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한다. 황금빛 물결이 넘실대는 밀밭을 보면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네가 생각이 날 거라고. 그리고 그 생각이 나면서 밑발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도 좋아하게 될 거라고. 단, 네가 날 길들여 준다면.

우리는 생각을 홀로 떨어져 오랜 시간 무언가에 몰입하는 행위로 이해한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차분히 생각할 시간적 여유는 물론이고 고즈넉이 사색할 공간적 여유도 잘 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의 말과 행동만 재촉한다.

만약 이런 재촉이 견디기 어려울 때가 온다면, 붉은 여왕의 충고를 기억해 두었다가 실행해 보면 어떨까.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일상의 행위들 그 틈바구니에 생각의 자리를 끼워 넣고 보는 것이다

경제학자 케인즈도 이런 말을 했다. "말은 다소 과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 없음에 대한 생각의 공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일단 피사체의 상이 망막에 맺히면 시신경이 그 신호를 모아서 우리 뇌로 보낸다. 이때 망막에 퍼져 있는 시신경은 다발을 이루어 ‘맹점’이라는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빛을 감지하는 원추 세포가 없어 상이 맺히지 않기에 맹점이라 불리는 것인데, 놀라운 점은 우리 뇌가 그 빈 부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뇌가 개입(해석)하여 그 빈 자리를 메워 버리기 때문이다. 오래전, 세잔이 직관적 통찰로 메워 버렸던 바로 그 구멍 말이다

이 입체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 파블로 피카소다. 그는 "사물을 그릴 때 생각하면서 그리지 보면서 그리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예술을 통해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닌 그 어떤 것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험을 하는 것

이때 사물의 본질이 그냥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눈에 뻔히 들어오는 특성이 아닌 그 배후에 숨어 있는 경이로운 특성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눈이 아닌 마음으로 봐야 하고 생각을 해야 한다.

혹시 생각이 막히는 일이 있어도 오래된 습관처럼 다시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는 "차라리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려라"고 피카소는 조언한다.

흔히 우리는 생각이란 말을 대하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 그날 하루를 돌아보는 행위를 떠올린다. 그러나 블레이크에게 생각은 아침에 해야 하는 일이다.

영어권에는 "먼저 개구리를 먹어 치워라"라는 표현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질색하는 일을 먼저 해치우라는 의미다.

질질 끌거나 미루기 쉬운 일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해치우면, 뿌듯한 성취감에 그날 하루 다른 일을 할 때도 생산성이 덩달아 높아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걸음에서 잉태된 생각만이 가치가 있다"라는 주장을 폈는데, 진정한 사유란 몸에서 비롯하며, 따라서 걷기야말로 가치 있는 생각을 길어 낼 수 있는 올바른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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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역사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는 뜻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과거의 사건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이죠.

다시 말해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학은 지금이나 미래가 아닌 과거의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진 일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무슨 일을 했으며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어떤 사건이 벌어졌으며 어떻게 해결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죠.

더 간단히 말하면 과거 행위의 총체를 파악하려는 학문이 바로 역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게 철학은 ‘질문하는 학문’입니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고 삶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죠

역사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과거의 사건을 배움으로써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숙고하고 판단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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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이처럼 모든 인간은 착한 본성인 사단四端을 갖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사덕四德을 쌓아야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졌어도 이를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덕은 외적 조건의 방해가 없으면 자연히 내적으로 발현되어 나타납니다. 마치 작은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대체 인간은 왜 동물적인 본능 대신 사단을 가꾸고 확장해야 하는 걸까요?

이제 주어진 질문에 답해볼 차례입니다. 만약 맹자의 생각처럼 인간이 선하다면 스스로의 본성을 잘 지키고 가꿨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늘 선한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순자의 입장처럼 인간이 악하게 태어났다면 우리는 단지 선한 행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심지어 법과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무질서하게 행동할 수도 있겠죠.

과연 인간의 본성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만약 맹자의 입장에 가깝다면 우리가 선해 보이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순자의 입장에 가깝다면 단지 법과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가 도망 대신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대신 아테네에서 추방당하거나 입막음당해 철학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삶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지혜를 사랑하는 활동, 즉 철학함을 멈추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죠. 더불어 죽음에 대한 그의 독특한 입장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의 무지를 자각하고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혹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세나 태도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까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죽을 때 자서전을 남긴다면 제목은 무엇으로 하고 싶나요?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 있다. 모든 이야기가 결말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듯이, 인생의 의미도 죽음의 방식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고 말했습니다.

즉, 결말에 따라 그동안의 일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서 산다’는 말의 의미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가 아닌 ‘죽음의 공포를 통해 어떤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인간의 몸을 이루는 60~70조 개의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교체 과정을 거칩니다.

피부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는 2~3주마다 재생되고 백혈구와 적혈구도 각각 일주일과 4개월 정도 유지된다고 하죠. 몸속 지방세포는 평균 10년 정도 유지되며 심지어는 뼈조차도 10년 주기로 재생될 수 있다고 합니다. 굳이 생물학적 측면을 살펴보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하지 못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분명 나지만 끝없이 새로운 나인 것이죠. 이처럼 육체적 ・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지난 한 주간 가장 흥미로웠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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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어린이 이야기를 계속해 보기로 했다. 그건 내 생활의 내용이기도 했다. 

댓글에 적힌 사연을 읽을 때마다 글을 쓰기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이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어디서 만났겠는가. 

나자신을 위해 쓰겠다고 했는데 바라던 대로 된 셈이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어린 시절‘ 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어린이들의 진솔한 모습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늘 우리 가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아는 것이 저의 큰 영광입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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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생각나는 게 생각이므로 부러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생각에 대한 재치 있는 풍자다.

