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를 멈추게 한다면
장성남 지음 / 클래식북스(클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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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올 곳이 못 되는 곳들은 목적지를 신중히 예정하고 와야 할 일이다. 가려고 마음먹었던 곳을 지나치자니 어딘지 아쉽..이지만 맘이 동한 건 이유가 있을 거라며 토닥토닥. 더 좋든지 혹은 더 나쁘든지..

책방, <기억의 숲>. 낯선 배경에서 새로운 인물을 만났으니 이제 사건만 일어나면 된다. 내 여행의 이유. 걸음의 방향이 달라진 까닭.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 같아. 나를 멈추게 하는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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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솥에서 하얀 김이 오른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성이 잔뜩 난 할아버지의 귀밑머리를 닮은 것도 같다. 소녀는 혼자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 잠시 후면 할머니가 행주를 손에 들고 걸어가 한 다리를 부뚜막에 올려 세우고 거칠게 솥뚜껑을 열겠지. 뜨거운 김을 피하느라 잔뜩 찌푸린 미간이지만 쇠주걱으로 밥을 골고루 터는 모습은 매번 인상적이다. 그림책에서 본 여전사 같다는 생각에 또 웃음이 난다. 짧은 상상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큰 솥에 가득하던 밥을 다 덜어내셨다.

지금이다! 제일 먼저 할머니 곁으로 가야 해. 밥을 털 때보다 더 힘을 들여 누룽지를 긁어내는 타이밍. 얼마나 잘 눌었는지,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일단 달려가는 소녀에게 할머니는 당신의 주먹만 한 크기로 만든 누룽지를 건네주셨다. 밥 한 그릇 안 나와도 좋으니 어린 것들을 위해 누룽지를 만드셨겠지. 아마도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들에게 같은 크기로 만들어 주셨을 테지만 먼저 달려가 “많이 주세요”를 외치면 더 크게 만들어 주실 것 같아 밥때가 되면 소녀는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세상 맛있는 간식을 기대하며.

남은 밥을 프라이팬에 올렸다. 주걱으로 얇게 펴 누르고 정성스럽게 가스레인지의 불 세기를 조절해 가며 눌려 만든 누룽지는 어째 그 맛을 낼 수가 없다. 알면서도 매번 같은 기억을 꺼내며 만드는 누룽지다. 할머니의 부엌에 관한 기억이 생생하다. 북적대는 시장에서 살던 소녀는 ‘놀이’를 찾아서 놀아야 했던 할머니 집에 가는 날이 마냥 즐거웠다. 할머니 부엌에서 꺼낼 이야기는 누룽지 말고도 많았으니까.

중학교 2학년이 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 댁으로 이사를 갈 거라고 한다. 어떻게 그런 시골집에 사냐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가마솥 누룽지를 즐기던 소녀는 사춘기가 시작될 만큼 자랐다. 다행히 이사 전에 할머니 집은 큰 성형을 거쳤다. 대문부터 어색해진 공간. 그중에서 제일 낯선 건 커다란 까만 솥이 있던 '부뚜막 부엌' 대신 싱크대가 놓이고 가스레인지가 자리잡은 '키친'이었다. 일찍 장사하러 나가는 엄마를 대신해 매일 같이 손맛을 보여주시는 할머니는 사춘기 소녀에게 귀인이었다. 어디 아침뿐이랴. 할머니는 때때로 손녀들이 원하는 간식을 당신의 솜씨대로 뚝딱 만들어 내셨다. 어느 주말 점심,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막내 손녀딸의 요청에 할머니는 프라이팬을 꺼내고 냉장고를 여닫으며 바삐 움직이시더니 깔깔거리며 보던 재방송 개그 프로가 반도 안 지났는데 그새 부르신다. 이게 뭐예요? 내가 알던 떡볶이가 아니다. 고추장소스를 묻혀 먹는 국물 떡복이가 아니다. 그러잖아도 까만 프라이팬 바닥인데 검붉은 소스로 끈적하게 눌어 붙은 떡들은 낯설기만 했다. 떡 위로 깨가 성글게 묻어 있는 걸 보니 나름 맛있게 보여 주고 싶었던 할머니의 마음이 읽혔다. 비주얼은 손대고 싶지 않았지만 매콤달콤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는 눈을 이기지 못했다. 역시..!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건 기름떡볶이란 걸.

