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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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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첫 장에 쓰여진 파우스트와 메피스토의 대화가 강인하게 나를 이끌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믿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의 대한 모든 압축이 그 대화에 응집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피스토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도다.

우리가 영원히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곳.

지옥은 경계도 없고 정해진 자리도 없으니

우리 자신이라는 장소, 우리가 있는 곳이 지옥이라."  

 

사건의 시작은 대구의 한 호텔에서 일어났다. 알 수 없는 의문의 살인사건. 그것을 맡은 담당 수사관 김호는 사건 현장에서 여러가지 조작의 흔적을 찾기에 착수한다. 그 흔적을 찾느 과정에서 보통 사람보다 열 배 이상의 지능을 가진 강화인간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범국가적인 조직 공생당이 그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된다.


강화인간들에 대한 연쇄 테러에서 심각한 위험을 감지한 안준경은 살인범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죽은 이유진이 만들어낸 최면 세계 인페르노 나인(지옥 9층)으로 내려간다. 인페르노 나인의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반란군의 혁명을 이끌게 되고…. 그러나 이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인페르노를 파괴하지 않고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지옥의 설계도'가 필요하다. 

 

김호는 이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아끼는 딸이 유괴되는 괴로움을 당하고, 그 사이에 코마상태의 강화인간들이 늘어간다. 현실에서 코마상태란 뜻은 최면상태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지옥설계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배치나 모형이 들어 있는 설계도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이다. 김호는 이유진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의 배후에 있는 자오얼의 행방과 지옥설계도를 자신의 딸의 목숨과 맞바꿔야 하므로 죽을 힘을 다해 진실을 파헤친다.

 

점차 이야기가 이어짐으로 인해 현실과 무의식의 세계 즉 최면 상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이야기가 진행된다. 최면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람들의 무의식에서 설계되어진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그곳에서 실체하는 인간들조차도 현실 세계에서 조금씩 모습을 바꾼 사람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몇 천년동안 이어온 그 최면 세계의 사람들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갖은 수난을 겪으면서 당연히 그 속의 현실이 사실은 가상이라는 것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다.

 

준경은 최면상태의 가상 현실에서 지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어왔다. 단지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고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곳에 최면상태라는 사실을 아는 강화인간들 중 몇몇은 더이상 현실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가.

그건 마치 무엇이 좋은 세상이고, 나쁜 세상인가를 묻는 것과 내게는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가상이든 현실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같은 단어를 보고도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같은 날씨에도 다른 기분에 휩싸인다. 그들만이 이제까지 구축해 놓은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망. 그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 하더라도,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그 과정속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폭력은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는 것일까.

 

폭력을 없애기 위해 폭력을 가해 그 폭력집단을 사라지게 하는 일. 그것이 과연 정당하고 가치있는 일일까에 대한 의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또한 똑똑하고 지능있는 사람을 원하는 이 경쟁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강력하게 묻는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능이 수십배로 발달해서 이 세계를 장악하고, 자본시장을 이끌어가고, 폭발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해내고, 예술적인 가치를 상승시키지만 그곳에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따스한 감성이 결여되어 있는 곳이라면 과연 사람은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성공을 위해 어디론가 달려간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을 깔아 뭉개고 1등을 향하여, 좋은 성적,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리는 기치와도 같다. 감정은 배제한 채 일단은 성공하고 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원하는 대로 된 후에 찾아오는 그 공허함은, 그 부질없는 느낌은, 그 쓸모없어진 비참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작가 이인화는 아마 우리에게 사랑을 배반하고, 인간과 감정을 무시한 대가로 찾아온 감정성의 결여, 구멍이 슝슝 뚫린 듯한 공허함이 만발한 세계가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인간의 갈등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은 지옥 설계도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는가, 천국에서 살고 있는가. 나는 코너로 몰리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아주 오랜 시간 음미해봐야 할 문제일 듯 싶다. 내가 살고 있는, 나만의 세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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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소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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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19세기의 격동의 시대를 담아낸 이 작품이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시작된 나의 책 읽기. 19세기 민중들의 삶속으로 마치 내가 겪은 듯 쑤욱 빠져들었다. 옹기종기 모여 그들과 함께 고전 이야기에 흠뻑 빠지기도 했고,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불러 보기도 했으며 거나하게 술을 걸친 것처럼 취기가 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그 취기는 흥에 겨운 즐거움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가는 고약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울분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딱딱한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한줄의 차가운 사실이 아니라 뜨끈하고 진하게 다가오는 민중의 삶을 읽어내려가며 내내 출렁이는 마음을 지켜 보아야했다.
 
