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도, 궂은 날도 모여 인생이 꽃 피리 - 마음에 쓰는 에세이 필사 노트
오유선 지음 / 베이직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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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음이 조금 지쳐 있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손이 가게 된 책이 있었다. 바로 『맑은 날도, 굳은 날도 모여 인생이 꽃피리』라는 책이다. 처음에는 표지의 꽃 그림이 예뻐서 펼쳤는데, 읽다 보니 그 꽃들처럼 마음에 조용히 피어오르는 위로가 있었다.

이 책은 총 네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의 장이 모두 다른 얘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바로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메시지였다. 거창한 이야기보다는 일상 속에서 느끼는 아주 작은 감정들을 다루고 있어서,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이 책을 읽을 때 좋았던 점은 각 편의 마지막에 있는 큰 글씨 문장들이다. 우리가 그대로 따라 적어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그 필사 페이지를 보면서 잠시 멈춰 내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요즘은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감정 하나 제대로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는데, 그 문장들을 적으면서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떠오른 생각은 “모든 날이 결국 모여 나를 만든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맑은 날만 기억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 굳은 날들이 쌓여야 비로소 단단해진다는 걸 다시 느꼈다. 저자는 힘든 날도, 흔들렸던 날도, 마음이 시렸던 날도 결국 인생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 말이 참 따뜻하게 와닿았다.

책의 제목처럼 인생은 결국 다양한 날들이 모여 하나의 꽃이 되는 과정이라는 걸, 읽는 동안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막상 살아보면 좋은 날보다 힘든 날이 더 많을 때도 있지만, 그 모든 날들이 결국 나를 조금씩 자라게 한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문장들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한 번에 쭉 읽지 않았다.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날,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한 장씩 꺼내 읽었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문장 하나가 하루를 조금 가볍게 만들어주곤 했다. 책이라는 게 꼭 정답을 알려주는 건 아니지만, 그저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가 될 때가 있다.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정말 맑은 날도, 굳은 날도 모여 결국 인생이 꽃피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 바람이 전해졌으면 한다.

요란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을수록 더 깊게 스며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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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도시, 서울
방서현 지음 / 문이당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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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마음 한 귀퉁이가 오래전 기억을 꺼내는 것처럼 찌릿하고 뜨겁게 느껴졌다. 이야기 자체는 아주 거창하거나 특별한 사건을 쫓아가는 게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여러 번 뜨끔했다. 아마도 주인공의 상황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서울의 계급’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주인공은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세상 사람들이 다 비슷하게 사는 줄만 알았던 아이.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어릴 땐 그냥 친구가 친구였지, 누가 잘 살고 못 사는지 신경도 안 쓰고 몰랐으니까. 그런데 학교라는 곳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투명한 칸막이처럼 계급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 장면이 참 뼈아프게 다가왔다. 어른들이 만든 구조를 아이들이 제일 먼저 체감한다는 사실이 너무 현실 같았다.