가끔 들릴 때는 몰랐던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가 함께 살면서 조금 불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할 때쯤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엄마. 할머니와 마주치는 시간은 그게 다였다. 하루에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 대화가 썩 부드럽지 않다는 건 사춘기를 지나 성숙의 단계에 들어선 소녀도 알 만한 장면이다. 왜 다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건지 엄마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고, 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짧게 말하는 건지 할머니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불똥 튈 일은 없었으니 이해되지 않은 두 여자 어른의 모습을 보는 채로 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타지에 살면서 더 뜸하게 시골집을 찾았다.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는 정도였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다정했다. 특히나 매해 정월대보름을 앞두고는 잊지 않고 전화를 하셨다. 막내 손녀딸의 생일인데 오곡밥에 나물을 못 해줘 속상하시다고. 그런 기억이 많다. 할머니는 늘 손녀딸들을 사랑해 주셨다.

여느 날처럼 언니와 저녁을 먹고 믹스 커피 한 잔을 타 TV를 보고 있었다. 엄마에게 걸려 온 전화라며 언니는 방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통화하고 난 뒤 나오는 언니는 한숨부터 내쉰다. 엄마의 래퍼토리가 또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나보다 세 살 많은 언니는 일찍부터 철이 든 이유로 엄마와 얘기를 자주 나눴다. 성인이 된 지금은 그 이야기의 양도 스토리도 다양해졌겠지. 그 중 매번 반복적인 이야기가 있단다. 내가 들은 엄마의 첫 시집살이. 애정 많던 할머니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기억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부모님을 보려면 시장으로 가면 되는 일이다. 굳이 할머니 집으로 갈 이유가 없다. 어느새 엄마의 시집살이 스토리는 내 기억에 레벨별로 쌓이며 할머니와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게 했고 어느새 나도 그 시월드를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 시댁과 작은 마찰이 있어 속상하던 터라 엄마를 찾은 김에 밀린 애기를 나눴다. 잘 들어주는 시늉을 하던 엄마는 그건 일도 아니라며 엄마의 이야기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늘 들었던 얘기 같은 다른 이야기. 대체 엄마가 속에 쌓아 둔 얘기를 다 풀면 높이가 어디까지 될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 대신 우린 여자니까. 시댁이라는 공통의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새 엄마의 감정에 나도 동화가 돼버렸다. 내가 결혼한 나이보다 열 한 살이나 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엄마에게 정없이 굴었던 할머니가 미웠다. 입밖으로 감정을 말해버렸다. 엄마는 여전히 아파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나쁜 감정이 든 딸에게, 말이 거칠어지는 딸에게 엄마는 얘기하신다. “너희는 그럴 것 없다. 할머니는 너희한테 잘 하시니. 이건 엄마 일이다.”

감정 위에 이성을 얹는 엄마. 지독한 시집살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엄마의 성품이었다. 할머니의 사랑도 감사하고 자랑할 만한 일이지만 그런 엄마를 바라보고 자란 덕일까. 며느리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딸에게는 이날의 기억은 모범 답안지가 되어 지금껏 적잖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받고 싶은 엄마의 성정. 딸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조금씩 이해하고 닮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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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
어린 시절 기억쓰기는 세상 밖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 내면 여행이다.

너무나 힘들었을 유년 시절부터 감당하기 버거웠을 두 번의 결혼, 평탄치 않은 가정생활까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리얼리티 자전적 에세이를 누가 용기만으로 감히 써낼 수 있을까. 장성남 작가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의 글을 읽고 남은 건 동정하는 마음이거나, 글의 결말에 대한 의심의 여지였겠지 싶다.

내가 만난 작가의 미소는 평온했다. 작은 체구에서 전해지는 온기. 낯선 이에게 보내는 미소는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레 흐르는 어린아이의 순수를 닮은 듯했고.


