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를 멈추게 한다면
장성남 지음 / 클래식북스(클북)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자주 올 곳이 못 되는 곳들은 목적지를 신중히 예정하고 와야 할 일이다. 가려고 마음먹었던 곳을 지나치자니 어딘지 아쉽..이지만 맘이 동한 건 이유가 있을 거라며 토닥토닥. 더 좋든지 혹은 더 나쁘든지..

책방, <기억의 숲>. 낯선 배경에서 새로운 인물을 만났으니 이제 사건만 일어나면 된다. 내 여행의 이유. 걸음의 방향이 달라진 까닭.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 같아. 나를 멈추게 하는 기억이..

:

검은 솥에서 하얀 김이 오른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성이 잔뜩 난 할아버지의 귀밑머리를 닮은 것도 같다. 소녀는 혼자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 잠시 후면 할머니가 행주를 손에 들고 걸어가 한 다리를 부뚜막에 올려 세우고 거칠게 솥뚜껑을 열겠지. 뜨거운 김을 피하느라 잔뜩 찌푸린 미간이지만 쇠주걱으로 밥을 골고루 터는 모습은 매번 인상적이다. 그림책에서 본 여전사 같다는 생각에 또 웃음이 난다. 짧은 상상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큰 솥에 가득하던 밥을 다 덜어내셨다.

지금이다! 제일 먼저 할머니 곁으로 가야 해. 밥을 털 때보다 더 힘을 들여 누룽지를 긁어내는 타이밍. 얼마나 잘 눌었는지,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일단 달려가는 소녀에게 할머니는 당신의 주먹만 한 크기로 만든 누룽지를 건네주셨다. 밥 한 그릇 안 나와도 좋으니 어린 것들을 위해 누룽지를 만드셨겠지. 아마도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들에게 같은 크기로 만들어 주셨을 테지만 먼저 달려가 “많이 주세요”를 외치면 더 크게 만들어 주실 것 같아 밥때가 되면 소녀는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세상 맛있는 간식을 기대하며.

남은 밥을 프라이팬에 올렸다. 주걱으로 얇게 펴 누르고 정성스럽게 가스레인지의 불 세기를 조절해 가며 눌려 만든 누룽지는 어째 그 맛을 낼 수가 없다. 알면서도 매번 같은 기억을 꺼내며 만드는 누룽지다. 할머니의 부엌에 관한 기억이 생생하다. 북적대는 시장에서 살던 소녀는 ‘놀이’를 찾아서 놀아야 했던 할머니 집에 가는 날이 마냥 즐거웠다. 할머니 부엌에서 꺼낼 이야기는 누룽지 말고도 많았으니까.

중학교 2학년이 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 댁으로 이사를 갈 거라고 한다. 어떻게 그런 시골집에 사냐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가마솥 누룽지를 즐기던 소녀는 사춘기가 시작될 만큼 자랐다. 다행히 이사 전에 할머니 집은 큰 성형을 거쳤다. 대문부터 어색해진 공간. 그중에서 제일 낯선 건 커다란 까만 솥이 있던 '부뚜막 부엌' 대신 싱크대가 놓이고 가스레인지가 자리잡은 '키친'이었다. 일찍 장사하러 나가는 엄마를 대신해 매일 같이 손맛을 보여주시는 할머니는 사춘기 소녀에게 귀인이었다. 어디 아침뿐이랴. 할머니는 때때로 손녀들이 원하는 간식을 당신의 솜씨대로 뚝딱 만들어 내셨다. 어느 주말 점심,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막내 손녀딸의 요청에 할머니는 프라이팬을 꺼내고 냉장고를 여닫으며 바삐 움직이시더니 깔깔거리며 보던 재방송 개그 프로가 반도 안 지났는데 그새 부르신다. 이게 뭐예요? 내가 알던 떡볶이가 아니다. 고추장소스를 묻혀 먹는 국물 떡복이가 아니다. 그러잖아도 까만 프라이팬 바닥인데 검붉은 소스로 끈적하게 눌어 붙은 떡들은 낯설기만 했다. 떡 위로 깨가 성글게 묻어 있는 걸 보니 나름 맛있게 보여 주고 싶었던 할머니의 마음이 읽혔다. 비주얼은 손대고 싶지 않았지만 매콤달콤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는 눈을 이기지 못했다. 역시..!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건 기름떡볶이란 걸.

