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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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나무에 대해 생각했다.

이 종이는 어디 심겨 있던 나무였을까.

그 나무가 한껏 뿌리를 뻗고 햇살과 비를 맞으며 쑥쑥 자랐을 숲을 상상했다.

비로소 도무라와 숲의 풍경이 겹쳐졌다.


사람이 어떤 계기로 어떤 일을 진로로 선택하고 그 세계로 깊숙이 발을 디디는 일.

취업 전쟁이라는 말이 방불케 하는 현 시점에서

이런 일의 세계를 그것도 소설로 읽는다는 게 퍽이나 한가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작가는 피아노 조율사의 세계에 빗대어

우리가 세상을 움직이는 일, 

당신이 지금 생계를 위해서건 꿈을 위해서건 하고 있는 그 일의 세계를 

조근조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최대한 구체적인 대상의 이름을 알고 그 세부를 떠올릴 수 있는 것, 이게 생각보다 중요해."(42쪽)

"부드러운 소리를 원한다고 했을 때에도 의심해야 해. 어떤 부드러움을 상상하는지. 정말로 부드러움을 필요로 하는지. 기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일단은 의사소통이야. 되도록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그 이미지를 제대로 확인해야 해."(45쪽)


홋카이도에서 나고 자란 도무라. 우연과 운명의 가운데서 만나게 된 피아노 조율사. 그리고 그 직업의 세계로 한 발씩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무엇이 정확한 소리인지 모를 막연한 세계에서 구체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이야기. 서두름과 조급함이 없는, 그렇지만 차근차근 하다 보면 어느새 정직한 성장이 있을 거란 이야기.


재능이라는 단어로 도망치면 안 된다. 포기할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된다. 경험이나 훈련, 노력이나 지혜, 재치, 끈기, 그리고 정열. 재능이 부족하다면 그런 것들로 대신하자. 어쩌면 언젠가, 도저히 대신할 수 없는 무언가의 존재를 깨닫는다면 그때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두렵지만. 자신에게 재능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분명 몹시 두려운 일이다.

"재능이란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감정이 아닐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은 집념이나 투지나, 그 비슷한 무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야나기 씨가 차분하게 말했다.

(143쪽)


"목표로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돼서는 안 돼. 콘서트가 됐든 콩쿠르가 됐든 피아노는 연주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해. 조율사가 염치없이 자기주장을 해서 어쩌려고." (152쪽)


한 편의 소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재 일을 하고 있는 나의 세계와 자꾸 겹쳐보여 몇 번씩 다시 구절들을 읽고 또 읽게 되었다. 너무 정직하기도 하고 조금 느린 도무라를 어쩐지 자꾸 응원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숲 입구는 어디든 있다. 숲을 걷는 방법도 분명 다양하다." (206쪽)


착할 선과 아름다울 미 자가 모두 "양(羊)"에서 따온 문자이며,

양털로 만든 해머와 강철로 된 현을 간직한 피아노는 

그러므로 선함과 아름다움을 처음부터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 

우리가 어느 숲에서 어떤 길로 걷고 있든 각자에게 중요한 건 

차근차근, 히트 앤 런이라는 잔잔한 선율의 아름답고 착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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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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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읽는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도무지. 이런 인간들이란. 아니, 이런 남자들이란.

 

인천 어느 편의점 앞, 무지개색 파라솔 밑에 모인 건달들의 이야기들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손발 다 묶인 채 삼 일 동안 흙구덩이에 파묻혔다 살아난 기적의 주인공 연안파 보스 양석태와

그의 일당들의 꼬이고 꼬이는 한 편의 소동극이다.

 

 

 "쉰 살이 넘어가면서 그는 오래전에 날아간 머리카락처럼 자신의 인생에서 좋은 시절이 모두 떠나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더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깨달음으로 인한 우울한 기분은 어딘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물귀신처럼 들러붙어 뒷덜미를 잡고 늘어졌다."

 

누군가에게는 살아 있는 전설이지만, 그 전설인 양 사장은 사실 노화에 승복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사업을 미끼로 던지고, 다이아몬드를 빼돌릴 큰 건을 제안하며, 끊임없는 싸움을 걸어온다. 숨 돌릴 틈 없이 웃음이 터지고 자꾸 일을 만드는 아랫것들의 소동이 페이지를 끝까지 넘기게 만든다.

 

인생이란 과연 생각한 대로 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던가

어김없이 "구라의 향연"을 펼치는 천명관표 소설 한 권이었다.

낄낄거리며 웃음이 터지니 지하철에서는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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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전쟁
장강명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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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다! <표백><한국이 싫어서><그믐...> <댓글부대>까지 활발하게 책을 내고 있는 작가. 

예판 때부터 두근두근 기다렸고 예쁜 양장 노트와 함께 도오착. 빠밤!

 

이 소설은 첫 문장부터 김정은 이후의 사회를 그린다.

