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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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들은 오래된 배경처럼 먼지들을 켜켜이 덮어쓰고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길 한 번 스쳐갈 뿐 발걸음 잠시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책들의 세상을 유유자적 노닐다가 맨몸으로 빠져나오기 민망했다. 시간만큼의 먼지를 이고지고 있는 시집 한 권을 뽑아 값을 치렀다. 많은 시집들이 별처럼 빛났다. 별은 빛나고 있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별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 , 눈에 아름답게만 보이는 별을 선택할 것인지 태생적으로 아름다운 별을 선택할 것인지 생각했다. 빛나는 것은 이러나 저라나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일터 허수경 시인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선택했다.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대면하는 것은 세 번째다. 첫 번째가 <빌어먹을 , 차가운 심장>이었다. 매우 유명한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별은 개인의 마음에 뜨는 것이었다. 내가 볼 수 있는 별이 있고 있으나 볼 수 없는 별이 있는 것이라 내게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보이지 않는 별인 듯 했다. 다 읽지 못했다. 두 번째 시집이 허수경 시인의 시집으로 한참 고역을 치루고 있을 때 멀리 사시는 찐따 형님께서 건네신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이었다. 내게도 빛나는 별들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세 번째 시집이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이다. 이번 시집은 연마된 느낌의 조약돌 같은 느낌이라고 해두어야 할 듯하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탓이다. 외부에 의해서 깎인 것인지 스스로 깎은 것인지 부드러워져 있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反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反전쟁시라고 해서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거나 반대의 의견을 전면에 배치하지 않는다. 세련되게 아름다웠던 시절을 노래한다. 그것으로 전쟁이 없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지금 이 공간이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조건 반사의 행동이다.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시기에 전쟁이 없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허수경 시인은 그러한 시도를 제 1부에서 하게 되는 것 같다. 표준어로 한 편의 시가 등장하고 다음에는 ‘진주 혹은 내말로’라는 부제를 달고 똑같은 내용의 방언으로 한 편의 시가 등장한다.












앞에 소개되는 표준어로 된 시들은 단정하다. 뒤에 소개되는 방언으로 된 시들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측면에서 촌스럽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낱말들이 불려나와 독자로 하여금 생경하기는 하지만 어디선가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을 끌어낸다. 표준어로 쓴 시가 현재의 시간을 장악하고 있다면 방언으로 쓴 시는 과거의 시간을 장악한다. 과거의 시편들에서는 이상하게도 소월의 느낌도 묻어나고 백석의 느낌도 묻어난다. 아름다웠던 시절 그 시절의 아름다운 시들이 불러일으키는 리듬감이 묻어난다.












시집을 뒤져봐도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이라는 표제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 좀 가져다 주어요>라는 시에서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 /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청동의 시간은 군인들이 자라는 시간이다. 호메로스의 고전 <일리아스>를 읽다가 보면 청동으로 만든 창을 들고 살육의 전쟁을 벌이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청동은 삶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와 살상을 위해 고대로부터 존재해왔던 것 파괴와 살상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대척점에 있는 땅속의 감자가 사는 감자의 시간은 파괴와 살상이 없는 것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땅 속에서 자라는 감자는 어느 순간 아이들로 바뀌어 읽힌다. 아직은 감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어린이들을 지키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허수경 시인이 “우리는 촛대 저 물렁거리는 밝음 아래 대지에 떨어지는 붉은 콩 같은 기름을 받는 말을 견뎌내는 촛대”(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우리는 촛대 중에서 , 허수경 시인)라고 쓴다. 이미 자라서 어린이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 우리가 어린 것들을 위해서 해 줄 일은 말을 견디고 기름을 받는 일이다. 그것들이 떨어져 땅 속에서 자라고 있을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게 하는 일이다. 태양처럼 한 줌의 햇볕으로 아이들을 싱그럽게 자라게 하지 못할 양이면 달처럼 아스피린 같은 달처럼 , 삼키면 속이 다 훤할 것 같은 달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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