 시골 양반과 기생 첩 사이의 서녀로 태어난 연옥과 서얼의 서자로 태어나 몰락한 지식인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신통과의 인연. 짧고도 기이한 한 순간의 만남으로 연옥은 이신통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곧 결혼을 앞둔 연옥은 마음에 다른 사람을 품은 채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가 3년 만에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때부터 이신통에 대한 연정은 깊어진다. 그러다 이신통의 소식을 여기저기서 듣게 되고, 결국 그들은 재회하게 된다. 바로 살림을 차리고 서로에게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둘은 꿈같은 6개월이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신통은 삶에 대한 사명이 있었고, 그 단단한 신조를 가지고 신통은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어머니가 남긴 팔찌를 연옥에게 주고 떠난다. 신통이 없는 동안 아이를 배고 그 아이를 잃게 되는 고통을 겪는 연옥. 결국 그녀는 신통을 직접 찾아나서면서 그의 삶과 사랑과 그가 품은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사실 나는 '역사'에 대한 중요성은 늘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부족했다. 그래서 예전 삶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기가 일쑤여서 드라마도 사극은 썩 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본 '마의'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양반과 평민의 서열구조에 대해,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똑같은 생명을 구하는 일일 뿐인데, 동물을 고치던 손이라고 멸시하고 무시한다. 또한 같은 사람인데도 지위나 위치에 따라서 개만도 못한 시선과 질타를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약자들은 좋은 시대가 올까, 대한 희망을 품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고 포기를 하기도 한다. 좋은 일을 하고 싶을 뿐이고, 우리는 다 같은 사람일 뿐인데.... 이러한 혼잣말들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생각없는 사람이라도 현시대를 되돌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여울물 소리'를 읽으며 다시 한 번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게 됐다. 그저 먹고 사는 게 힘이 들었을 뿐이다. 제대로 한 번 살고 싶어 그 바람으로 '사람이 하늘이다' 라는 천지도의 생각에 강하게 공감하며 진짜 멋진 사회를 꿈꾸는 것 뿐인데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신의 권력이나 지위를 조금이라도 흔들리게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잔인하게 목을 쳐 죽이고, 옥살이를 시키고 가족들을 몰살시키며 재산을 몰수한다. 지금 이 시대는 과연 권력으로부터 안전한가? 나는 아니, 라고 대답하고 싶다. 여전히 굶어죽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혹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군림하기 위해 작전을 꾀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위해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진짜 목소리를 내는 문학의 설 자리를 목조여 가고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인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정규직은 커녕 계약직도 점점 더 구하기 힘들어지고 대학 등록금은 점차 비싸지고..... 이러한 상황들을 그래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문학의 힘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더 좋은 사회를 살기 위해 자신의 생을 걸었던 이신통이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이야기의 힘인 것처럼. 그는 서민들을 위해 우리의 고전들을 열심히 신명나게 읽어주었다. 가슴치며 힘들었던 날에도 그렇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면 누구나 웃음 짓게 되는 것 같다. 이야기 속에는 화가 나는 일도 있고, 분통 터지는 일도 있고, 즐거운 일도 모두 들어있다. 그 모든 감정들을 함께 공유하면서 함께 가슴을 쥐어 뜯고, 함께 욕하고, 함께 시원하게 털어내는 것이다.
 
 
 이신통의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까지 지켜보면서 그의 생이 나는 아름다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 고 그를 죽도록 그리워하는 연옥과 같은 마음이 되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해 달려가던 그의 시선을 향하는 곳을 함께 바라보려고 노력해본다. 나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라면 어떻게 견뎌냈을까,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나라면, 나라면. 너라면, 너라면.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주는 선물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기꺼이 되어 보는 일. 그를 이해하려고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숨가쁘게 달려가는 일.
 
 모든 것을 누리고 어떤 것이든 가질 수 있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이신통의 삶을 바라보며 정말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매일 펼쳐지는 일들을 생각없이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 사회에 대해, 내 주변에 대해,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더 풍요롭게 사는 일이 아닐까. 나는 썩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다. 그 어느 중간지점 쯤에 있을 것이다. 썩 정의롭지도 않고 그렇다도 야비하지도 않다. 그 틈새에서 문학의 힘을 빌려 닫혀있던 내 이해의 문을 활짝 열어 크나큰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나날들이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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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2012년을 채 정리하지 못한 채 새로운 해를 맞은 기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겐 값진 한 해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틈틈히 책을 읽었고, 메모를 끄적이기도 했다. 그러한 것들이 완벽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새로운 책들이 나왔을지 설레는 마음으로 훑어 보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책부터 소개하겠다.

