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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함께 라캉을 읽는 방법

올해 들어 국외서적으로는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이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 Lacan)>(2007)이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499546&paperId=1032991). 노튼(Norton)출판사에서 나오는 'How To Read' 시리즈의 한권인데, 두어 차례 페이퍼에서 다루면서 조만간 국역본이 나올 거라는 소식도 전한 바 있다. 바로 그 책이 이번에 출간됐다.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떼로. '떼'라는 것은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을 포함하여 같은 시리즈의 책 10권이 한꺼번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전격적'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다.

나는 어제 아침에 8권의 책을 주문해서 오후에 받았다. 일단 집에 들고 온 책은 내가 원서도 갖고 있는 <라캉>과 <데리다> 두 권인데, 원서 <데리다>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아서 일단은 <라캉>의 서문만을 읽어보았다(사실 <라캉>의 원서도 한참만에 찾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더니 책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우리 뇌를 씻어내자'가 지젝이 붙인 그 서문의 제목이다. 아니 국역본의 경우엔 그렇다. 원서에는 따로 제목이 붙어 있지 않고 다만 'Let's try to practice a little brain-washing on ourselves'가 에피그라프(제사)로 달려 있을 따름이다.

 

 

 

 

서문에서 지젝이 먼저 짚고 있는 것은 지난 2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출판 100주년 기념과 동시에 하편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조류(new wave), 곧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국내에 출간된 책으로는 아마도 스티븐 존슨의 <굿바이 프로이트>(웅진지식하우스, 2006)가 이러한 조류를 대표하는 책이겠다(비록 원제 'Mind Wide Open: Your Brain and the Neuroscience of Everyday Life'는 국역본의 제목만큼 선정적이지 않지만 말이다). 최근에 다수 출간되고 있는 뇌과학 서적들도 이러한 조류에 한몫하는 것이고.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뒤프레슨의 책명이 <프로이트 죽이기: 20세기 문화와 정신분석의 죽음>(2004)인 것은 시사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상-마르크스와 몇몇을 제외하고 - 인간 사유의 근본원리에 대해 프로이트만큼 오류를 범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등장한 책이 <공산주의의 블랙리스트>(2000)를 이어서 출간된 <정신분석학의 블랙리스트>(2005)이다(역자는 '블랙북(Black Book)을 '블랙리스트'로 옮겼다. 미주의 책제목에 'noire'라고 오타가 났다). 두 권 모두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인데, "공교롭게도 이런 부정적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사이의 심오한 연대가 만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사망선고, 혹은 장례사(funeral oratory)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실 한 세기 전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견을 근대 유럽사에 끼워넣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세 가지 모욕'이란 생각을 발전시켰다. 다니엘 부어스틴이라면 '부정적 발견'이라고 불렀음직한 이 세 가지 모욕이란 (1)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에게서 우주의 중심이란 위치를 박탈한 것, (2)다윈이 진화론을 통해서 역시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박탈한 것, (3)프로이트가 무의식 지배적인 역할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자아(ego)가 우리의 집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 것 등이다.

그런데, 지젝이 보기에 정신분석학의 1세기가 지난 오늘날 (뇌과학을 통해서)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자기상에 보다 급진적인(파괴적인) 모욕이 출현하고 있다. 즉, "우리의 정신은 데이터 처리과정의 연산기계에 불과하며, 자유와 자율에 대한 감각도 기계 사용자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뇌과학과 비교한다면 정신분석학은 전복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최근의 모욕에 의해 위협받는 인간주의적 전통처럼 보인다."(7쪽)

요컨대, 현황은 이렇다: "(1)과학지식의 차원에서, 인간정신에 대한 인지심리학자들의 신경생물학적 모델은 프로이트의 모델을 대체하고 있다. (2)정신의학적 임상치료의 차원에서, 정신분석적 치료는 약물치료와 행동치료에 밀려 자신의 기반을 급격히 상실하고 있다. (3)사회적 환경의 차원에서, 개인의 성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적 규범의 이미지는 오늘날 압도적인 쾌락주의적 경향과 비교하여 더이상 타당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망선고와 추모는 성급하고 성마른 것이라 진단하다. 오히려 그의 목표는 "오늘날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시대가 도래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프로이트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론 "라캉을 통해 프로이트를 읽음으로써, 즉 라캉이 '프로이트로의 복귀'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

