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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도시, 서울
방서현 지음 / 문이당 / 2025년 11월
평점 :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마음 한 귀퉁이가 오래전 기억을 꺼내는 것처럼 찌릿하고 뜨겁게 느껴졌다. 이야기 자체는 아주 거창하거나 특별한 사건을 쫓아가는 게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여러 번 뜨끔했다. 아마도 주인공의 상황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서울의 계급’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주인공은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세상 사람들이 다 비슷하게 사는 줄만 알았던 아이.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어릴 땐 그냥 친구가 친구였지, 누가 잘 살고 못 사는지 신경도 안 쓰고 몰랐으니까. 그런데 학교라는 곳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투명한 칸막이처럼 계급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 장면이 참 뼈아프게 다가왔다. 어른들이 만든 구조를 아이들이 제일 먼저 체감한다는 사실이 너무 현실 같았다.
달동네에서 사는 아이, 나. 할머니는 여전히 폐지를 줍고, 나는 그곳에서 나름대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달동네를 떠나 반지하로 내려가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반지하를 가난의 상징처럼 말하는데, 이 책에서는 반지하조차도 그냥 다음 단계의 ‘또 다른 동네’일 뿐이다. 달동네가 나쁘고 반지하가 좋고 같은 게 아니라, 그저 가난의 풍경이 조금 다른 것뿐이라는 느낌. 서울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사람을 층층이 나누는지 이 책은 조용히, 하지만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학교 안에서도 아이들은 서로를 수저 계급으로 나눈다. 이건 사실 소설의 설정을 넘어 이미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현실의 풍경이다. 달동네 출신인 나, 일수, 혜미. 그다음이 흙수저—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러움을 사는 아이들. 반지하에서 사는 현수, 옥탑방에 사는 아이들. 조금 더 올라가면 아파트에 사는 은수저 윤우가 있고, 그 위에는 보안요원까지 있는 고급빌라에 사는 도아와 단비가 있다. 이렇게 같은 반에 서로 다른 계급의 아이들이 모두 앉아 있는데, 사실 이 아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참 씁쓸했다. 아이들인데도, 아니 아이들이기에 더 잔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순수함은 때로는 현실 앞에서 아주 빠르게 무너진다. 누가 어떤 집에 사는지, 부모 직업이 뭔지, 어떤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그런 게 아이들에게는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기준이 된다. 책은 그걸 과장 없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주인공이 다문화가정인 친구 우진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왕따를 당하는 장면은 정말 읽기 불편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그 뒤에 이어지는 변화—주인공이 그 상황을 견디기 위해 공부에 몰입하고, 결국 최상위권에 오르는 부분은 짠하면서도 묘하게 힘이 되었다. 할머니가 주워온 책들이 주인공의 세상을 넓히는 계기가 되는 것도 참 인상적이었다. 가장 가난한 환경에서도 배움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게 ‘공부해서 성공했다’는 단순한 성공담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떤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계급은 쉽게 바뀌지 않고, 노력만으로 다 뛰어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희망보다는 현실을 보여주는데, 이상하게 그 현실이 독자에게 묵직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너만 그런 거 아니다. 우리 모두 이런 벽 앞에서 부딪히며 산다”라는 말 같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조용해졌다. 서울이 화려한 도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도시들은 참 거칠고 어둡고 차갑다. 이 소설은 그 도시를 버린 게 아니라, 그 도시에게 계속 버려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그래서 제목이 괜히 오래 남는다. 내가 버린 도시, 서울. 사실은 도시가 우리를 먼저 버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 소설은 특별히 문장이 화려하지도 않고, 큰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읽고 나면 오래 머리에 남는다. 솔직하고 거칠고 서툴게 보이지만, 그 속에서 더 큰 진실이 보인다. 어디에 살았든, 어떤 계급이든,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음 한쪽이 흔들릴 만한 그런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