이 고스란히 담겨 아름답더라. 잠시나마 그곳을 상상해 봤다. 혼자거나 둘이거나 혹은 여러 발걸음이 모여 걷는 곳. 종교적인 깨달음도 좋고 사유에 목적을 두어도 좋고 혹은 성찰을 위하거나 감정을 달래기 위해 남겨진 이야기들은 다양한 모습이다. 그들에게 걷기란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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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
이 바보들의 세계 안에서는 걸으면서 생각하면서 버리면서 나아가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것이면 충분하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순간
📚 방태현 지음
📚 출판사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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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까? 해 볼까?’
토요일 4교시가 끝났다. 어느 초여름 못지않게 해는 뜨거웠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무언가 시도하기에 좋은 날이라며 재촉하는 듯하다. 그래! 걷지 뭐. 걸어 보지 뭐!
학교에서 집까지는 약 8km. 선선한 날이라면 고민을 덜 했겠지만, 이런 날씨에 서원 기도를 작정한다는 건 조금 고민스러운게 사실이다. 놀기 좋아하고 잠자기 좋아하는 고3. 입시를 앞두고 좀 더 단단한 다짐이 필요했던 시간, 문득 이 어려운 걷기를 해내고 나면 수능까지 남은 시간 무얼 해도 해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톨릭 학교를 다니는 내게 이 길은 순례길인 셈이니까. 그래! 걷지 뭐. 걸어 보지 뭐!
학교 운동장을 터벅 걸음으로 시작해 교문을 지날 때쯤, 시장 쪽으로 가서 군것질도 하고 버스를 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웃으며 넘겼다. 오거리 횡단 보도 앞이다. 신중하게 따져 본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면 집 도착 1km 남짓에 하나 있는 공중전화를 빼고는 도움을 청할 방법이 없다. (지나가는 차를 세우는 것 말고는)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걸을 수 있겠어?’
등하굣길 늘 버스를 타고 지나던 길이라 낯설진 않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은 새롭다. 이제 곡선 길 하나 걸었는데 무당집 뒤로 테니스장이 있었고, 저렇게 긴 지하도가 있는 줄은 몰랐다. 짧은 직선 코스로 접어드니 기찻길과 나란한 방향이다. 운치 있게 지나는 기차를 보면 손이라도 흔들 양이었는데 때마침 버스가 지나간다. 얼른 눈을 땅으로 돌렸다. 아는 녀석들이 날 보았을까. 뭐 어때. 난 내 의지를 실험하는 중이잖아. 아직은 걸을만 하다.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길가에 심겨 있는 덕에 한 번씩 그늘을 건네주거든.
어려운 코스다.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길인데 이곳은 제대로 된 인도(人道)가 없다. 줄지어 차가 온다면 아주 위험한 길이다. 아는 동네가 아니니 샛길 여부도 모른다. 물을 사람도 없다. 띄엄띄엄 있던 상가 몇 개도 지나쳐 버렸으니. 걷던 템포가 흐트러질까 빠른 결단을 내렸다. 계속 걷자.
착한 운전자들 덕분에 안전하게 내리막길까지 해결했다. 이제 남은 건 시원하게 뻗은 직선 구간. 그 끝에는 우리 동네가 있다. 그런데 말이지. 분명 눈에 보이는데, 난 열심히 걷는데, 그 거리가 쉽게 줄지 않는 이상 현상을 경험 중이다. 저것은 신기루인가. 헛것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먼지를 일으키고 버스가 지나간다. ‘어떻게, 다음 정류장에서 타..?’ 아니지, 아니지. 여기서 무너지면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잖아. 이 어려운 걷기를 마치면 밀린 학습도 해낼 거고, 대학에도 갈 수 있을 거라고! 발바닥이 아프다 못해 찢기는 기분이다. 걸터앉을 벤치는 커녕 나무 그늘도 없는 마지막 구간. 내 발엔 운동화 대신 검은 단화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안쓰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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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소녀는 목적을 두고 걸었다. 이 큰 어려움을 극복해 내면 작은 어려움들은 쉽게 해 낼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맞는 걸까? 그것으로 원하는 바를 이뤘으니, 그때는 맞는 것으로 치자. (결국 강단 없는 의지의 다른 양상이었을 뿐이란 걸 지금은 잘 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방멘 작가는 말한다.
“얼마나 더 울어야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는지 생각하다 결국은 그만둔다. 이 길을 걷는 동안 거창한 사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걸을 뿐이다.” (p.152)
우리가 에세이라고 부르는 장르는 프랑스어 ‘에세(Essais)'에서 왔다고 한다. 에세의 동사형 essayer는 ‘시도하다’라는 뜻이고. 방멘 작가가 전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순간>은 그가 시도한 걷기였고 그 안엔 쓴맛과 단맛, 절망과 환희, 눈물과 감동을 골고루 버무려 놓았다. 저자가 충분히 음미한 후에 쓴 책, 그러니까 ‘에세이’라 부르기에 딱 좋은 글이 아닐까 싶다.
독자에게 전하는 그의 여행은 무겁지 않다. 에피소드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인간적인 탓에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듯 보인다. 하지만 순간마다 머무는 생각은 결코 가벼이 스치는 문장으로만 볼 수도 없으니 순례길에 동참해 보고 싶은 이는 고민 없이 펼쳐 보길 권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순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사진이다. 때론 글과 어우러지고 때론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사진은 글이 다 전하지 못한 여행의 품을 느끼게 하고 동경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니까. 인상적인 사진에 매료될 준비, 시작! 허허허..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읽어낼 수 있는 책이지만 여행자로 함께 하고 싶다면 각 페이지를 천천히 넘겨도 좋겠다. 당신의 순례길 안에 담고 싶은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