📖 173
어린 시절 기억쓰기는 오랜 세월.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눈물조차 참아 왔던 내가 나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위로였다. 어린 시절 엄마 품에서 마음껏 쏟지 못했던 눈물을 모두 쏟았다. 어린 내가 흘린 눈물을 어른이 된 내가 닦아주었다. 흐느끼며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햇살보다 더 포근한 손길은 마법 같았다. 무거운 어깨가 홀가분해지고, 텅 빈 마음이 조금씩 채워졌다. 마음의 성장이 멈춰버린 나에게 내가 건네는 최초의 악수였다.

<기억이 나를 멈추게 한다면>
그녀가 이렇게도 긴 이야기를 통해 보여 주고 싶었던 건 어린 시절 기억 쓰기로 마음의 풍경을 바꾼 자신이 아니었을까. 모양새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어딘가에 남은 쓰라린 생채기들을 가진 당신이라면 공감하고 나눌 준비가 되었을 거라며 기대하며.


📖 253
우리는 저마다의 어린 시절을 간직하고 있다. 기억 속에 어린 시절이 숨바꼭질하고 있다. 기억의 숲에서 술래잡기하고 있을 그 아이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이제 당신이 어린 시절 기억쓰기를 시작할 차례다.

마음을 위한 셀프 테라피.
작은 시도가 필요한 당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책 여기.
<기억이 나를 멈추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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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푸바오 시점 - 판다월드의 작은할부지 송바오가 전하는 푸바오의 뚠빵한 하루
송영관 지음, 송영관.류정훈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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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요즘 푸바오 관련 책을 읽는데
너무 재미있어!
귀여운 건 말할 것도 없고
푸바오 시점으로 쓴 글이 은근 감동도 있더라고!

/ 넌 이제 본 거냐? 난 너튜브 구독자다!
ㅋㅋㅋㅋㅋㅋ


24시간이 모자랄만큼 바쁘게 사는 A씨도 푸바오 너튜브를 구독중이었고 이미 녀석의 매력에 빠져 있었네요! 아무리 바빠도 귀여운 건 못 참는 모양이에요~

요즘 그런 분들 많으시죠? 세상 무해한 영상 찾아보시는 분들이요. 그 중에서도 단연 푸바오의 채널이 상위권에 있지 않을까 싶은대요. 영상은 생생한 움직임으로 즐거움을 더할 테니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게 사실이에요. 그렇담 같은 주인공 푸바오를 다룬 글은 어떨까요?

오늘 소개해 드릴 <전지적 푸바오 시점>은요!
엄마 판다 아이바오와 아빠 판다 러바오가 푸바오를 바라 보는 마음이 담겨 있고요~ 푸바오가 태어나면서부터 자라는 과정 동안 품은 마음들이 차곡차곡 적혀 있어요. 또 작은할부지 송바오가 푸바오에게 전하는 마음과 독자들에게 전하는 마음까지요.

네네~ <전지적 푸바오 시점> 안에는 판다월드의 모든 마음이 담겨져 있는 셈이에요. 독자들은 글로 전달된 상황을 그려 보며 영상과는 차원이 다른 감동을 느끼실 수 있는 거고요~ 자, 그러면 제가 쪼끔만 보여 드릴게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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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적 푸바오 시점
📚 송영관 글/ 류정훈 사진
📚 위즈덤하우스

20년차 사육사이자 푸바오의 영원한 작은할부지 ‘송바오’ 송영관 작가는 판다들의 매력 넘치는 일상을 글로 전하고자 늦은 나이에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글쓰기를 공부했다. 푸바오를 향한 애정에 보답하고, 푸바오와 판다월드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전지적 푸바오 시점』을 출간! 260컷이 넘는 사진과 미공개 에피소드, 송바오의 에세이와 미공개 편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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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푸바오 시점>은 말이죠. 정말 정말 귀여운 사진들에 웃음이 새어나와요. 만약 사진 뿐인 책이라면 웃다 넘기며 페이지가 끝날텐데 이 책엔 웃음 이상의 따뜻함이 묻어나는 글이 함께 있어요. 작은할부지 송바오님이 쓰신 글 아니고 진짜로 푸바오가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을만큼 사진과 글이 찰떡이고요~~