"술과 이념은 처음에는 사람을 취하게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북한 김씨 왕조는 붕괴되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독일에게서 교훈을 얻은 남한은 분계선을 더욱 철저히 감시하고, 북에서 넘어오는 난민들을 다시 돌려보낸다. 왜? 그 수많은 난민을 받다가는 망할 게 뻔하니까.

통일이 되면 우리는 대박이고,

통일이 되면 우리는 자유로이 삼천리 금수강산, 백두산을 오가고,

통일이 되면 한민족 다같이 화합하고 세계 초강대국으로 거듭날 거라던

허울 좋은 구호를, 근거 없는 희망을, 헛된 기대를 와장창 무너뜨리고

장강명 작가는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목표를 잃은 북한 특작부대원들은 세계 최대 필로폰 생산을 담당하는 기업들을 차지한 마약조직으로 둔갑하고,북한의 보통 사람들은 시장경제에 애써 적응하며,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은 치안 유지를 위해 북한으로 파견된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에 등장한 주인공 장리철.

김씨 왕조 말기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감당할 수 없는 비바람이 쉬지않고 몰아치는 혼란의 바다 같은 곳이 되었다. 리철은 자신이 낡은 뗏목 하나에 의지해 그 바다 위에 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어떤 때에는 밧줄을 동여매고 뗏목이 나가는 방향을 조정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에는 그저 매사를 되는 대로 놔두기도 했다. (중략)

그는 미친 나라에서 태어났다. 미친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항상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언제라도 주변의 모든 사람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077-079)

주인을 잃은 군견 같은 사내 장리철이 등장하면서부터, 소설은 본격 액션으로 흘러간다. 이전 소설들보다 더욱 파이팅이 넘치면서 흥미진진하다. 또 장강명 작가가 보는 특유의 사회 꼬집기 기술도 더욱 향상되었다. ㅋㅋㅋ

두꺼운 분량이 부담스러울 수 있으나 끝까지 보게 한다. 

무엇보다, 장강명 신작이다.

달리 더 뭐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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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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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귀퉁이를 계속해서 접는 바람에 두툼해져버렸다.

 

구병모 작가의 글에서는 문장마다 힘이 넘친다.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문장이지만 그 속은 베테랑 권투선수의 노련한 잽처럼 오랜 시간 고민해온 응축된 생각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래서 속도감 있게 읽히면서도 꼭꼭 씹어 체하지 않게 노력하게 된다.  

 

저 멀리 이국에서 들려온 아들의 사고 소식. 무엇 하나 제대로 명정에게 설명되지 않는 죽음. 그런 아들에게서 발신된 생존 신고처럼 도착한 은결이라는, Robot.

 

명정은 아들의 이름이 될 뻔한 이름을 붙여주고 곁에 두고 세탁소 일을 가르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동과 언어의 뉘앙스까지 입력하면서 이 소년은 점차 0과 1의 세계를 사는 로봇에서 오류라고밖에 설명될 수 없는 '변덕'과 '충동'을 일으키는 존재로 나아간다.

 

"어떤 냄새 같아?"

 

"잡풀이나 푸성귀를 태웠을 때와 유사합니다만 매캐하지는 않은 걸로 보아 인체에 그리 유독하지는 않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비유법은 익혔지만 그 비유가 매번 적절한지는 제가 모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따뜻하면서 조금 어른스럽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좀...... 고독한 냄새. 슬픈 냄새입니다."

 

언어체계가 엉킨다. 고독한 냄새가 인간 세계 어디에 질감과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 슬픈 냄새란 또 무엇인가. 일상의 시공간을 벗어난 어딘가의 좌표에 위치한 냄새를 표현할 언어가 그에게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슬프다니, 그에게도 정신이 있다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딱 이런 상황일 것이다. (107쪽)

 

소설을 읽는 동안, 거대한 지구 안에서 잠시 잠깐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를 이루는 가족에 대해서, 같은 순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떠올리며 가루세제 위에 마음이 사락사락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작가가 그리는 소설 속 인물들이, 매일 일상과 다투고 있는 나 같아서, 내 가족 같아서 꼭 내 눈앞에 시호와 준교, 세주와 명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로봇이 등장하지만 그 로봇은 마치 우리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 시스템을 갖춘 완벽한 존재인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돌이킬 수 없이 얼룩졌으나 어떻게든 입고 걸치고 끌어온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표백하는 불가능한 일에 대해 상상해본다. 그리고 낡은 옷가지 속에 파묻었던 때 묻은 기억들을 말갛게 씻어낸 뒤 햇볕에 널고 싶었던 매 순간의 충동들을 돌이켜본다. 지금까지 건조기 안에서 웅크리고 지내온 날들을, 물기 한 점 없이 바싹 말라 바스라지기 직전이었던 최소한의 생활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아이에게 이염되기를 바라는, 삶을 응시하는 기본적인 태도와 자존심과 신념 같은 것들을 꼽아본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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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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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마음을 뽀드득 뽀드득 문질러 탁탁 털고 햇볕에 내어 말리고 싶은 그런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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