원문은 "[M]y aim is to demonstrate that it is only today that time of psychoanalysis has come. Seen through the eyes of Lacan, through what Lacan called htis 'returen to Freud', Freud's key insights finally emerge in their true dimension."이다. 여기서 강조한 대목은 국역본에서 누락됐다. 그렇다고 대세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약간씩의 누락은 뒤에서도 곧잘 나온다.  라캉의 프로이트 독해, 곧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통해서, 프로이트의 핵심적인 통찰이 갖는 진정한 차원이 마침내 나타나게 된다는 얘기이다.

 

 

 

 

라캉에게서 '프로이트로의 복귀'가 뜻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언어학적 재독해/재구성이다(때문에 "라캉의 핵심 개념 중 대부분이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놀라운 것은 이성적 자아가 그보다 훨씬 큰 영역의 맹목적이고 불합리한 본능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음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무의식 자체가 오직 자신의 문법과 논리에 복종하고 있는지를 입증했기 때문이다."

라캉의 해석/재독해에 따르면, "무의식은 자아가 정복해야 할 야생적인 충동의 저장소가 아니라, 외상적인 진실이 말을 하는 장소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동화시켜야 할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 

 

 

 

 

그렇다면, 라캉과 다른 정신분석학파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캉에게 정신분석학은 심리적 장애를 다루는 이론이나 기법이 아니라, 개인들을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과 대면시키는 이론이자 실천이다.(...) 라캉에게 정신분석 치료의 목적은 환자의 복리나 성공적인 사회생활 내지 개인적인 자기 성취가 아니라, 환자로 하여금 그/그녀의 욕망의 기본 좌표와 곤경을 대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라캉의 '프로이트의 복귀'는 임상분석에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라캉은 일생 동안 끊임없는 논쟁과 분열과 추문까지 일으켰다. 그는 1963년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파문당했으며, 그의 논쟁적인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서 페미니스트에 이르는 진보적 사상가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한데, 여기서 신경을 건드리는 건 '1953년'이 '1963년'으로 오기된 것. 국역본엔 '라캉의 생애'를 참조하라고 돼 있는데, 191쪽을 참조하면 라캉은 1953년에 국제정신분석협회의 산하기관인 파리정신분석협회 대표직을 사임하고 프랑스정신분석협회에 가입하며 이 때문에 파리정신분석협회로부터 제명(파문) 당한다. 참고로 라캉은 "그해 7월에 주디스를 낳게 될 마클레스(Sylvia Makls)와 결혼했다." '마클레스(makles)'에서 'e'가 빠졌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해 가을 라캉의 '전설적인' 세미나가 시작된다는 점.

그런 라캉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라캉은 탐욕스러운 독자이자 해석자였다. 그에게 정신분석은 구술(환자의 말), 혹은 기술(記述) 텍스트를 독해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라캉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독법을 실천하여 라캉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라캉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이야말로 지젝의 주특기 아닌가(나는 개인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보보크>에 대한 독해를 먼저 읽어보게 될 듯하다)!

"라캉은 최고의 임상학자였으며, 그의 임상적 관심은 그의 실천과 저작 전체에 스며 있다."(Lacan was first of all a clinician, and clinical concerns permeate everything he wrote and did.) 'first of all'은 '최고의'란 뜻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도이다. 라캉은 무엇보다도 임상학자(임상의)였다는 것. 한데, 그의 임상적 관심이라는 게 두루 망라하는, 편재(遍在)하는 것이었기에 지젝은 '임상'만을 따로 다루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임상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생략하고, 임상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물들이는 임상적 효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라캉의 임상적 위치에 대한 진정한 검증 방법이다."(Precisely because the clinical is everywhere, one can short-circuit the process and concentrate instead on its effects, on the way it colours everything that appears non-clinical - this is true test of its central place.)

