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소년의 외출 문학동네 시집 87
김근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2일 김근의 <뱀소년의 외출>을 다 읽었고 그것에 대해서 감상평이라도 남겨볼까 해서 생각되는 것들을 적어둔 메모다. 소환해서 이야기해야 할 인물들로 거론된 신형철 박상륭 박민규.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를 통해서 내게 김근의 존재를 알렸고 김근은 자신의 시를 통해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증오하는 박상륭을 기억나게 만들었고 박상륭에게 찬사하는 표현인 연구의와 개업의란 표현을 쓴 박민규까지 소환되었다.

 

김근의 시에서 어머니와 항아리가 초반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이미지가 박상륭의 저작과 맥이 닿아있고 -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디오게네스의 항아리를 생각나게 만들던 강남장의 독짓는 늙은이의 항아리는 죽음의 유사체험을 하는 장소 즉 묻히지 않은 관이다. 어머니와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세 따님이라는 중단편을 통해 어머니이기도 하고 아내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한 여성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뱀소년의 외출>에서 뱀소년은 김근이 밝히고 있듯이 사복불언에 연관되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박상륭의 소설 유리장에서 등장한 사복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근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쓴다.

 

3) 뛰며 놀며 자랐던 서울 변두리의 판잣집들과 골목들은 사라져 없다. 배꽃 흩날리던 자리엔 고층 아파트들이 우뚝 우뚝 일어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인데 말에 무엇하랴 사라지는 것들은 다 어미다. 사라진 것들은 그러므로 다 신화다.

 

4) 자연으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들이야말로 세계가 아직도 견고하다고 믿는 자들일 것이다. 어느 틈에 부드러운 피부에 싸여 있는 세계가 제 피부에 생채기를 내어 시뻘건 속살을 보여줄 때 그들은 기절초풍하고만 말 것인가 어미에게 돌아간들 이미 쭈글쭈글 천만 개 주름을 단 자궁일밖에 어하리 넘차 어어허

 

5) 삼국유사 의해편 사복불언 - 사복이 외출을 했는지도 확인할 길 없지만 죽은 어미를 장사지내기 위하여 원효에게 찾아간 것만은 분명한 듯 보인다. 열두 살잉 될 때까지 아비 없이 과부의 몸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오직 바닥에 누워만 있었다. 한데 그가 원효에게 찾아가는 길은 구렁덩덩신선비가 제 아내에게 허물을 맡기고 과거를 보러 가는 길 같지 않았겠는가? 시간이나 공간 따위가 거기 정해져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끈적거리는 폐수처럼 사람들이 흘러다니는 종로 바닥을 와보지 않았다고 누가 얘기할 것인가. 그 때 모든 사물과 세계가 제 본디 형상을갖추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사복이 죽은 어미를 지고 띠풀을 뽑아 연화장으로 마침내 들어가기 전까지 구렁덩덩신선비가 뒤늦게 찾아온 본처와 함게 구멍 속 세계에서 행복하기 전까지 딱 그전까지만 시다.

 

유랑의 덧붙이기에 불과한 것이지만 원효는 죽은 사복의 어미를 위해 게송을 지었다. '죽는 것이 고생이다. 태어나지 마라 , 태어나는 것이 고생이다.'라고 게를 설하는데 듣고 있던 사복이 길다고 면박을 주자 한 줄로 죽고 사는 것이 모두 고생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죽살이가 고생인 것은 살아보아야 아는 것이고 죽어 보아야 아는 것이지만 삶이란 것을 살아가는 것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죽음을 경험하기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한계성에 부딪힌다. 지난한 것이며 지복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현실을 지금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로 유랑은 들었다.

 

6) 노래로 가는 길은 멀다. 온통 흐물거린다. 

 

6번을 통해서 김근은 잡설꾼과 패관꾼이기 보다는 오르페우스 즉 가인이 되고자 한다는 열망을 드러내었다. 김근을 읽으면서 박상륭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읽은 사람들만이 알수 있는 암호와 같은 문장과 이미지들이 산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은밀한 종교단체의 비밀 문양처럼 말이다.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이렇게 쓴다

 

  귀신 들린 듯 행복하거나 자멸적으로 불행하거나 둘 중 하나다. 시인에게 중간은 없다. 한 청년이 있어 가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나 애초에는 그도 행복한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선을노래하여 사랑을 얻은 가인오르페우스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찬미의 대가였고 서정의 사도였다. 그러나 에우리디케의 죽음과 더불어 사랑은 몰락했다.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무심결에 배반하는 순간 연인은 두 번 죽었다. 이제 오르페우스의 노래는 충만한 연가가 아니라 참혹한 비가가 되었다. 생의 후반기에 오르페우스는 이보다 더 불행할 수없는 애도의 대가가 되었고 서정의 불구자가 되었다. 오르페우스의 삶은 행복의 시기와 불행의 시기로 날카롭게 절단된다. 중간은 없다. 가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마침내 노래할 수 있게 된 청년이 행복한 오르페우스의 가집을 보내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내온 것은 끝내 불행한 오르페우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내력이구나. 그이 밖에서 무엇이 몰락했고 그의 안에서 무엇이 배반당했던 것인가 어째서 불행한 오르페우스처럼 저 자신 갈가리 짖겨 죽어야만 끝장날 영원한 애도의 사도가 되었는가 그 내면의 추이를 따라가기 위해선 뒤에서부터 읽어야 한다.

 

신형철의 이 말은 전적으로 맞다. 앞에서 읽게 된다면 그나마 아름다웠던 가인 오르페우스인 김근을 만나지 못하리라. 물론 <사랑>이란 시로 서정성을 보여주려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유혹이며 그로테스크로 진입하기 위한 위장이고 허위다. 아가리를 벌린 거대한 뱀 문두룸처럼 말이다. 섣불리 책장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 쉬이 무저갱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한 일이다. 조심하라 예방주사처럼 4부를 먼저 읽고 1부를 읽으라 그러면 겨우 함몰은 피하게 될 것인즉 안타깝게도 유랑은 의도된 함몰인지 침윤인지도 알 수 없는 처음부터 읽기를 시작해 김근의 풀어놓은 거대한 시로 꾸며진 아가리에 스스로 몸을 던져버린 꼴이 되었다. 참혹한 비가를 부르는 오르페우스 김근의 목소리는 배를 난파시키는 세이렌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던 것인데 그 비참함과 그로테스크함이란 아름다움의 일면이었을 따름이다. 서정성이 거세당한 - 혹은 스스로 거세한 - 서사의 나락은 김근의 시의 한 축이다. 오르페우스의 비가다.

 

박상륭은 자신을 소설가라고 칭하지 않고 패관꾼 혹은 잡설꾼이라고 칭하는데 김근의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김근을 박상륭을 좆아가는 패관꾼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신형철이 말한 오르페우스인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결국 노래하는자와 말하는자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되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노래란 것은 아름다움을 취하고 패관꾼은 그로테스크함을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 이건 만고 유랑만의 생각이니 논리를 따지려고 하지 말라 - 그로테스크함이라는 용어를 쓸 때 관문처럼 넘어야 할 시인이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넘어야 할 산 그렇다. 그로테스크함의 준령인 기형도다. 김현에 의해서 영원히 죽지 못하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자 기형도다. 김근은 그로테스크함에선 기형도를 넘어서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그로테스크함이란 개인적 정의로 기괴함에 가깝다. 김근은 음울함에 있어서는 기형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기형도의 그로테스크함이 음울함이 기준이라면 김근은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고 기괴함이라면 기형도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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