 

 

 

첫번째로 '꼬마 니콜라' 시리즈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삽화가로 꼽히는 장 자크 상페와 유머있는 작가로 통하는 르네 고시니. 둘의 작품, 꼬마 니콜라가 다섯권의 시리즈로 나왔다. 어찌 눈이 안 갈 수 있으랴. 때로는 긴 글보다 단 한 장의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그 속에는 호기심 가득찬 아이가 살고 있다. 그 아이를 이제는 끄집어 낼 때다. 니콜라와 함께 말이다.

 

새해에는 니콜라와 함께 천진난만하고 재미난 세계 소으로 퐁당 빠져들고 싶다.

 

 

 

 

 

 

 

 

 두번째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인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이다. 예전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여줬던 명탐정이나 살인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니 어떤 내용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지 궁금해진다. 짜임새 있는 구성, 퍼즐을 맞추듯 하나 하나 조합해가는 이야기.

 

기묘한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그 속에 내재된 사연. 그리고 기적 같은 이야기. 아, 2013년에는 정말 '기적'을 꿈꾸고 싶다. 그것이 책을 통해서라면 더욱 의미있을 것 같다.  

 

 

 

 

 

 

 세번째로는 성석제의 '단 한 번의 연애'를 골라봤다.

이야기꾼으로 통하는 성석제 작가의 첫 연애소설.

예전 소설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유머와 통찰,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풍부한 경험담 등이 잘 어우러져 있을 테니. 그가 쓴 연애소설이라는 단 한 줄만으로도 강력하게 이끌린다.

 

그가 이제까지 보여준 감동을 '사랑'이라는 소재로 어떻게 끌어올릴지 아주 궁금해지는 작품.

 

이 세상에 단 한 번의 연애만 할 수 있다면, 운명처럼 당신이 내게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그런 계절이다.

 

 

 

 

 

새로운 한 해에 좋은 책들과 함께 해서 더욱 풍성해진 기분이다!

열심히 읽고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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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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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상은 반복된다. 즐거웠던 일들도, 슬펐던 일들도 무력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저그런 흑백사진처럼 멀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모든 게 끝나버리면 더이상 슬퍼할 이유도, 아파할 시간도 사라져 버린다. 습관적으로 멍해지던 때가 있었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 물러나고 싶었다. 그렇게 살면 나는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내 속에 고인 눈물을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일부러 들리는 말들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래요?" 하고 모르는 척 넘겨 버리기 일쑤였다. 모르는 척, 안 들리는 척, 못 알아듣는 척. 그런 척.척.척들은 나를 아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내 주위를 단단한 유리벽을 쳐놓았던 세계를 깨게 된 건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내 존재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만 같은 위협을 느끼게 됐던 거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고, 자신들이 지닌 날카로운 것들로 지독하게 들쑤셔 나를 상처입혔다. 그건 오랫동안 묵혀뒀던 내 상처이기도 했고, 그들의 상처이기도 했다.

 

이영호.

그를 통해 잊고 있던 내 상처를 만났다.

 

생명보험회사 심사팀에 근무하는 서른 둘의 영호는 암판정을 받은 마흔 살의 채연을 만난다. 이유랄 것도 없이 이끌림에 의해 그녀를 보기 위해 자주 병원에 다니게 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결혼하기로 한다. 채연에겐 열세 살의 아들이 있다. 아들 샘을 데려오기 위해 채연은 결혼을 선택하고, 영호는 동의한다. 모든 것들이 순조롭고 순탄해보였다. 하지만 문제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영호에게만 말문을 닫아버린 샘. 암치료로 정신없는 채연. 보험금을 타기 위해 아이의 팔을 부러뜨려버리는 윤필. 그것을 그냥 못 보고 지나치는 안.

 

영호에겐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일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툭툭 불거져 나오자 방황하고 헤맨다. 해결해야 할 방법은 찾아지지 않던 어느 날, 샘의 유일한 취미가 텔레비전 시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채널검색을 해보았다. '변신왕 체인지킹'이라는 특촬물만을 연속해서 보는 샘.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영호와 샘은 여전히 침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변신왕 체인지킹을 매개로 샘과 가까워지고 싶은 시도를 하던 중 만나게 된 라이더레인저라는 닉넴을 쓰는 민. 민은 몇 년째 바깥에 나오지 않고 칩거중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민과 끊어질 듯 말듯한 대화들이 이어지고 그 속에서 영호는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자살한 안의 아들과 닮았다는 영호. 안은 아버지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걸 잠자코 바라볼 순 없었다. 안은 윤필의 가정사를 자극하고, 그에 화가 치민 윤필은 가위로 안의 어깨를 찌른다. 그 사건은 영호를 변하게 한다. 

