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가 있는 사막
해이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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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이었던 모양이다. 온라인에서 만나 교우하던 이들이 온라인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와서 해후한 적이 있었다. 온라인 속에서 살아온 닉네임만큼이나 다양한 외양과 성격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이었다. 그 곳에서 만난 지인이 소개했던 책이 <캥거루가 있는 사막>이었다. 책을 구입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글쓴 이는 해이수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 모양이다. 설핏 그의 존재는 해이수라는 이름 속으로 감추어졌다. 어떠한 의미인지 알 수 없으나 글을 읽으면서 필명 아래로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는 했으나 글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의 세계로 이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캥거루가 있는 사막>은 표제작인 '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포함해서 총 여덟편의 글이 모여있는 소설집이다. 소설집은 분절된 의식의 편린들이 모여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소설집의 묘미는 분절된 의식의 개별적 혼합에 의한 재구성이다. 편린들을 주워모아서 진실인지 허상일지 알 수 없는 존재를 재구성하는 맛이 있다.

 

    해이수의 소설집에서 중심에 있는 것은 아버지의 이미지 , 형의 이미지 , 이방인의 냉철한 이미지 정도가 아닐까? 아버지에게서 어쩔 수 없이 피내림한 낭만주의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혈관 아래로 유유히 흐른다. 형에게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 혹은 현실의 갑갑하고 팍팍함을 수혈받았다. 아버지와 형에게서 받은 것들을 포장한 것은 투박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타자 혹은 이방인이 겪는 냉혹한 시선으로 갈무리 했다. 이러한 편린들이 해이수의 의식을 반영한다.

 

아버지의 로망은 '몽구 형의 한 계절'과 '출악어기'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몽구 형의 한 계절'에서 나를 몽구 형에게 보내면서 글쟁이로 거듭나길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소설가로서의 로망을 기대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출악어기'에서 아버지는 고전을 강독하면서 길 위의 삶을 동경하고 길 위에서 살고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낭만주의자의 삶을 그려내기도 한다. 해이수는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피내림을 했지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다. 고상해 보이던 아버지는 몽구 형과의 대화에서 저급한 언어들로  이제까지의 언사들이 허식이었음을 폭로하고 출악어기에서도 길 위의 삶이 어떠한 의미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둔 아이들을 보기 위한 여정이었으며 고전을 강독하는 것도 허식었음을 까발린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낭만이지만 자기복제에 앞서서 철저히 깨부수는 자기부정의 의식을 행한다.

 

    '몽구 형의 한 계절' '어느 하오의 빈집털이' '돌베개 위의 나날'에 나타난 형 혹은 선배의 이미지는 소설가 혹은 소설의 임무인 현실에 대한 직시를 보여준다. 몽구 형은 '삐루 꼬뿌'를 깨고 다시 자신이 간직한 매실 장독을 나를 통해 깨어버리게 함으로써 외면했던 현실로 귀환을 하고 , '돌베개 위의 나날'에서 호주 유학생의 삶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거나 판타스틱하지 않음을 불자(불법체류자)이면서 청소업을 하는 선배의 입과 행동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느 하오의 빈집털이'에서도 선배의 모습은 안정되어있지 않고 뒤틀어진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낭만이 결여된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낭만의 핏톨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엔 마음이 일그러진 장애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슬픈 것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현실을 살아낼 재간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데서 온다.

 

    이방인의 냉혹함이란 형의 현실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호주 유학생 , 유학생 청소원 , 여행 가이드 등으이 해이수의 중심인물이지만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는 이방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가 가질지 모르는 판타지를 일말의 망설임 없이 부순다. 현실은 판타지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판타지 포장된 사살성과 인과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곳임을 해이수는 보여준다. 해이수가 선택한 글쓰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글쓰기 전략을 구사한다. 극단적 리얼리즘도  아니고 리얼리즘이라고 규정하기도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해이수의 리얼리즘이라고 해두어야한다. 적당하게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중도적 리얼리즘이라고 해두어도 좋겠다. 

 

    '환원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한다. '환원기'는 해이수의 글쓰기에 대한 자기 고민의 토로이다. 스승의 글을 훔쳐 등단한 작가는 스승의 화두를 다시 생각한다. 호리병 속의 새에 대한 화두다. '너는 네 안의 칼자루를 두고 왜 남의 칼자루를 들려고 하느냐'는 스승의 일갈은 글을 쓰는 자라면 꼭 한 번 이상은 고민해왔을 문제다. 자신의 칼로 자기 글 속에 허상과 허깨비 우상들을 베어낼 수 있을 때 즉 자기 자신에게 할복을 행할 수 있을 때 타인의 칼자루를 빌리지 않아도 스스로의 글로 타인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고민이다. '줄탁지기'라는 고사가 인용된다. 병아리가 쪼는 지점을 어미닭이 정확히 쪼아주어야 병아리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고사인데 어긋나면 세상 빛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사제의 관계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미가 병아리의 울림을 듣고 거기에 반응할 수는 있어도 어미가 먼저 껍질을 쪼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미와 병아리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변형되기도 하고 다시 글쓴이와 독자와의 관계로도 변형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쓴 글에 독자가 반응하는 것 공명이 일어났을 때 좋은 글은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마지막으로 표제작 이야기를 해야할 시간이다. 호주의 사막을 여행하는 나는 코바와 우미코를 차례로 만난다. 나는 동성동본 애인 때문에 고민이다. 현실과 도덕적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관념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관념의 싸움에서 형체가 없는 관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코바와의 여행에서 캥거루는 후진이라는 것을 모르게 운명지어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버스를 향해 뛰어드는 캥거루는 그렇게 운명지어졌다는 것이다. 우미코와의 만남을 통해서 나는 비밀에 대한 것을 묻어두는데 나는 그 비밀을 마지막에 풀어본다. 동성동본의 문제보다 더 윤리적으로 지탄받을 형국의 근친상간의 문제가 우미코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자신이 처한 문제만이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더 큰 문제를 부각시키므로써 다시 사막과도 같은 현실로 돌아가서 사막이 아무리 덥고 힘들거 살기 힘든 환경일지라도 캥거루가 태어나면서 피내림한 운명이라는 것을 향해 돌진한다. 관념이 지배하는 세상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다. 그렇게 운명지어졌다면 캥거루처럼 부딪혀 죽으면 그뿐 후진은 없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캥거루는 사막을 가로질러 지금도 뛴다. 버스는 캥거루를 조심하고 비켜간다. 그렇게 현실은 진행된다.

 

    해이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관념도 쓸만치 써먹었고 경험도 쓸만치 써먹었으니 이제 어떻게 칼자루를 들고 설칠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자신 속에 있는 칼자루를 들어 허상과 관념을 까부수고 독자들에게 위협적이지만 그 위험성 때문에 오르가즘을 느낄만큼의 흥분을 전해줄지 궁금해진다. 아니면 타인의 칼자루를 빌어 관념과 허상들 사이에서 칼질을 할 것인가? 해이수의 다음 글들은 언제 소설집이 되어 나올지 소설이 되어 나올지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 오르가즘에 카타르시스에 죽음을 맞으면 나로서는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라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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