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모든 일상은 반복된다. 즐거웠던 일들도, 슬펐던 일들도 무력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저그런 흑백사진처럼 멀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모든 게 끝나버리면 더이상 슬퍼할 이유도, 아파할 시간도 사라져 버린다. 습관적으로 멍해지던 때가 있었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 물러나고 싶었다. 그렇게 살면 나는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내 속에 고인 눈물을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일부러 들리는 말들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래요?" 하고 모르는 척 넘겨 버리기 일쑤였다. 모르는 척, 안 들리는 척, 못 알아듣는 척. 그런 척.척.척들은 나를 아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내 주위를 단단한 유리벽을 쳐놓았던 세계를 깨게 된 건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내 존재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만 같은 위협을 느끼게 됐던 거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고, 자신들이 지닌 날카로운 것들로 지독하게 들쑤셔 나를 상처입혔다. 그건 오랫동안 묵혀뒀던 내 상처이기도 했고, 그들의 상처이기도 했다.
이영호.
그를 통해 잊고 있던 내 상처를 만났다.
생명보험회사 심사팀에 근무하는 서른 둘의 영호는 암판정을 받은 마흔 살의 채연을 만난다. 이유랄 것도 없이 이끌림에 의해 그녀를 보기 위해 자주 병원에 다니게 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결혼하기로 한다. 채연에겐 열세 살의 아들이 있다. 아들 샘을 데려오기 위해 채연은 결혼을 선택하고, 영호는 동의한다. 모든 것들이 순조롭고 순탄해보였다. 하지만 문제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영호에게만 말문을 닫아버린 샘. 암치료로 정신없는 채연. 보험금을 타기 위해 아이의 팔을 부러뜨려버리는 윤필. 그것을 그냥 못 보고 지나치는 안.
영호에겐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일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툭툭 불거져 나오자 방황하고 헤맨다. 해결해야 할 방법은 찾아지지 않던 어느 날, 샘의 유일한 취미가 텔레비전 시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채널검색을 해보았다. '변신왕 체인지킹'이라는 특촬물만을 연속해서 보는 샘.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영호와 샘은 여전히 침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변신왕 체인지킹을 매개로 샘과 가까워지고 싶은 시도를 하던 중 만나게 된 라이더레인저라는 닉넴을 쓰는 민. 민은 몇 년째 바깥에 나오지 않고 칩거중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민과 끊어질 듯 말듯한 대화들이 이어지고 그 속에서 영호는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자살한 안의 아들과 닮았다는 영호. 안은 아버지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걸 잠자코 바라볼 순 없었다. 안은 윤필의 가정사를 자극하고, 그에 화가 치민 윤필은 가위로 안의 어깨를 찌른다. 그 사건은 영호를 변하게 한다.
아버지가 없는 세대의 마지막 생존자. 체인지킹의 후예가 될 것인가.
그 대를 끊어버리고 진정한 아버지가 될 것인가.
모든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영호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과 용기가 영호의 아픔을 덜해주는 것도, 두려움을 가시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제야 이 아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아이는, 그러니까, 겁을 먹고 있었던 거다. 나처럼,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고, 변한 환경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제대로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겁을 먹어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387
얼마 전, 고민을 얘기하는 TV 프로그램에서 말문을 닫아버린 아버지와 아들이 나왔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아이의 실수를 그냥 넘겨 버리지 못하고 화가 난 나머지 때렸는데 심각하게 다쳐서 그날 이후로 십 년이 다 되어 가도록 서로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군대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고, 그 관계의 골이 깊어져 아들은 이대로 사는 것이- 서로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 이제는 편해졌고 곧 군대도 가기 때문에 더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화라는 것이 그랬다. 한 번 말문을 닫아버리면 그 다음은 더 힘들어진다. 시간이 흘러 버리면 그것에 익숙해져 버리고 더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그냥 흐르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마음은 모른 채 각자의 마음 속에 상처들만 더 곪아터지게 된다.
작가는 아버지가 없는 세대들이 어떻게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실제로 아버지가 없는 세대들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어도 대화와 소통이 부재된, 윽박지름만이 난무한 상처입은 세대들에게 어떻게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민을 가리키며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절대로 체인지킹의 후예 같은 건 되지 않을 거다. 그 아이도, 샘도 마찬가지야. 나는 결코 그애를 아버지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거다. 내가."
함부로 올리지 못했던 말이 목구멍에서 끓었다. 나는 입을 열고,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될 거다."
말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하지만 가슴은 더할나위없이 후련했다. -338
샘의 아버지가 될 거라고 선택한 영호의 외침. 이것이 바로 그 질문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샘과 마주하고 밥을 먹으며 자신의 진심을 얘기하는 장면을 보고 나는 울컥 울고 말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소박하게 함께 밥 먹으며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 서로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그로인해 정말로 행복해지는 것.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댈 언덕,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 아버지가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이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 말문을 닫아버린다해도. 그건 사랑의 다른 형태일 뿐.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주기를, 단단히 만들어놓았던 유리벽을 녹여 내 속으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대화와 소통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내 속에 깊숙히 박아두었던 상처들을 꺼내어보고 실컷 울기도 했다.
아, 나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변신!" 하고 외치고 싶다.
"변신!"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