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
주성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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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홍콩 배우 양조위>는 한 배우의 전기이면서 홍콩영화의 연대기를 그린다. 그도 그럴 것이, 책 곳곳에는 홍콩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이 스며있다. 당대 홍콩영화를 빛냈던 감독과 배우를 소환하며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양조위의 새로운 면을 꺼내 든다. 빽빽할 정도로 채워진 글들은 그의 필모그래피 뿐만 아니라 시대의 공기까지 풍기게 만든다. 특히 책의 바깥 여백에 글을 배치한 편집 방식은 독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글의 정성이나 세심한 배려에 '아끼는 마음'이 가득 묻어나온다.


저자는 양조위의 연기를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리지 않는다. “내재화된 감정연기를 오직 시선과 호흡, 그리고 최소한의 제스처만으로 작품의 정서를 이끌어간다.”라는 문장으로 그의 다채로움을 표현한다. 세계 영화사의 대배우들과는 또 다른 느낌을 안겨준다고 말한다. 양조위의 시간이다.


홍콩영화의 황금기를 이끈 네 배우, 장국영, 유덕화 주윤발 그리고 양조위. 그중에서도 주윤발과 양조위는 화려했던 전성기의 얼굴이었다. 유덕화가 장르 그 자체였다면, 양조위는 장르에 귀속되지 않는 배우였다. 멜로와 누아르,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홍콩의 운명을 관통하는 작품 속에 자리했다.


홍콩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감독은 바로 '왕가위'다. 그의 영화는 홍콩을 배경으로 한다. 1997년 반환을 전후한 불안과 상실, 그리고 2046년이라는 상징적 시간은 소재가 된다. ‘유통기한이 정해진 도시’에서 기억은 미래로 유예되고, 사랑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 채 반복된다. 영화 속 이별은 곧 영국과의 결별이며 새로운 체제와의 관계는 여전히 불확실한 채로 남았다.


'해피투게더'의 대사는 먼저 떠나간 장국영에 대한 그리움을 더한다. "네가 떠난 지 10년이 됐지만 내 휴대폰에는 여전히 네 번호가 저장되어 있어" "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장국영의 거대한 빈자리를 메우며 시대를 건너온 배우가 바로 양조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양연화. 양조위와 장만옥이 만들어낸 '로맨스'는 여타 전통 멜로와는 차이가 있었다.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묶어두는 인물들, 말하지 못한 감정이 화면의 여백을 채운다.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라는 말처럼 시대의 변화가 녹아 있다. 낡은 윤리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감각이 도래하는 길목의 진통을 가장 우아하게 담아낸 기록이다. 제목은 과거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품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또한 색, 계는 양조위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 작품이다. 냉혹한 권력자이면서도 연약한 인간의 결을 동시에 지닌 인물. 공공의 적이지만 동정심을 자아내는 복합적인 존재를 설득력 있게 완성해 낸다. 그의 선한 얼굴에서는 악한 역할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작품에서는 또 다른 면모를 선보인다. 


책은 말한다. 홍콩영화라는 개별적 개념은 쇠퇴했을지라도, 홍콩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오래가는 것이 진정 강한 것이라고 믿음처럼, 유덕화와 양조위가 존재하는 한 홍콩은 여전히 현재형이라는 주장이다. 양조위는 왕가위의 시간을 살았고, 동시에 그가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배우다. 과거의 눈부신 장면들이 오늘에도 유기체처럼 숨 쉬는 이유는 그가 모든 시대를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배우를 ‘마지막’이라는 수식어로 마무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회고록처럼 정리된 문장들은 그를 이미 완결된 존재처럼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를 풀듯 책에서는 아직 진행형으로 나아가고 있는 양조위에 대한 경의의 표현을 더한다. 한 시대를 살아온 양조위가 계속해서 홍콩 영화를 빛내주고, 그 시절의 홍콩영화가 되살아나길 바라는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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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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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저서 『야만시대의 귀환』은 우리가 그간 애써 외면해온 대한민국 사회와 국제 질서의 어두운 이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문제작이다. 저자는 20세기 말부터 세계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구조적 한계에 이르렀음을 지적하며, 그 공백 속에서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무한 경쟁의 논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현상을 ‘야만의 귀환’으로 명명한다. 그의 비판은 정치권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사회 내부에 깊이 뿌리내린 승자독식의 사고방식과 타자에 대한 배타성까지 아프게 파고든다.