 

 

아버지가 없는 세대의 마지막 생존자. 체인지킹의 후예가 될 것인가. 

그 대를 끊어버리고 진정한 아버지가 될 것인가.

 

모든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영호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과 용기가 영호의 아픔을 덜해주는 것도, 두려움을 가시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제야 이 아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아이는, 그러니까, 겁을 먹고 있었던 거다. 나처럼,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고, 변한 환경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제대로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겁을 먹어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387

 

얼마 전, 고민을 얘기하는 TV 프로그램에서 말문을 닫아버린 아버지와 아들이 나왔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아이의 실수를 그냥 넘겨 버리지 못하고 화가 난 나머지 때렸는데 심각하게 다쳐서 그날 이후로 십 년이 다 되어 가도록 서로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군대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고, 그 관계의 골이 깊어져 아들은 이대로 사는 것이- 서로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 이제는 편해졌고 곧 군대도 가기 때문에 더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화라는 것이 그랬다. 한 번 말문을 닫아버리면 그 다음은 더 힘들어진다. 시간이 흘러 버리면 그것에 익숙해져 버리고 더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그냥 흐르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마음은 모른 채 각자의 마음 속에 상처들만 더 곪아터지게 된다.

 

 

작가는 아버지가 없는 세대들이 어떻게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실제로 아버지가 없는 세대들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어도 대화와 소통이 부재된, 윽박지름만이 난무한 상처입은 세대들에게 어떻게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민을 가리키며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절대로 체인지킹의 후예 같은 건 되지 않을 거다. 그 아이도, 샘도 마찬가지야. 나는 결코 그애를 아버지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거다. 내가."

함부로 올리지 못했던 말이 목구멍에서 끓었다. 나는 입을 열고,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될 거다."

말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하지만 가슴은 더할나위없이 후련했다. -338

 

 

샘의 아버지가 될 거라고 선택한 영호의 외침. 이것이 바로 그 질문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샘과 마주하고 밥을 먹으며 자신의 진심을 얘기하는 장면을 보고 나는 울컥 울고 말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소박하게 함께 밥 먹으며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 서로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그로인해 정말로 행복해지는 것.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댈 언덕,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 아버지가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이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 말문을 닫아버린다해도. 그건 사랑의 다른 형태일 뿐.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주기를, 단단히 만들어놓았던 유리벽을 녹여 내 속으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대화와 소통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내 속에 깊숙히 박아두었던 상처들을 꺼내어보고 실컷 울기도 했다.

 

 

아, 나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변신!" 하고 외치고 싶다.

 

"변신!"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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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위로 - 누구도,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이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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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회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몸과 마음을 누군가 짓누르는 듯 갑갑했던 겨울날이었다. 온몸에 있던 기운이 쑤욱 빠져나갔고 어떤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다가 골목 구석에 불빛 하나가 보여 그냥 아무생각없이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불빛을 따라가보니 그곳엔 이제 막 준비에 들어간 포장마차 하나가 있었다. 주황색 천막을 깨끗하게 털어내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여러 개의 알전구의 빛을 확인하는 남자 분의 눈과 손이 부산스러웠다. 함께 있는 여자 분은 그 분의 아내인 듯 보였는데 앞치마를 둘러매고 갖가지 야채들을 썰고 있었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오픈 준비에 바빴던 두 분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금세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안내했다. 춥지 않도록 전기난로를 켜 주었고, 투명한 막도 둘러쳐주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지도 않은 채 한참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쿵짝쿵짝, 리듬감 있는 소리로 울려퍼지는 야채 써는 소리, 눈빛으로 교환하며 서로의 동태를 살피는 부부의 모습,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 반짝 빛이 들어와 주변을 비추는 노란 알전구, 그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국물의 입김..... 모든 게 너무도 따뜻해서 순간 움츠러들었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손님을 위해 정성을 다해 만드는 음식. 자신의 부푼 사랑을 녹여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음식. 그것은 분명 우리가 때로 길을 잃고 헤매거나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졌을 때 아주 간단히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음에 틀림없다는 걸 아마 그때 알았던 것 같다.