어린 푸바오가 보고 느끼는 만큼의 이야기는 마치 어린 아이의 시점같이 어딘지 순수하고 엉뚱한 구석이 있지만.. 철없이 귀엽기만 할 것 같은 푸바오가 엄마와 교감하는 글들은 가슴 뭉클.. 특히나 이층침대 시리즈 1~5는 전문을 꼭 읽어 보시길요.! 울컥주의ㅎㅎㅎㅎ

이렇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전지적 푸바오 시점>은
역시 송바오님 덕분이지 싶어요. 이야기를 적을만큼 얼마나 많은 시간 판다월드 가족들을 보았을까요. 녀석들의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또 얼마나 많은 의미를 찾으셨을까요. 반려견을 오래 키운 지인분께서는 어느 날 눈이 마주친 녀석이 꼭 무슨 얘기를 할 것만 같았다고 하시더군요. 푸바오가 태어나서 이만큼 자라기까지 함께한 시간이라면 어쩌면 이심전심은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지금껏 읽은 책들 중에 힐링도서란 해시태그를 적었던 책이 몇 권 있었어요. 그림책 속 캐릭터 때문이거나 순수하고 서정적인 내용일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전지적 푸바오 시점>은 둘 다에 해당하니 당연히 힐링도서! 거기에 추천이란 말을 자신 있게 덧붙여 봅니다.

무해한 등장 인물, 아니 등장 판다 푸바오가 많은 이들에게 무장해제 웃음을 준 이야기들과 가슴 뭉클한 이야기! 판다월드의 흥미진진 처음 이야기부터 곧 끝을 향해 가는 푸바오의 이야기까지! 궁금하시다면 허리 업~ 어쩌면 우리 일상과 참 많이 닮아 있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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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 살아서 꽃피지 않는 영혼은 없다
박범신 지음, 성호은 일러스트 / 시월의책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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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만 알고 그의 글을 읽겠다고 덤볐다가
그의 책 앞에서 왜소해지는 절 보았습니다.
이십여 쪽을 읽다가 책을 덮었습니다.
물론 여기까지 읽는 동안도 몇 번을 멈추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는지 셀 수가 없었죠.
이만큼만으로도 작은 독자는 감격스러웠습니다.
손꼽아 자랑할 만한 작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작가로서의 나의 삶은 아직도 분별없이 현재진행형이다.
날마다 고통스럽고 날마다 황홀하다.”

그의 글을 더 가까이 두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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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링 _ 살아서 꽃피지 않는 영혼은 없다
📚 박범신 지음
📚 시월의책

『힐링』은 영화 ‘은교’의 원작자이자 지난 50여년 간 수많은 베스트셀러와 화제작을 쓴 박범신 작가가 충남 논산에 머물면서 3년간 SNS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였던 글을 모은 책을 개정하여 새롭게 개정한 것이다. 서양화가인 성호은 작가의 일러스트를 감상하는 맛도 함께 즐겨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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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안에는 시 같은 짧은 문장들과 산문 같은 긴 문장들이 섞여 있어 글의 형식적 종류를 무엇이라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짧고 긴 것이 조화롭게 보입니다. 게다가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문학과 일상, 사회와 인생 등 다양했습니다. 아마도 형식이든 내용이든 저자의 문장력이 나머지 것들을 잘 버무렸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아는 것이 적은 자가 굳이 무언가 찾아내겠다고 어설피 시비를 걸려다 제대로 머리를 숙인 셈입니다.