가끔 들릴 때는 몰랐던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가 함께 살면서 조금 불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할 때쯤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엄마. 할머니와 마주치는 시간은 그게 다였다. 하루에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 대화가 썩 부드럽지 않다는 건 사춘기를 지나 성숙의 단계에 들어선 소녀도 알 만한 장면이다. 왜 다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건지 엄마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고, 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짧게 말하는 건지 할머니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불똥 튈 일은 없었으니 이해되지 않은 두 여자 어른의 모습을 보는 채로 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타지에 살면서 더 뜸하게 시골집을 찾았다.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는 정도였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다정했다. 특히나 매해 정월대보름을 앞두고는 잊지 않고 전화를 하셨다. 막내 손녀딸의 생일인데 오곡밥에 나물을 못 해줘 속상하시다고. 그런 기억이 많다. 할머니는 늘 손녀딸들을 사랑해 주셨다.

여느 날처럼 언니와 저녁을 먹고 믹스 커피 한 잔을 타 TV를 보고 있었다. 엄마에게 걸려 온 전화라며 언니는 방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통화하고 난 뒤 나오는 언니는 한숨부터 내쉰다. 엄마의 래퍼토리가 또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나보다 세 살 많은 언니는 일찍부터 철이 든 이유로 엄마와 얘기를 자주 나눴다. 성인이 된 지금은 그 이야기의 양도 스토리도 다양해졌겠지. 그 중 매번 반복적인 이야기가 있단다. 내가 들은 엄마의 첫 시집살이. 애정 많던 할머니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기억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부모님을 보려면 시장으로 가면 되는 일이다. 굳이 할머니 집으로 갈 이유가 없다. 어느새 엄마의 시집살이 스토리는 내 기억에 레벨별로 쌓이며 할머니와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게 했고 어느새 나도 그 시월드를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 시댁과 작은 마찰이 있어 속상하던 터라 엄마를 찾은 김에 밀린 애기를 나눴다. 잘 들어주는 시늉을 하던 엄마는 그건 일도 아니라며 엄마의 이야기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늘 들었던 얘기 같은 다른 이야기. 대체 엄마가 속에 쌓아 둔 얘기를 다 풀면 높이가 어디까지 될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 대신 우린 여자니까. 시댁이라는 공통의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새 엄마의 감정에 나도 동화가 돼버렸다. 내가 결혼한 나이보다 열 한 살이나 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엄마에게 정없이 굴었던 할머니가 미웠다. 입밖으로 감정을 말해버렸다. 엄마는 여전히 아파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나쁜 감정이 든 딸에게, 말이 거칠어지는 딸에게 엄마는 얘기하신다. “너희는 그럴 것 없다. 할머니는 너희한테 잘 하시니. 이건 엄마 일이다.”

감정 위에 이성을 얹는 엄마. 지독한 시집살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엄마의 성품이었다. 할머니의 사랑도 감사하고 자랑할 만한 일이지만 그런 엄마를 바라보고 자란 덕일까. 며느리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딸에게는 이날의 기억은 모범 답안지가 되어 지금껏 적잖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받고 싶은 엄마의 성정. 딸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조금씩 이해하고 닮아가는 중이다.

:

📖 186
어린 시절 기억쓰기는 세상 밖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 내면 여행이다.

너무나 힘들었을 유년 시절부터 감당하기 버거웠을 두 번의 결혼, 평탄치 않은 가정생활까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리얼리티 자전적 에세이를 누가 용기만으로 감히 써낼 수 있을까. 장성남 작가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의 글을 읽고 남은 건 동정하는 마음이거나, 글의 결말에 대한 의심의 여지였겠지 싶다.

내가 만난 작가의 미소는 평온했다. 작은 체구에서 전해지는 온기. 낯선 이에게 보내는 미소는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레 흐르는 어린아이의 순수를 닮은 듯했고.


📖 173
어린 시절 기억쓰기는 오랜 세월.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눈물조차 참아 왔던 내가 나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위로였다. 어린 시절 엄마 품에서 마음껏 쏟지 못했던 눈물을 모두 쏟았다. 어린 내가 흘린 눈물을 어른이 된 내가 닦아주었다. 흐느끼며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햇살보다 더 포근한 손길은 마법 같았다. 무거운 어깨가 홀가분해지고, 텅 빈 마음이 조금씩 채워졌다. 마음의 성장이 멈춰버린 나에게 내가 건네는 최초의 악수였다.

<기억이 나를 멈추게 한다면>
그녀가 이렇게도 긴 이야기를 통해 보여 주고 싶었던 건 어린 시절 기억 쓰기로 마음의 풍경을 바꾼 자신이 아니었을까. 모양새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어딘가에 남은 쓰라린 생채기들을 가진 당신이라면 공감하고 나눌 준비가 되었을 거라며 기대하며.


📖 253
우리는 저마다의 어린 시절을 간직하고 있다. 기억 속에 어린 시절이 숨바꼭질하고 있다. 기억의 숲에서 술래잡기하고 있을 그 아이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이제 당신이 어린 시절 기억쓰기를 시작할 차례다.

마음을 위한 셀프 테라피.
작은 시도가 필요한 당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책 여기.
<기억이 나를 멈추게 한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