 

 이유석 세프의 '맛있는 위로'. 이 책은 바로 답답했던 마음을 위로 받고 싶었던 그날 보았던 한줄기 빛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국물의 입김처럼 따뜻하고 환했다. 얼마 간 침울해 있던 나에게 다시 힘을 실어준 그런 기특한 책이기도 했다.

 이유석 셰프는 압구정에 있는 '루이쌍끄'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오너 셰프다. 이 프렌치 레스토랑은 점심 때는 운영하지 않는 심야식당이다. 그는 와인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랑스 요리들을 손님들에게 대접한다. 때론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혹은 가족처럼.

 

 

 각 챕터별로 들려주는 그가 만난 사람들과 그 속에 녹아든 이야기와 맛있는 음식들은 그 속으로 푸욱 빠져들게 만들어 급기야는 마치 그 음식을 그에게 대접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가 소개하는 음식들은 이야기 말미에 레서피가 함께 제공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후라이팬이나 오븐을 들고 조리를 해야할 것 같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면서 한 장 한 장 넘기며 군침을 꼴깍 삼키다보면 발끝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허기가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허전한 마음에는 온기를 불어넣는 책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거짓말하지 않는 뱃속은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기이한 책이었다.

 

 

나이는 많지 않은 서른 초반의 훈남 이유석 셰프 또한 이 자리에 오기까지 험난한 여정들을 많이 겪었다. 외로움에 허덕이기도 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기도 했고,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은 단 하나. 누군가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그들이 자신처럼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는 것. 그래서 결국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위해 언제나 온 정성을 쏟아부어 요리를 했으며 자신과 꼭 맞는 새로운 사랑도 찾게 되었다.

외롭던 시절,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더 여겼을 때 동료가 끓여준 마늘 수프.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 덕에 감기도 낫고 외로운 마음도 치유받았다는 이유석 셰프. 결국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관심이었을까.
요리사 지망생이라는 한 청년이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셰프에게 후라이팬으로 스테이크를 굽는 방법을 물어본다. 꿈을 이룬 누군가가 꿈을 꾸는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역할 또한 음식이란 기특한 녀석이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연인과 늘 함께 먹었던 달콤한 수플레. 듬뿍 떠먹고 한없이 달콤한 수플레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모든 게 사라지는 것처럼 가끔은 불현듯 찾아오는 이별. 그래도 늘 달콤함을 꿈꾸며 우리는 음식을 통해 황홀함의 세계를 먼저 느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콤한 쇼콜라. 낙방을 거듭하는 취업 준비생에게 건네는 음식.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멈추지만 않는다면 분명 네가 찾는 달콤함은 여기, 이곳에 있다는 걸 당당히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는 듯 진하고 달달한 이 맛!  

 

가끔은 아무 말 없이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이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건 마치 '나는 너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는 말이 생략된 침묵의 대화인지도. 음식에는 분명 그런 힘이 있다.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밥'을 함께 먹으라는 얘기가 있듯이. 함께 식사를 한 사람과는 친밀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친밀함이 쌓이면 서로의 취향을 알게 되고, 그러다보면 추억이 쌓이는 것 같다. 아, 이 음식! 엄마가 참 좋아할 텐데...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고 추억하게 되는 것.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수많은 추억을 떠올렸다. 그 속에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을 이유석 셰프와 함께 만났고 함께 공감했고, 내 속에 녹아든 음식과 함께 떠오르는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떠올리고 마음으로 만났다. 그래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상의 행복이 아닐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야기가 바로 무얼 먹을지에 대한 갈등인 것처럼. 그 선택에 대한 갈등도 어찌 보면 행복한 고민인 것 같다. 서로의 취향을 조합해서 가장 만족할만한 음식을 골라 먹는 것!

 

 

이유석 셰프는 비록 단 한 번을 찾더라도 자신의 가게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그 분이 바로 '단골 손님'이라고 정의 내렸다. 아, 이 분 정말 책을 읽는 내내 너무 멋져서 이 가게에 가서 꼭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행복하게 요리하는 이유석 셰프.

 

그는 마지막으로 개인적이면서도 수줍은 고백을 하고 이 책을 끝낸다. 아름다운 연인이 생겼다고. 새로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두 분은 정말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마지막을 연인의 이야기로 장식한, 그만큼 사랑받고 있는 이유석 셰프의 연인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맛있는 요리처럼 멋진 사랑하시기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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