박범신 에세이 <힐링>은 하나의 내용으로 정리하기가 어려운 책입니다. 소설이라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스토리가 일관되게 진행될 텐데 <힐링>은 트위터에 썼던 짧은 단상들을 적었던 글을 모아 그런지 같은 장으로 묶여 있지만 이것이 연결되는 건가 싶은 구간이 있습니다. 다행히 이 책은 에세이니까 어쩌면 생각들의 자유로운 배치가 당연할 수도 있겠구나 싶더군요. 무엇보다 그의 문장은 힘이 있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힘이 있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요. 강한 문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장의 성향에 따라, 다시 말하자면 사랑이나, 인생, 사회나 일상 등의 주제로 각각 이야기를 전할 때 유했다가 강했다가, 실실 웃음 나게 하다 눈물 나게 했다 읽는 이에게 다가오는 전달력에 힘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더군다나 양적인 부담 없이 페이지마다 여백의 미가 가득한 책이기 때문에 문장과 문장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에서 충분히 여운을 느끼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문학이라는 불치병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작가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독자에게는 잘된 일입니다. 그가 문장과 고군분투한 결과는 페이지마다 쉽게 넘기지 못하는 감동스런 책읽기 시간을 갖게 해 줄 테니까요.

“흐르고 머무니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박범신에세이 <힐링> 그래서 추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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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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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혼식이 열렸어야 했던 날,
형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해 가을, 나는 다니던 《뉴요커》를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한동안은 고요하게 서 있고 싶었다”


상실..
고요..
두 단어만으로 이 책을 집어들기에 충분했다.


** p.164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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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일상]

69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 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선망 받는 《뉴요커》에 입사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고층 사무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배려심 깊던 형 톰이 젊은 나이에 시한부 암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65
내 기억 속에 그 미술관은 쥐죽은듯 고요해서 조각상들이 방금 누군가가 던진 마법에 걸린 듯 보였다. 너무 조용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창백한 색깔이 돌 바닥에 올리는 우리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릴 적 엄마와 형과 함께 갔던 미술관을 기억해 내고 그런 곳이라면 그의 슬픔이 잠시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슬픈 도피를 시작한다.



[연대속에서 회복하기]

175
그는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 하고 톡으로 돌아가서 승승장구한 끝에 한 대형 은행의 ‘넘버 쓰리 맨’이 되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부패 거래를 막으려다 권력자들을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다 사건이 하나 터졌고 1990년대 초반부터 망명자 신분으로 뉴욕에서 살게 되었다.

암살 위협을 겪고 미국으로 망명한 이민자 출신의 동료, 보험회사에서 일했던 동료, 문학가로서 등단을 꿈꾸는 동료, 벵골만에서 구축함을 지휘했던 동료,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동료 등 그야말로 다채로운 출신과 배경을 지닌 이들.

푸른 제복 아래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동료들과 작지만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무심한 듯 격려하고, 함께 편견에 맞서는 과정에서 저자는 엇나갔던 삶의 리듬이 조금씩 맞춰지는 것을 느낀다.



[함께 숨쉬던 작품들로 회복하기]

‘세계 3대 미술관’이라 불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7만 평의 공간, 300만 점의 작품, 연 700만 명의 관람객을 자랑하는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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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 만큼 강렬한 환영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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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후 수업 그룹은 떠나고 나는 아프리카 미술 전시관에 홀로 남겨진다. 월요일에는 근무자들이 더 띄엄띄엄 배치되기 때문에 완전히 혼자다. 전시관을 탐험할 기회인 셈이다.

292
사랑과 경건함 그리고 기진맥진한 몸과 마음을 표현한 그 소묘들을 다시 바라본다.


매일 배치 받는 구역에서 새로운 작품들은 만난다. 고요히 바라 보며 다시 한 번 섬세한 표현들을 감각해 본다. 작품들에는 인생과 역사, 고통과 기쁨 등 저자의 슬픔과 견줄만한 것과 그 이상의 것들이 날마다 함께 숨을 쉬고 있다.

신을 향한 비난이 담긴 문장, 초상화에서 발견한 침울함. 저자는 자신이 고민하던 몇 가지 질문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가 이곳에서 바라 보고 느낀 10년. 경이로운 세계속에 둘러싸인 시간은 그에게 충분한 회복이 되었고 다시 일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마련해 주었다.


305
성년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여정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추구하던 성장과 변화를 마무리 짓는 최종 목적지 같은 시기라 생각하는 쪽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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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상과 인문학을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지적인 책을 읽었습니다. 그의 사고와 문장력에 박수를 보냈는데 이번 책은 거장들의 작품을 보여주는 지적인 책이라니 제가 읽을 복이 많나 봅니다. 물론 미술관 이야기 그 이전엔 상실을 경험한 이의 이야기가 있지만요..