저자가 분석하는 국제 정세의 핵심에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쇠락이라는 진단이 자리한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본격화된 미국의 ‘미국 우선주의’는 이러한 분석이 단순한 이론적 추론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 압박, 관세를 외교적 무기로 활용하는 행보는 과거 ‘세계의 경찰’로 불리던 미국의 모습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박노자는 이러한 변화가 국제 사회 전반에 각자도생의 논리를 확산시키고, 국가 간 경쟁을 더욱 거칠게 만들 것이라 경고한다. 제국이 질서 유지의 비용을 동맹에 전가하기 시작할 때 그 질서가 흔들린다는 그의 진단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국제 뉴스들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이 ‘대안’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에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박노자는 미국 중심 질서의 쇠퇴를 전제로 북한과의 적극적 교류와 중국과의 연계를 한국의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탈미국 중심적 사고의 가능성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안보와 체제 선택이라는 현실 정치의 조건 속에서는 상당한 위험을 동반한다. 따라서 현실 정치에서는 이상적 방향성뿐 아니라 그 실행이 안보와 외교환경에 파급효과를 종합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미동맹은 대체 불가능한 요소와 동시에 재조정이 논의되는 측면을 함께 지닌 동맹이었다. 이는 강대국에 대한 일방적 종속이라기보다는, 전후 폐허 속에서 안보와 경제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하나의 현실적 선택으로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의 역할과 태도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기존 동맹의 전략적 가치를 부정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중국의 대외적 태도나 북한의 지속적인 핵 위협을 고려할 때, 이들을 곧바로 ‘대안적 파트너’로 상정하는 접근은 안보적 리스크를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판단일 수 있다.


또한 체제의 문제 역시 단순한 이념 대립의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의 축적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와는 가치와 운영 원리에서 뚜렷한 차이를 지닌, 다수 국가에서 심각한 한계를 드러냈던 체제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특정 이념에 대한 감정적 거부라기보다, 경험적 현실 인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야만시대의 귀환』이 던지는 문제의식 자체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박노자가 지적하는 우리 사회의 내면적 야만성, 즉 학벌주의, 비정규직 차별, 약자에 대한 혐오와 같은 구조적 문제는 분명 성찰과 개선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 책은 개인과 사회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경쟁의 논리를 다시 묻게 만들며, ‘민(民)’의 존재를 중심에 놓고 사회를 재사유하도록 이끈다.


결국 이 책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독자는 박노자의 해박한 지식과 시대 인식을 통해 “세계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그가 제시하는 이념적 방향성에 대해서는 “이 선택이 과연 우리의 자유와 안보를 어떻게 보장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학자의 이론은 중요한 참고서가 될 수는 있지만, 시민의 삶을 대신 결정하는 답안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야만시대의 귀환』이 제기하는 문제를 성찰하되, 우리가 축적해온 역사적 경험과 안보 현실, 그리고 자유의 토대를 함께 고려하는 균형 잡힌 시선이야말로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지혜일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의존해온 질서와 가치가 언제든 흔들릴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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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바다 TURN 9
이수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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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흔히 기대하는 블록버스터 SF의 쾌감과는 거리가 멀다. 사건의 전개는 느리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지루하다. 그러나 이 건조함은 연출의 실패가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거대 기업 SG의 계획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개인들의 시선은 끝까지 작고 무력하다. 그들이 무엇을 밝혀내든, 무엇을 저지하든, 비슷한 프로젝트는 다른 이름으로 언제든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이 반복 가능성 앞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허무함이 이 소설이 독자에게 강요하는 감각이다. 세상을 구하는 서사는 이 책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건조함은 소설이 출발부터 실패를 전제로 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루고 있기에 가능하다.


