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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ㅣ 머묾 세계문학 사랑 3부작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승주연 옮김 / 머묾 / 2025년 12월
평점 :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 무무》는 얇은 분량 속에서도 러시아 문학 특유의 섬세한 감정과 분위기를 깊이 담아낸 작품집이었다. 사실 어린시절 읽었었지만 그 당시에는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느낄수 있었다.두 작품 모두 중단편의 길이지만, 읽고 난 뒤의 여운은 길게 남는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의 시작과 끝이 얼마나 인간을 흔들어놓는지, 혹은 아무 말 한마디 못한 채 마음만 삼키는 사랑이 얼마나 잔인한지 생각하게 만든다.
첫 번째 작품인 《첫사랑》은 제목처럼 “사랑의 시작”을 다룬다. 이야기의 중심은 16살의 소년과 21살의 공작부인 지나이다의 만남이다. 여름빛이 가득한 시절, 옆집으로 이사 온 아름다운 여인에게 소년은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녀의 주변에는 나이 많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들이 늘 머물러 있고, 그들 사이에서 소년은 미약하지만 진심 어린 감정 하나로 스며든다.
지나이다는 장난스럽고, 차갑기도 하고, 어른스럽고, 때론 아이 같다. 남자들을 휘두르면서도 자신만의 고독을 가진 인물이다. 그 세계 속에서 소년은 설렘과 질투, 열등감과 기대를 처음 경험한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랑의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배워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그녀가 진정으로 마음을 둔 남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그 순간 첫사랑은 달콤함을 잃고 갑자기 어른의 그림자를 띠게 되며 순수한 감정은 한순간에 성장의 통증으로 바뀐다. 첫사랑의 끝은 늘 완성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것을 이 작품은 조용하게 말한다.
두 번째 작품 《무무》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사랑의 시작과 설렘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사랑과 고통, 그리고 순종과 비극의 이야기다. 도시의 한 귀부인의 집에서 일을 하는 말 못하는 거인 게라심이 주인공이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며 살던 그가 도시로 와 문지기로 일하며 살아가는데,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마음 깊은 사람이지만 그 마음을 표현할 말이 없다. 그런 게라심이 조용히 마음을 둔 여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고, 그것도 주인의 뜻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사랑은 때때로 말보다 더 큰 침묵으로 존재한다. 게라심은 충격과 상실을 말 대신 행동으로 겪어내며 살아가고, 그러던 중 진흙 속에서 작은 강아지를 발견한다. 그 강아지에게 그는 비로소 마음을 온전히 쏟으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하지만 도시의 질서와 주인의 명령은 그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강아지 ‘무무’는 게라심에게 유일한 위안이자 사랑이지만 결국 그것조차 빼앗기고 만다. 아무 말 못하는 사람의 사랑이기에 더 잔인하고 더 고요하다.
두 작품을 읽고 나면, 투르게네프가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참 담담하면서도 매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려한 감정 대신 그 감정이 인간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어떤 고통을 남기는지, 어떤 여운을 남기는지에 집중한다. 첫 번째 작품이 ‘첫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두 번째 작품은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한 권 속에서 사랑의 시작과 끝, 목소리 있는 사랑과 말 없는 사랑을 모두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읽기에 어렵지 않지만 마음은 오래 머무는 책이다. 특히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공감할 것이고, 게라심 같은 조용한 인물에게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은 《무무》 쪽에서 더 오래 멈춰 서게 될 것 같다. 얇은 책이지만 한 번에 읽기보다는 잠시 멈춰 여운을 즐기며 읽는 것이 더 어울린다. 개인적으로는 《첫사랑》이 소년의 성장서라면 《무무》는 성숙한 순종과 고통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둘 다 짧지만 묵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