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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ㅣ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작가정신의 [소설, 향] 시리즈에서 발간한 중편소설이며, ‘소설, 향 리마인드’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개정판이다. 조경란 작가님은 ‘가족 서사’를
주로 그리는 작가님이며, 이 책 또한 가족 서사를 토대로 한다.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 요소, ’집‘과 ’시간‘에 귀속되어
고통을 겪는 존재들이다. 주인공 “이경”의 가족 구성원들은 불행의 근원이 가정임을 인식하면서도, 적극적인
변화를 꾀하려기보다는 오히려 구성의 고착화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적극성만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변화 없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도피’ 혹은 ‘죽음’뿐이라는
점이, 절망의 상징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모의 도피는, "이경"이 내심 의지하던 존재인 "옆집 남자"까지 홀연히 데리고 가버린다. ”이경“은 결국 수용을 택하는데,
능동적인 수용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답습으로 느껴진다.
시간와 가정의 공통점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시간은 객관적으로는 공평하나 흐름에 있어서는 개인차가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인물들은 시간을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감내해야 할 고통으로 인지한다. 그 시간은 마치 자아와 상관없이
무심하게 흘러가버리는 "강물"과도 같다.
"이곳에서는 시간도 늘 완류로만 흐르고 있다.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38p)
"강물은 내가 처음 온 날과 똑같은 형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저렇게 썩어 가고 있는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이제는 궁금하지 않다." (48p)
시간을 간주하는 척도는 두 가지가 있다. 시간을 축복으로 여기는지
혹은 저주로 여기는지. 이 둘 사이를 끈임없이 진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겠지만, 시간을 저주로 여기는 나날들이 삶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확실한 고통이다. "이경"은 장님들을 보며 "장님은 결코 웃는 법이 없다"(42p)라고 말하지만, 미래에 좌절만이 예상되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꽃은 핀다.
"채송화, 분꽃, 그리고 뒤늦게 핀 봉숭아꽃. 꽃들은 활짝 피어 있다. 이틀 동안 무섭게 비가 퍼부었고 나는 꽃들을 돌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물도 주지 않았고 쓰레기들을 골라내지도 않았다. 한데도 꽃들은 만개했다. 몇 개 대궁은 부러지거나 휘어져 있긴 하지만 뿌리가 뽑힌 것은 없다. 이상한
일이다. 강물이 범람했고 전기가 끊어졌었다. 목욕탕집 전체가
빗물에 휩쓸려 갈 정도였다. 그런데도 꽃들은 죽지 않았다. 활짝
핀 꽃들은 벌어진 대합 속살처럼 징그럽기만 하다. 나는 매운 손끝으로 꽃모가지들을 똑똑 부러뜨린다. 입을 꾹 다문다. 한쪽 손바닥이 채송화, 분꽃, 봉숭아 꽃잎들로 가득해진다."
(93~94p)
태풍에도 만개하는 꽃들, 징그러울 정도로 질긴 생존력이다. 하지만 꽃은 살아남아 아름다움을 전한다. 절망 속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표현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움직임』은 한 켠에 고이 모아 놓은 희망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여담으로, 떠나기 전에 다정해지는 사람의 모습도 인상 깊은 슬픔이었다. 사라져 버리기 전에 처음으로 불러준 ("신이경"이 아닌) "이경아"라는 목소리. 왜 사람들은 상실이 다가옴을 직감할 때 더
온화해지는 것일까?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것을 잘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 중편소설이라 단시간 내에 읽기 좋다. 초판이 1998년에 발행되었기에, 당시 시대상과 감성을 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흡입력 있게 흠뻑 빠질 수 있는 가족 서사 소설을 찾는다면,
이 책 『움직임』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 해당 콘텐츠는 작정단 12기
활동의 일환으로 출판사 작가정신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