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정의 기판이 처음 표지와 제목을 보았을 땐 기판이 사람 이름일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밤나무정의 기판이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 책이라만 하기에는 크고 대단한 작품이다. 마치 학창시절 도서관에서 누렇게 빛이 바랜 두꺼운 한국문학을 펼쳐들었던 그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195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삼대에 걸친 이야기 앞부분은 기판이의 할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으로 기판이를 낳기 전까지의 이야기라면 뒷부분은 기판이의 성장이후의 이야기가 되겠다.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민족의 애슬픈 한서린 이야기가 깊은 밤 가슴을 적셔왔다. 홀로 된 할머니가 기판의 아버지 삼형제를 길러내었다. 어려운 살림에도 바르게 키워 삼형제의 성품은 온화했는데 그 시대의 일반적인 혼례 절차에 따라 맞은 둘째 며느리가 들어오면서부터 사건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띈다. 기판의 어머니인 둘째 며느리는 욕심이 많다. 그 많은 욕심으로 집안의 재산인 전답을 혼자 챙기고, 아랫 동생의 집마저 빼앗고 막내 동서의 금반지마저 탐한다. 지극정성으로 빌어 낳은 귀한 아들 기판 역시 그런 어머니의 욕심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산삼을 먹이고 축구공을 안겨주고 했지만 억지로 기판의 성격마저 바꿀 수는 없었다.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도 외면당하고 놀림당하며 자란 기판이. 자신을 언제나 따뜻이 위로해주던 누나마저 혼인하여 집을 떠나자 기판이는 자신의 안으로 안으로 더 들어간다. 진학하여 일명 도회지로 유학을 떠나 안골댁의 기대에 부응하는가싶더니만 친구를 돕다 폭력배를 만나 그만 칼을 맞고 만다. 설마 설마 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나니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더 슬프게 와닿고 기판이를 생각하는 그 인물들 속으로 나도 들어가 하나의 그림이 되는 듯했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우리 부모님, 할머니 세대의 어려움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치 한 시대를 접어 다시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우리 앞에 담담히 보여주는 오래된 사진처럼 그렇게 밤나무정의 기판이는 다시 나를 마주보고 있다. 한 가족의 삼대에 걸친 역사는 작게는 어느 한 가정의 이야기이지만 더 크게 시간의 강 속 놓고 볼 때 거쳐간 우리 민족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