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문학과지성 시인선 347
이민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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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하는 이야기지만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조심스럽다. 소설은 작가와 떨어진 , 드러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는 작가와 떨어질 수 없는 속살이라고 하거나 상처라고 해야할 것들을 대면하여 시선을 돌리지 않고 직시해야하는 까닭이다. 공감과 전이는 치명적이다.



어떠한 창작물이든 작가가 생산한 순간 해석과 해설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당한다. 해석과 해설에 대한 소유권은 창작물을 읽는 사람 , 수용하는 사람 즉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가 된다. 신형철 씨의 해설을 읽다가 보면 이것에 대한 언급을 한고 있는 대목이 있다.




창작자는 작품을 통제할 수 없다. 작품이라는 결과는 창작자의 의도를 초과할 수 있고 , 수용자의 해석은 그 결과를 또 한 번 뛰어넘는다.




-<몰락의 에티카> ‘어제의 상처 오늘의 놀이 내일의 침묵’




창작자가 만들어 낸 작품은 작가가 생각하지 않았던 방향의 극한으로 치닫을 수 있기도 하고 극한에 이른 의미들은 수용하는 개별자들의 환경들에 굴절되어 수용되며 이러한 수용은 원래의 굴절범위를 훨씬 넘어서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위대한 결과에 이르기도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는 읽히는 사람들의 오독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수용된다는 말일 듯하다. 시가 뿜어내는 다양한 의미들과 기호들 이미지들이 개인이라는 굴절체를 만나 산란되거나 집중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 읽는 자들이여 미치고 발광한다고 손가락질 받을지라도 오독하라. 천만편의 시들 중에 자신에게 맞는 한 편의 시를 찾고 졸한다 해도 좋은 것일지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오독(誤讀)한다.



이민하 시인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신형철 씨의 <몰락의 에티카>를 통해서다.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이라는 제목을 기억하고 젊은 시인들의 세로운 시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읽었던 것이다. 신형철에 의해서 뉴웨이브 새로운 물결로 명명되어진 부류의 시인이었다. 이름을 알게 되고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신형철 씨의 해설로 만나는 단편적인 - 단편적이라는 말은 해설을 용이주도하고 논리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들을 가져와 쓰기 때문이다. - 시들이 아니라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의 완전한 시를 만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의 길이에 한 번 놀라야 했고 , 이미지들의 모호함에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내가 찾아낸 시의 환상성 혹은 이미지의 모호함의 문장은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예를 들자면 ‘달이 내 몸에 마지막 빨대를 꽂았지요 나는 노란 분화구가 되어 불멸의 이름을 얻었지요’ 같은 문장이다. 환상성에 더 가까운 문장인데 달이 빨대를 꽂았을 때의 느낌은 어떤것일지 궁금해지는 문장이다. 달이 가진 노란색의 이미지가 내 몸에서 피어나 출혈하듯 번진다. 시를 이야기하며 소설가들을 가져다 쓰긴 뭣하지만 황정은의 몽환적 환상성과 김태용의 그로테스크한 환상성과는 또 다른 이민하 시인의 환상성이다.



‘밤새 키보드를 두드리며 편지를 썼는 걸. 그래. 어둠이 더 밝은 시대에 잠은 죽음보다 못한 타이밍이지’라는 <악수놀이>의 한 문장을 읽는다. 어둠이 밝음보다 더 밝은 시대에 잠은 죽음보다 못한 타이밍이라는 웅얼거림에 마음이 쓸린다. 잠든다는 것 그것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죽음의 예행연습일 터였다. 위안을 받는 것 죽음의 제의와도 같은 잠들만이 겨우 어두운 시대를 살아내는 방법이다. 죽지 못하고 잠들어야 하는 타이밍 순간의 찰나 찰나의 어긋남이다. 슬픈 일이다.



신형철 씨의 해설의 제목은 어제의 상처 오늘의 놀이 내일의 침묵이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이민하 씨의 시집은 사실 3악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3악장을 굳이 나누자면 어제 오늘 내일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신경 써서 읽지 않아도 좋다. 다만 눈에 띠는 것은 2악장의 대부분이 ‘~ 놀이’로 끝나는 놀이 연작으로 읽히는 것은 신형철 씨의 언술과 상통한다. 놀이의 방법은 언어를 통한 말과 의미의 유희다. 유희의 산물은 때론 발랄해보이지만 우울함을 기저에 깔아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세세하기 설명하기 힘들다. 전체적인 이미지들이 거대한 의미를 만들기 때문일까 시들의 전반에 숨겨놓거나 드러내놓은 이미지의 편린들이 전체의 그림판에 두고 봤을 때 어떤 그림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하기는 한 시인이다. 아직까지 해밝이가 시작되지 않은 산 운무가 가득하여 그 산의 선명하고 명징한 굴곡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산의 이미지다. 환상성을 입은 시들 ,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환상성을 입은 글들의 이면은 환상성의 농도와 정비례로 피폐하다고 생각한다.



3악장의 끝에 다다르면 이민하 시인은 “당신이 들은 건 그의 신음도 소파의 한숨도 아니고 당신의 독백일 뿐이죠. 매일 밤 복도를 지나는 당신은 고집스런 변장술사 이긴 이야기는 3인칭들의 끝말잇기놀이지난 겨울에 끝난 것일 수도 있고 ,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죠”라고 쓴다. 이제까지 시가 드러낸 낱말의 표면 의미와 이면 의미 속에서 유유히 혹은 뽐내듯이 오독하던 독자들에게 날리는 이민하의 훅이다. 오독해온 모든 것들이 당신의 독백일 뿐이라고 아무리 다양하고 논리적인 오독이라도 창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는 독자들의 독백 , 독자들이 읽고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의 독백이다.



다시 이민하 시인은 “침묵의 음역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의 노이즈는 계속됩니다.” 위로와도 같은 말이다. 침묵의 음역이란 것이 존재할까? 침묵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 가장 흔히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고 생각한다. 음역뿐 아니라 이민하 시인이 말하는 침묵에 도달하기 까지 계속되는 노이즈도 설명 가능하다.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라 거대한 소리다. 너무나도 많은 소리들이 모여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소리의 형체도 가지지 못하고 노이즈에도 미치지 못하는 광할한 소리다. 절대 침묵 , 침묵의 음역에 도달할 대까지 너와 나 뿐이 아니라 우리의 노이즈가 필요하다. 침묵은 소리가 없고 소리가 없는 침묵은 거대하다. 거대한 것은 쉬이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이민한 시인의 시가 일반적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청음범위를 넘어선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민하 시인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을 다 읽었다. 이해되기 쉽지 않은 시들이다. 서정성의 세례를 받은 내가 읽기에는 아직은 머뭇거리게 되는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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