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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
노은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평점 :
우리는 정말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까. 슬픔, 분노, 기쁨처럼 이름이 분명한 감정은 비교적 다루기 쉽지만,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지금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할지도 쉽지 않다. 때로는 무엇 때문에 힘든지조차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가 쉽게 설명하지 못했던 모호한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마음을 구체화하는 과정은 단순히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일은 결국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름 없이 웅크리고 있던 감정을 하나씩 들여다볼 때, 비로소 나와 관계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방법이 아니다. 책은 ‘요즘 어때?’라는 질문에 습관적으로 ‘괜찮아요’라고 대답하기 전에 잠시 멈춰보라고 말한다. 단 5초라도 지금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고,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면 목과 어깨의 긴장이나 배의 불편함처럼 몸에서 나타나는 신호를 먼저 살펴볼 수도 있다. 하루를 마치며 ‘오늘 기분을 잘 모르겠다’라고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이 올라오면 가장 먼저 ‘내가 예민한가?’, ‘내가 잘못했나?’라고 묻는다. 하지만 감정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대상이라기보다 현재의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신호에 가깝다. 서운함이 생겼다면 왜 서운한지, 불안하다면 무엇이 불안한지 살펴보는 것이 먼저다. 감정을 없애거나 억누르기보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들어보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태도는 중요하다. 책은 트라우마를 다룰 때 먼저 평가하기보다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고, 당시 느꼈던 감정에 이름을 붙이며, 사실과 해석을 구분해볼 것을 이야기한다. ‘이별했다’는 사실과 ‘나는 버림받을 만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에 일어난 사건보다 그 사건에 덧붙인 해석 때문에 더 오랫동안 고통받는다. 그래서 과거를 다시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경험에 붙어 있던 해석을 다시 살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구분하면서,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바라본다.
윌프레드 비온이 말한 ‘소극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은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태를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않고 견디는 힘을 뜻한다. 우리는 불안할수록 빨리 답을 찾고 싶어 한다. 상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 관계가 무엇인지 당장 결론을 내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때로는 그 결론을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든 마음에 즉시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충분히 바라보고, 머물러보고, 때로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것. 그렇게 모호함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마음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그렇게 해석했던 것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니면 타인의 기대를 내 욕망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질문을 통해 타인의 목소리를 하나씩 걷어내다 보면 비로소 그 아래에 있던 나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단순히 마음을 위로해주기 때문이 아니다. 괜찮다고 다독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내가 왜 힘든지, 무엇 때문에 불안한지, 그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천천히 살펴보게 한다. 빠르게 변하고 복잡해지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들여다보기 어려운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막연한 위로보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이름 없는 감정을 하나씩 들여다보게 하며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마음의 모양을 보여준다. 타인이 붙여준 이름에 갇혀 있지는 않았는지, 내가 느끼는 감정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이라면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고 조금 더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일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이름을 붙이고, 때로는 잘못 붙은 이름을 떼어내고, 때로는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을 조금 더 기다려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복잡한 마음을 단순히 달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이해할 수 있도록 곁에서 언어를 건네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