위기가 닥치면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 몸을 던지고, 다른 누군가는 그 혼란을 계산서로 바꾼다. 인류의 역사는 이 두 태도가 늘 함께 작동해 왔음을 증명해 왔다. 《사막의 바다》는 2056년이라는 가까운 미래로 우리를 데려가, 그 오래된 공식을 다시 한 번 적용한다. 참패로 끝난 ‘사막의 숲’ 프로젝트가 폐허로 남았음에도, 인류는 멈추지 않는다. 반성은 비용이 되지만, 다음 계획은 투자 설명서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타림분지 지하의 짠물 호수를 파헤치는 ‘사막의 바다’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된다. 기후 위기와 식량 문제라는 그럴듯한 명분은, 자본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해 온 변명에 불과하다.


작품에서 가장 날카로운 문장은 192페이지에 있었다.

“사실이 아닌 말만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아요. 해야 할 말을 안 하는 것도 거짓말이죠.”


이 문장은 정보 조작의 본질을 정확히 찌른다. 문제는 거짓말이 아니라, 선택된 사실이다. 팩트라는 이름으로 잘려 나간 맥락과 침묵 속에서 대중은 손쉽게 방향을 잃는다. 우리는 흔히 선동이 쉬운 이유를 대중의 무지에서 찾지만, 이 소설은 그보다 불편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진실의 복잡함을 감당하기보다, 단순하고 명쾌한 설명에 기대고 싶어 하는 태만. 멀리 떨어진 비극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정리해 버리는 방관. 그 태도야말로 이 거대한 사기극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미 바다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고, 인류는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 빠른 해결책을 요구하는 조급함은 결국 ‘사막의 바다’라는 또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냈다. 소설은 끝까지 낙관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한다. 이 싸움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침묵보다 나은 선택이 되는 순간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희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무엇을 외면했는지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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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북극곰의 파업을 막아라 - 기후 붕괴 현장에서 마주친 인간과 비인간동물들
남종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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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게 기후 변화 문제를 보도해 온 남종영 작가는 풀지 못한 오랜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야기에 끌려 행동하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숫자와 정확함을 요구하기에 그 절박함을 이야기로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흔한 탈출, 경고, 종말의 서사가 아닌 새로운 시선을 택한다. 바로 'SF 논픽션'이라는 우화의 형식을 빌린 것이다. 겉은 허구의 포장지지만 그 안을 채운 내용은 논문과 보고서, 치열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이다.


이 책은 기후 변화를 헐리우드 재난 영화처럼 그리지 않는다. 기후 변화는 스펙터클한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어 절망을 키우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과 농사가 곤란해지고, 바다 얼음이 사라지며, 대규모 단일 경작과 공장식 축산이 일상이 된 풍경. 책은 이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인류 멸종의 공포와 닥쳐올 미래를 감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미 경제적 삶과 기후가 얽혀든 재난 속에 잠겨 있을 뿐이다.


