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극장 문학과지성 시인선 190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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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시인의 <키스>를 먼저 읽고 시간이 지나간 후에야 <처형극장>을 읽는다. <키스>를 읽었을 때 푸른색의 이미지를 느꼈다면 이번 시집 <처형극장>을 읽을 때는 죽음의 이미지가 시집 전반을 뱀처럼 휘감고 있는 이미지를 느꼈다. 연대를 따져보면 <처형극장>이 먼저 출간 되었고 <키스>가 출간되었다. 그렇다면 죽음의 이미지가 만연해 있는 것이 먼저였고 그나마 정제되고 단련된 모습의 <키스>가 뒤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깊어지지 않았고 옅어져서 세상에 제법 적응해가는 것 같아 보인다.




현실은 ‘신들도 도망 다니’는 곳이지만 시인은 ‘세상의 근골을 읽’으려 애쓴다. 드러난 세상의 표피들이 아니라 표피 뒤에 숨겨진 진피 혹은 이면을 읽으려 한다. 시인으로 태어나게 된 자들의 공동된 숙명 혹은 천형이다. 내가 보기에 젊은 강정이 읽은 세상은 그리 살만한 곳이 못 된다. 세상의 근골을 탐사하는 강정은 그 기저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어떤 식으로 우리 세상에 드리워져 있는가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죽기 위해서 목을 매달고 있다. 정말 죽을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연극 속에서 죽기를 원한다. 연극은 내 정말 삶일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흔히 시쳇말에 인생은 연극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수사를 그대로 차용한다. 그렇다 죽지 않는다면 연극은 끝이 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계속 되는 삶을 향해 ‘이런 제기랄 이렇게 맥도 못 추고 다시 살아야’한다고 찬탄한다.




현재의 삶 속에서 죽음의 수용은 기민하게 이루어지는데 ‘모든 사소한 죽음을 수락’하려고 한다. 죽고싶은 삶이다. 죽음이 현실을 외면하는 가장 안전하고 완전한 방편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 강정은 죽음을 노래하고 경외하고 숭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의 시들을 읽다보면 죽음이 지배하는 삶에 대해서 약간 빗겨나 있다.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이 천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연극이 끝나는 지점일지라도 그는 무대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되려 죽을 수 있을까라고 사람들에게 묻는다.




인간들이 살아내는 삶의 연대기를 대충 구획해 보면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대분할 수 있을 것인데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생을 살아가지만 청년기에서 죽음의 수용은 커다란 파문이며 굴절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무의식의 한 부분이 의식적인 부분으로 명징화되는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추상화되어서 의미가 모호하다가 청년기가 지나서 명징해진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의 끝을 스스로 인식한다는 것 말이다.




‘팔다리가 묶여 있’지만 ‘벗어나고 싶지 않다‘ 벗어나고 싶지 않은 곳에서 ’이곳에서 죽‘으려고 한다. 처형당하는 극장에서 말이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담담히 받아들인다. 강정의 시가 다행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외면하면서 침울하게 혹은 경박하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나아간다. 개진하는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것이다.




강정의 시집 <처형극장>을 읽으면서 죽음 이외에 시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적화자에게 아버지는 공포와 억압 혹은 두려움의 존재다. ‘아버지가 외출하셨다. 나는 자유다’라고 말하며 ‘이제는 엄마가 된 계집들 불러모아 떼씹을 벌이’겠다고 하고 ‘침묵이 나를 만들었음을 알았을 때에도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다. 여기서 지루하게 콤플렉스니 뭐니를 따져도 재미없는 일이다. 식상한 비유처럼 식상한 수사며 이론이다.




시의 좋은 구절들이 별빛달빛처럼 많겠지만 마지막 시의 마지막 연을 한 번 보자 ‘바다와 노을이 섞여 피가 되는 곳/ 다시 바다에서 /입관과 재생의 절차가 다시 , 거기서 , 개진되었다’고 쓴다. 태초에 모든 생명이 시작되었다던 바다는 이미 거대한 자궁이다. 자궁 속에서 강정 같은 이 많이 태어나거나 사산되거나 할 것이다. 죽고 태어나고 살고가 반복된다. 아 이 얼마나 지루하고 멸렬하고 다분한 삶을 언제까지 반복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역시 시에 대해서 쓰는 것은 어렵다. 글을 쓰기 위해 뽑아둔 몇 문장들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글을 마무리 짓는다. 많은 문장들은 욕심이고 헛된 것이다.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바람 사이로 죽음의 기운이 불어와도 좋겠다. 바람이 이끄는 쪽으로 그저 나아갈 것이다. 죽겠다고 죽고싶다고 죽는 것이 그리 쉬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죽음을 대면할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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