달동네에서 사는 아이, 나. 할머니는 여전히 폐지를 줍고, 나는 그곳에서 나름대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달동네를 떠나 반지하로 내려가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반지하를 가난의 상징처럼 말하는데, 이 책에서는 반지하조차도 그냥 다음 단계의 ‘또 다른 동네’일 뿐이다. 달동네가 나쁘고 반지하가 좋고 같은 게 아니라, 그저 가난의 풍경이 조금 다른 것뿐이라는 느낌. 서울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사람을 층층이 나누는지 이 책은 조용히, 하지만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학교 안에서도 아이들은 서로를 수저 계급으로 나눈다. 이건 사실 소설의 설정을 넘어 이미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현실의 풍경이다. 달동네 출신인 나, 일수, 혜미. 그다음이 흙수저—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러움을 사는 아이들. 반지하에서 사는 현수, 옥탑방에 사는 아이들. 조금 더 올라가면 아파트에 사는 은수저 윤우가 있고, 그 위에는 보안요원까지 있는 고급빌라에 사는 도아와 단비가 있다. 이렇게 같은 반에 서로 다른 계급의 아이들이 모두 앉아 있는데, 사실 이 아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참 씁쓸했다. 아이들인데도, 아니 아이들이기에 더 잔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순수함은 때로는 현실 앞에서 아주 빠르게 무너진다. 누가 어떤 집에 사는지, 부모 직업이 뭔지, 어떤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그런 게 아이들에게는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기준이 된다. 책은 그걸 과장 없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주인공이 다문화가정인 친구 우진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왕따를 당하는 장면은 정말 읽기 불편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그 뒤에 이어지는 변화—주인공이 그 상황을 견디기 위해 공부에 몰입하고, 결국 최상위권에 오르는 부분은 짠하면서도 묘하게 힘이 되었다. 할머니가 주워온 책들이 주인공의 세상을 넓히는 계기가 되는 것도 참 인상적이었다. 가장 가난한 환경에서도 배움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게 ‘공부해서 성공했다’는 단순한 성공담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떤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계급은 쉽게 바뀌지 않고, 노력만으로 다 뛰어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희망보다는 현실을 보여주는데, 이상하게 그 현실이 독자에게 묵직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너만 그런 거 아니다. 우리 모두 이런 벽 앞에서 부딪히며 산다”라는 말 같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조용해졌다. 서울이 화려한 도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도시들은 참 거칠고 어둡고 차갑다. 이 소설은 그 도시를 버린 게 아니라, 그 도시에게 계속 버려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그래서 제목이 괜히 오래 남는다. 내가 버린 도시, 서울. 사실은 도시가 우리를 먼저 버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 소설은 특별히 문장이 화려하지도 않고, 큰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읽고 나면 오래 머리에 남는다. 솔직하고 거칠고 서툴게 보이지만, 그 속에서 더 큰 진실이 보인다. 어디에 살았든, 어떤 계급이든,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음 한쪽이 흔들릴 만한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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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의 타인
임수진 지음 / 문이당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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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큰 사건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묘하게 마음을 뒤흔드는 여운이 남았던거 같아요.
임수진 작가의 『내 속의 타인』은 우리 안의 불안, 관계의 어긋남, 그리고 가까운 사이에서도 느껴지는 낯섦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집인거 같아요.

이 책 속 인물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가족, 친구, 연인처럼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 안에 낯선 그림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표제작 「내 속의 타인」에서는 가까운 가족 사이에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벽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요즘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 함께 하는듯 했습니다.
‘가깝다고 해서 다 아는 건 아니구나’라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또 다른 단편에서는 오랜 친구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이, 다른 이야기에서는 낯선 도시에서의 고립감이 그려집니다. 작가는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단절과 오해를조용히, 그러나 깊게 파고듭니다.

이 책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음에 스며듭니다. 그 조용한 문장들 속에서 인물들의 불안, 슬픔, 그리고 외로움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내 안의 ‘타인’을 마주하게 됩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도 낯선 존재일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처럼요.

소설 속 인물들은 완전한 결말을 맞지 않습니다. 어딘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데, 그 점이 오히려 현실적이고 진실하게 느껴졌습니다.우리의 일상도 늘 그런 불완전함 속에서 흘러가니까 말이에요.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면 마음 한쪽이 허전하면서도
묘한 위로가 남습니다.

『내 속의 타인』은 소리 없이 여운을 남기는 책입니다. 빠르게 읽히지는 않지만, 한 문장씩 곱씹을수록 깊은 울림이 전해집니다.
관계의 낯섦, 내면의 고요한 혼란,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따뜻함. 이 책은 그 모든 감정을 조용히 꺼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들,
그 속에서도 여전히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책은 다정하게 말을 걸어옵니다.

“당신도 나처럼, 내 속의 타인을 품고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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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읽는 세계사 - 역사를 뒤흔든 25가지 경제사건들
강영운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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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경제’라는 단어가 더 이상 딱딱하고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실 나는 경제 책이라고 하면 늘 머리가 아프고, 숫자와 그래프, 전문용어가 가득할 것 같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부터 흥미롭다. ‘돈의 세계로 떠나는 역사’라니, 마치 역사책과 경제책을 동시에 읽는 듯한 기대감을 안겨준다.

저자는 경제를 학문적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왜 이렇게 흘러왔는지를, 돈과 경제라는 키워드를 통해 쉽게 풀어준다. 책 속에 등장하는 25가지 사건은 모두 역사적으로 굵직한 전환점이었다. 예를 들면 대공황, 전쟁 속에서의 자원 경쟁, 금융 위기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은 어렵지 않고, 오히려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옆에서 들려주는 듯 흡입력이 있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인간의 욕망이 경제를 움직였다는 관점이다. 우리는 흔히 경제를 거대한 시스템이나 정부 정책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그 뿌리에는 사람들의 욕심, 필요, 두려움이 있다. 어떤 시대에는 금을 차지하려는 욕망이 역사를 바꾸었고, 어떤 시대에는 기름 한 방울이 세계 질서를 흔들었다. 이렇게 보니 경제는 단순히 돈의 흐름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과 직결된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경제는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경제 사건이 오늘날 내 삶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2008년 금융 위기는 아직도 세계 금융 질서를 바꾸어 놓았고, 그 여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또 에너지 문제는 여전히 국제 사회를 긴장시키는 중요한 이슈다. 이처럼 경제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이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힌트가 되기도 한다.