책은 단순하게 "지구가 뜨거워지니 태양광을 쓰자"는 식의 납작한 해법을 거부한다. 실제로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은 기술의 발전 덕분에 화석연료보다 발전 단가가 저렴해졌고, 폐기물 처리 비용을 포함하더라도 기후 재난이 초래할 막대한 비용보다는 경제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숫자로 증명된 경제성 너머에,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정의'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온실가스를 내뿜지도, 산업 국가도 아니었던 섬나라가 가장 먼저 직격타를 맞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현실은 잔혹하다. 저자는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세계를 끝내야 하지만, 친환경 에너지 전환이 원주민의 권리를 희생하며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라고 못 박는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친환경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기후 위기를 둘러싼 진실과 과장, 그 이면에 숨겨진 정치와 자본의 역학관계. 이 책은 기후 위기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쥐여주기보다는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지구 온도 상승의 속도는 유례가 없고,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도래할 현실이다.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려서일까, 홈런을 맞은 듯 충격이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숨이 가쁠 정도로 가득 찬 이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기후 변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진짜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 숫자 뒤에 가려진 고통받는 존재들을 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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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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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조금씩 어중간하다. 완벽한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의 부정의에 완전히 눈을 감은 악당도 아니다. 조형근 작가는 스스로를 '소시민으로서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지길 기대하며 보낸 그 어중간한 날들의 기록을 <앎과 삶 사이에서>에 담아냈다. 그는 소시민들이 만드는 힘을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은 무조건적인 지지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힘센 소수의 잘못을 엄하게 꾸짖되 보통 사람들이 지녀야 할 책임 또한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작은 개인들의 행위가 모여 세상을 뒤집을 '힘'이 커지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괴물'이 부패한 권력자나 탐욕스러운 자본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초입(6p), 저자는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구조적 부정의'라는 개념을 빌려와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우리가 악의를 품지 않아도 단지 각자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며 제도와 상호작용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불의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성찰이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합법적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소비자는 그 덕에 빠르고 저렴한 서비스를 누린다. 누구도 법을 어기지 않았고 악의를 품지도 않았지만 그 결과로 위험과 빈곤은 특정 집단에게 집중된다. 기후 위기, 지역 소멸, 부동산 폭등 역시 마찬가지다.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길 바라고, 내 집값이 오르길 바라는 평범한 욕망들이 모여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조용한 불의’를 빚어낸다. 의도가 없었더라도 결과에 연루되었다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을 공유하고 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앎과 삶의 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벌어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저출생 담론을 다루면서도 '노동력 공급'이나 '복지 비용'이라는 차가운 경제 논리를 거부한다.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한 유인책을 내놓을 게 아니라, 아이를 낳을 만한 세상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하다. 152p에서 지적하듯, 각자도생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연대는 붕괴했고 민주주의는 허약해졌다. 선거철만 되면 요란해지지만 정작 알맹이는 빠진 정치의 수사들. 저자는 묻는다. 피의 대가로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은 어떤 곳인가? 그 세상은 어떤 정의를 약속하는가? (164p)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정치는 그저 '지저분한 전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에 대한 비유(201p)는 특히 날카롭다. 물을 끓이려면 불을 지펴야지 물만 더 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가 자본의 횡포에 노출된 나라에서 최저임금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러나 정치는 어떤 집단이든 잠시 '액세서리'로 쓰고 버릴 뿐 그들을 존엄한 주체로 대우하지 않는다.


가장 민감하지만 통찰력 있는 비판의 지점은 '86세대'에 대한 비판이다. 241p에서 저자는 고백한다. 양심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이 집 밖에 가득한데, '불편한 말과 위험한 정치가 필요한 때에 집이 너무 편안하다'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세대는 이제 주류가 되었고 기득권이 되었다(254p). 또한, 한국 자본주의는 이미 고도로 구조화되어,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정의를 보장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공정경쟁'이라는 이름의 게임은 오히려 불공정한 결과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고 그 게임에 참여조차 못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때 희망의 사다리였던 대학은 고도화된 서열화와 등록금 고통의 현장으로 전락했다.


이 책은 위험하다. 양쪽 모두에게 공격받기 딱 좋은 '모두까기 인형'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형근 작가가 지닌 용기는 바로 그 '민감함'에서 나온다. 사회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위선, 인정, 타협이라는 복잡한 무늬로 짜여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그동안 불편하지 않게 여겼던 생각들을 굳이 끄집어내어 불편하게 만든다. 중도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양극단의 확성기 소리만 가득한 한국 정치의 기형적인 단면을 냉철하게 해부한다. 정치적 무관심과 지나친 집착 사이에서 갈 길을 잃은 우리에게, 삶 자체가 곧 정치의 일부임을 일깨워준다. 차가운 냉소로 끝나지 않고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든 메워보려는 한 지식인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 책을 덮으며 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어디서부터 기준을 잡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막막함이야말로 '앎'이 '삶'으로 전이되는 첫 번째 신호일 것이다. 모두를 위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려 했던 저자의 고투는, 결국 어중간한 우리 모두를 향한 따뜻하면서도 따끔한 연대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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