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읽다가, 귀퉁이를 계속해서 접는 바람에 두툼해져버렸다.

 

구병모 작가의 글에서는 문장마다 힘이 넘친다.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문장이지만 그 속은 베테랑 권투선수의 노련한 잽처럼 오랜 시간 고민해온 응축된 생각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래서 속도감 있게 읽히면서도 꼭꼭 씹어 체하지 않게 노력하게 된다.  

 

저 멀리 이국에서 들려온 아들의 사고 소식. 무엇 하나 제대로 명정에게 설명되지 않는 죽음. 그런 아들에게서 발신된 생존 신고처럼 도착한 은결이라는, Robot.

 

명정은 아들의 이름이 될 뻔한 이름을 붙여주고 곁에 두고 세탁소 일을 가르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동과 언어의 뉘앙스까지 입력하면서 이 소년은 점차 0과 1의 세계를 사는 로봇에서 오류라고밖에 설명될 수 없는 '변덕'과 '충동'을 일으키는 존재로 나아간다.

 

"어떤 냄새 같아?"

 

"잡풀이나 푸성귀를 태웠을 때와 유사합니다만 매캐하지는 않은 걸로 보아 인체에 그리 유독하지는 않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비유법은 익혔지만 그 비유가 매번 적절한지는 제가 모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따뜻하면서 조금 어른스럽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좀...... 고독한 냄새. 슬픈 냄새입니다."

 

언어체계가 엉킨다. 고독한 냄새가 인간 세계 어디에 질감과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 슬픈 냄새란 또 무엇인가. 일상의 시공간을 벗어난 어딘가의 좌표에 위치한 냄새를 표현할 언어가 그에게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슬프다니, 그에게도 정신이 있다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딱 이런 상황일 것이다. (107쪽)

 

소설을 읽는 동안, 거대한 지구 안에서 잠시 잠깐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를 이루는 가족에 대해서, 같은 순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떠올리며 가루세제 위에 마음이 사락사락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작가가 그리는 소설 속 인물들이, 매일 일상과 다투고 있는 나 같아서, 내 가족 같아서 꼭 내 눈앞에 시호와 준교, 세주와 명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로봇이 등장하지만 그 로봇은 마치 우리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 시스템을 갖춘 완벽한 존재인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돌이킬 수 없이 얼룩졌으나 어떻게든 입고 걸치고 끌어온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표백하는 불가능한 일에 대해 상상해본다. 그리고 낡은 옷가지 속에 파묻었던 때 묻은 기억들을 말갛게 씻어낸 뒤 햇볕에 널고 싶었던 매 순간의 충동들을 돌이켜본다. 지금까지 건조기 안에서 웅크리고 지내온 날들을, 물기 한 점 없이 바싹 말라 바스라지기 직전이었던 최소한의 생활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아이에게 이염되기를 바라는, 삶을 응시하는 기본적인 태도와 자존심과 신념 같은 것들을 꼽아본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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