책의 구성이 알차다. 25가지 사건 각각이 독립된 이야기처럼 읽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덕분에 책을 다 읽고 나니 ‘아, 경제라는 게 이렇게 역사를 밀어붙였구나’ 하는 큰 그림이 그려졌다. 또 한 챕터가 길지 않아 지루할 틈이 없다. 출퇴근길이나 짧은 여가 시간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점도 좋았다.

인상 깊었던 건 저자의 설명 방식이다. 복잡한 이론이나 통계보다는 사건과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덕분에 지식이 머리에 남는다. 예를 들어 단순히 ‘석유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대신, 석유를 둘러싼 전쟁과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였던 인물들을 보여준다. 이렇게 보니 경제가 추상적이지 않고, 살아 있는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책은 경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좋은 입문서다. 전문가용 책이 아니기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니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경제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나처럼 경제에 약간 거리감을 두던 사람에게는 ‘경제는 결국 사람 이야기’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책을 읽고 난 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뉴스를 보더라도 단순히 사건의 표면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경제적 배경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단순히 정치적 문제로만 보던 시각에서 ‘혹시 자원이나 돈이 얽혀 있지는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저자가 강조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는 참 오래 남는다.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삶, 더 많은 부, 더 큰 안전을 원한다. 그 욕망은 때로는 발전을 이끌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결국 경제의 역사는 인간 욕망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책장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경제를 알면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돈을 잘 버는 법이나 투자 기술을 배우는 게 아니라, 왜 세상이 이렇게 움직이는지를 아는 지혜를 얻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학생부터 직장인, 그리고 경제에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다.

나는 이제 경제를 어렵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고마운 책이다. 앞으로 경제 뉴스를 볼 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이 책에서 배운 시각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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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1
R. F. 쿠앙 지음, 이재경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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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 쿠앙의 소설 『바벨』 1권은 처음부터 독자를 낯선 세계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단순히 판타지 소설일 거라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언어와 번역, 그리고 제국주의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생각보다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야기는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로빈은 중국 출신 소년으로, 어린 시절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고 영국 학자에게 발견되어 런던으로 오게 된다. 이후 그는 옥스퍼드를 본뜬 ‘바벨 연구소’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언어와 번역을 배우게 된다. 바벨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꼭 필요한 지식을 다루는 곳이다. 언어와 번역을 통해 힘을 얻고, 그것이 실제 마법처럼 세상에 영향을 준다는 설정이 독특하고 신선했다.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번역의 힘이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보통 번역을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 정도로 생각하지만, 작가는 그 작은 차이와 간극 속에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고 보여준다. 이 힘은 은판과 결합해 실제로 현실을 바꾸는 마법으로 나타난다. 언어 하나, 단어 하나가 가진 무게를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니, 평소에 가볍게 쓰던 말들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바벨은 단순히 매혹적인 학문의 장이 아니었다. 로빈이 배우고 있는 그 지식이 결국은 영국 제국의 이익을 위해 쓰이고, 식민지를 억압하고 약탈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무거워진다. 로빈은 학문에 대한 사랑과 제국주의 현실 사이에서 점점 혼란을 겪는다. 그의 갈등을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배움은 과연 순수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위한 수단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1권이 무겁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바벨 연구소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교류는 따뜻하고 재미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와 언어,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작은 농담이나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장면들이 있어 읽는 동안 웃음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도 늘 묘한 긴장감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결국 제국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다가온 건 ‘언어는 힘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였다. 평소에는 그냥 당연하게 쓰는 말과 글이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책장을 덮고도 언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바벨』 1권은 판타지 소설로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 있는 메시지 덕분에 여운이 오래 남는다. 언어와 번역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풀어낸 책은 처음이었다. 무겁지만 동시에 매혹적이고, 어렵지만 쉽게 읽히는 부분도 있어서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에서 로빈이 어떤 선택을 하고, 바벨 연구소가 어떻게 변해갈지 무척 궁금하다. 나 자신도 언어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바벨』 1권은 단순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언어와 그것이 가진 힘을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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