누구나 예기치 못한 인생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무너져 내리는 대신 엄마와 형과 함께한 기억에서 기인한 아름다운 도피처를 선택한 그의 걸음이 다행스러워요. 덕분에 만난 그의 이야기 길은 독자에게 참 고마운 일이고요.

이 책을 읽고 나서 누군가는 미술관의 경비원을 지원하고 싶은 맘이 들 수도 있겠죠? 누군가는 가까운 미술관을 방문해 자신의 고민을 나눌만한 작품을 만날 수도 있을 테고요. 무엇이든 우리에게 회복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니 듭니다. 예상치 못한 상실과 아픔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회복의 시간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나아가야 할 발걸음이 멈춰버린 이들,
소란한 세상에 지쳐 완벽한 고독을 꿈꾸는 이들에게
잔잔하지만 묵직한 사색의 시간을 선사한다.”
- 출판사 서평 중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고요한 회복의 시간이 필요한 당신에게 추천해 봅니다.
시공간을 넘어선 사람과 예술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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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틈에 빛이 든다 - 책에서 길어올린 생각의 조각들
류대성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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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매력적이다.
손을 뻗지 않을 수가 없어.
표지 가득 나른한 볕에 드리운 그림자는
몽롱한 상상으로 이끌고
빛이 든 생각의 조각들은 어떤 모양새로 보여질지
열기도 전에 두근두근.


몰랐다. 이렇게 지적인 글인 줄.
선택 / 속도 / 공존 / 시선 / 시간 / 성장
선택한 주제들을 안내하기 위한 단어와 문장은
문학과 사회, 철학과 과학 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 사이의 개념들까지 소환했다.
얼마나 많은 글을 접했을까.
얼마나 많은 생각을 담아뒀을까.
문득 저자의 그릇이 궁금해진다.


간간이 드러나는 감성 문장에 페이지를 멈추고
읽는이는 공감의 뜻으로 작게 읊조려 본다.
예쁘다. 내가 잡은 문장들이.
이런 글은 참 많이 배우고 싶은 욕심 나는 글이야.
선택한 이에게 충분히 그 멋을 선물할 책 여기.
류대성, <모든 틈에 빛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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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틈에 빛이 든다
** 류대성 지음
** 초록비책공방

류대성 작가는 자신이 책장의 모서리를 접어 마음에 담아둔 문장이 인생이라는 실전에 쓰일 수 있는 무기가 되도록 인문학 개념이 지식이나 교양이 아니라 실제 삶의 고민을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익숙하지만 의미는 낯선 개념, 사회 안팎에 떠도는 용어, 여러 인문학 지식을 엮어 독자의 인문학적 도움닫기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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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연필을 들고 밑줄을 긋거나
누군가는 색색이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두거나
누군가는 페이지 모서리를 살짝 접어 두거나
책에는 표시 없이
다른 공간을 빌려 적어 두거나 사진을 찍거나


맘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고
조금 더 의미를 두고 싶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나요?
그렇게 찾은 문장들을 언제 꺼내 보시나요?


저자는 책을 읽으며 메모 하거나 접어둔 문장들을
고스란히 저장만 해 두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접목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감성적으로 풀어 내기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저자의 시선으로 연결된 단어와 (분야별) 개념과
우리 삶에 맞닿은 고민들이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순서에 맞춰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저자의 의도는
책에서 위로를 받거나 길을 찾는 누군가에게
딱 필요한 당부가 될 듯 합니다.
한 권을 다 읽어야 의도한 바가 읽히는 책이라면
힘든 현실에서 손에 들 엄두가 나지 않을 테니까요.
유난히 맘에 가는 주제가 있다면
당신의 삶에 조율이 필요한 부분일지 모르니
천천히 읽어내시면 좋겠습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요.


부디
당신이 머문 일상의 틈에도
빛이 드는 순간이 찾아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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