이처럼 생각은 뱅뱅 맴돌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한없이 제자리를 맴돈다.

글을 쓰고 읽는 게 보통 일이 아니듯 생각은 몹시 수고로운 일이다.

우리는 귀한 줄 몰라서 생각을 함부로 하지만, 그 수고로움을 꺼린 나머지 함부로 생각하기도 한다

태어나서 생명을 부여받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데,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역량에 따라 사람의 삶은 갈린다.

생각도 그러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격과 삶의 격이 천 갈래, 만 갈래 갈린다.

결국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생각의 말들』은 ‘생각’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말들 가운데 생각에 대한 생각을 다시 곰곰이 생각게 하는 100편의 말들을 가려 모은 것이나, 속내는 생각에 줏대가 있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돌아보고 헤아리는 것이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도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비판적 사고를 끌어낼 수 없다면 그건 값싼 상투어에 불과하다.

하물며 다른 말도 아닌 생각의 말들을 모아 놓았을진대, 그에 대해 별생각이 없거나 하나의 생각에 고착된다면 이보다 더한 클리셰의 폐해는 없다.

오랫동안 노예 신분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당황하듯,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낯설어하고 두려워했다.

일단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사회 모순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자신이 처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생각 그 자체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결국 인간의 악행은 선한 생각이 아닌 악한 생각을 먼저 품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의 부재, 생각의 무능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무지한 것은 단순히 머리가 나쁘거나 배움의 의지가 부족해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기에 무지한 경우가 더 많다.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는 수동적 결과가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는 적극적 의지의 발로다.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 온 결과가 바로 무지이며,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다. 레이놀즈의 말처럼 생각의 수고를 피하고자 갖은 꾀를 부린다는 게 그리 해괴한 일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대충하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생각은 적지 않은 에너지가 쓰이는 몹시 수고로운 일이다.

이 수고를 기꺼워하는 이는 당연히 드물다. 하지만 생각의 수고를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뚜렷해지는 건 흑백의 경계일 뿐이다.

다름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다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다름을 적대의 눈이 아닌 관용의 눈으로 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다름에 대한 피상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했다.

차이와 다름을 거부하고 고만고만한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만 모여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문명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폭과 깊이를 재고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발전은커녕 쇠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진공 상태에서는 생각을 할 수 없으며, 비슷비슷한 것으로부터는 새로운 생각을 낼 수 없다."

우선 이 책은 기존 세상을 지배하는 이타주의 도덕관을 비판한다. 도덕에는 ‘생명의 도덕’과 ‘죽음의 도덕’이 있는데, 이타주의가 죽음의 도덕에 속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도덕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악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기주의를 죄악시하고 이타주의를 미덕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타주의는 사람을 쉽게 죄책감에 빠지게 하고 그 보상을 현세가 아닌 내세에서 헛되이 구하게 만든다.

반면, 생명의 도덕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논리적 추론을 통해 존재를 인식하고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에 바탕을 둔다.

이 생명의 도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의 미덕은 연민 같은 감정이 아니라 바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은 생존을 위한 기본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 정말 얼마큼 적으냐……"

생각에 있어서도 우리는 참으로 작은 것 같다.

생각이 없거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드문데, 생각이 작은 것은 흔해 보인다. 그리고 생각이 없거나 생각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폐해보다 생각이 얕고 잘아서 생기는 폐해가 더 크지 싶다. 그런데 왜 우리의 생각은 작을까?

작은 생각을 해서 생각이 작은 게 아니다.

처음부터 큰 생각도 새로운 자극을 꾸준히 받지 못하면 옹졸히 졸아든다.

꾸준히 운동하지 않으면 육신의 기력이 쇠하듯, 생각이라는 활동도 꾸준히 해 주지 않으면 정신의 기력이 쇠할 수밖에 없다.

육체든 정신이든 가만두면 퇴행하는 게 우리 인간의 기본값일 테니.

그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욕망하지도 않는 그냥 걸어 다니는 동물일 뿐이었으며, 그들이 뭔가를 생각하는 게 있다면, 오직 배고픔에 대한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한탄한 반면,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이성의 눈으로 보느냐, 감성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피아니스트이자 코메디언인 스티브 앨런은 "비극에 시간을 더하면 희극이 된다"라고 했으며,

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은 "삶이란 클로즈업을 하면 비극이요, 롱숏에 담으면 희극"이라고 했다. 결국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대상이나 상황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볼 여지가 더 커지는 것이다

"삶이란 죽음과 죽음이라는 두 영원 사이에 놓인 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안에서도 의식적 사고가 지속되는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사유란 기나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섬광 같은 것. 그런데 이 섬광이야말로 전부다."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어쩌다 번뜩인 사유가 사유를 위한 사유에 그친다면 참으로 허망할 노릇이다. 찰나의 빛이 주어질 때, ‘아, 빛이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그 빛으로 이 광대한 수수께끼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도 비춰 보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이 우리가 자식에게 혹은 젊은 세대에게 "생각까지 줄 순 없다"라고 한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책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저자의 사색에 빠져든다는 것이며 그로선 그것만큼 꿈결처럼 달콤한 것도 없다.

"나는 다른 이의 사색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정신으로 빠져드는 것을 좋아한다. 걷지 않을 때면 나는 책을 읽는다. 그런데 앉아서 사색하는 법이 없다. 책이 나 대신 사유하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만큼 사색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라, 필요한 말만 하고 딱 그 자리에서 멈추면 좋으련만 사람은 그 말소리에 스스로 취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말을 아끼면 좋겠지만 굳이 말을 해야 한다면 다수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의 의견을 거스르면 상대는 그것을 비난으로 여기고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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