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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은 가족에게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기 위해 시작한 여정은 어느 순간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과업을 이어가는 일이 된다. 아버지가 품었던 질문은 어느 순간 저자의 질문이 되었고, 저자는 할아버지 ‘이철하’의 생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철하의 삶은 한 가족의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의 동맹휴학과 서대문형무소 투옥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과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독재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한국사의 격동과 맞닿아 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한 시대의 역사를 마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0여 년에 걸친 추적은 쉽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탐사 보도와 구술사, 1차 사료를 확인하고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기록을 찾는 일도 어려웠지만, 할머니가 오랫동안 함구했던 기억에 다가가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할머니에게 남편은 생존을 위해 덮어두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가 할아버지를 독립운동가 이철하가 아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기에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의 기록을 지우고, 그의 이름을 감추고, 그에 대한 기억마저 묻어두어야 했을 테니까. 그렇게 할아버지의 이름은 남았으나 그의 생애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그래서 저자가 “왜 그 괴로운 일을 알고 싶냐”는 할머니에게 과거를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설득하는 장면은 중요하게 다가온다. 저자가 알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만은 아니었다. 왜 그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공산주의자’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이름 뒤에 가려진 삶은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저자는 한 사람에게 씌워진 낙인을 걷어내고, 그 안에 있던 한 인간의 삶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조상의 부와 명예를 자신의 자랑으로 내세우지만, 모든 가족의 역사가 자랑할 수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너무 아파서 말하지 못하고, 어떤 과거는 살아남기 위해 숨겨야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감춰진 이야기는 어느 순간 가족 안에서 ‘비밀’이 된다. 살아남기 위해 비밀에 붙여두었던 과거를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삶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저자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뿌리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복원하는 가족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한 사람의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만 남기기 쉽다. 훌륭했던 조상, 성공했던 순간, 자랑스러운 가문의 이야기는 기억하고 싶지만, 가족에게 상처를 남긴 사건이나 감추고 싶었던 과거는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순간, 뿌리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을 수 없다.
그래서 《비밀의 들판》이라는 제목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곳에 묻혀 있던 것은 단순한 가족의 비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말해지지 못했던 한 사람의 삶이었고, 그 삶을 둘러싼 시대의 기억이었다. 가족에게 그 과거는 오랫동안 수치였을 수도 있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숨겨야 하는 위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20년에 걸쳐 그 비밀을 추적한 끝에 마주한 것은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반역자’로 기억되던 사람은 훗날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가족에게 숨겨야 할 과거였던 그의 삶이 다시 역사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저자가 찾은 것은 할아버지의 명예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왜 그토록 그 역사를 알고 싶어 했는지, 가족이 왜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역사 위에 서 있는지를 함께 알아갔을 것이다. 이 책에서 뿌리를 찾는다는 것은 자랑스러워할 만한 과거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기억과 가족이 오랫동안 감춰온 상처까지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