마지막 절에서 'its central place'를 '라캉의 임상적 위치'라고 옮긴 건 부정확해 보인다. '(라캉에게서) 임상이 갖는 중심적 위치'란 뜻 아닌가? 다시 옮기면, "모든 것이 임상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있으며 대신에 그 결과(효과)들에, 임상적인 것이 임상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물들이는 방식에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임상의 중심적 위치에 대한 진정한 검증방법이다."

여기까지가 라캉에 대한 설명이라면 이 서문의 마지막 문단은 <라캉을 읽는 방법(How To Read Lacan)>의 전략에 대한 설명이다. 지젝은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을 통해 라캉을 설명하는 대신에(...) 라캉을 이용하여 우리의 사회적 리비도적 곤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 책은 중립적인 판정을 내리는 대신 당파적인 독해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모든 진실/진리는 당파적이라는 게 또한 라캉 이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엘리엇(T. S. Eliot)은 <문화의 정의에 대한 노트>에서 모든 선택은 청교도 종파주의와 무신론 사이의 선택일 뿐이라고, 종교를 생동감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주류 체제에 대한 종파주의적 분열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라캉은 그의 종파주의적 분리를 통해, 즉 쇠멸해가는 국제정신분석협회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프로이트의 가르침을 생동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라캉에 대해 해야 할일 역시 이와 같다."

역자는 'sectarianism'을 '청교도 종파주의'라고 옮겼는데, 그냥 '분파주의' 정도라고 봐야겠다('종파주의'란 역어도 자주는 쓰이는 건 아니다). 그걸 굳이 한정해서 '청교도 종파주의'라고 옮긴다면 뒤에 나오는 '종교(religion)'도 '기독교'라고 옮겨야 짝이 맞는다. 여하튼 라캉을 읽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마지막 제스쳐는 '정통적인' 라캉주의적 견해로부터의 분파주의적 이탈이다, 라고 지젝은 말하는 듯하다. 이것은 하나의 내기이다.

마지막에 붙은 미주는 이 책의 소스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은 라캉의 몇몇 기본 개념에 초점을 맞춘 입문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주제들은 지난 10여년간 내가 했던 작업의 중심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 이미 출판된 내 저서의 '해체 조립(canibalization)'이 될 수밖에 없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내 책에서 빌려온 구절들을 새롭게 각색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185쪽)

'변명을 하자면'은 'to compensate(보상/보완하기 위해서)'를 옮긴 것이다. 책의 이러한 해체-구성적(카니발적) 성격은 역자 후기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지젝 자신이 고백하듯이 이 책은 지젝의 이전 저서들에서 '빌려온 구절을 해체 조립하여 새롭게 각색'한 '지젝의 책'이다."(198쪽) 이 구절을 옮겨적은 것은 예전에 역자가 제기한 지젝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34520&paperId=989000 참조). '변명을 하자면'은 역자에게 더 어울릴 만한 문구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었다.

나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을 애독하는 사람들은 신간이라고 펼쳐 보면 이전 책에서 이미 본 듯한 구절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기시감’이 아니다. 때로는 거의 한 챕터 전체, 때로는 한 단락 그대로, 때로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채 자기-표절을 하고 있다.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 역시 새로 쓴 부분보다는 이전 책에서 오려 붙인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혁명이…>는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 전체가 그렇다.(...) 엄밀히 말해서 ‘지젝’의 책은 없다. (...) 그는 헤겔이 생산한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생산한 유물론을, 프로이트가 생산하고 라캉이 재생산한 정신분석학을 멋지게 재가공해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유용한 물건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쇼호스트와 같다... 

 

 

 

 

그러니까 역자의 핵심적인 주장은 '지젝은 없다' 내지는 '지젝의 책은 없다'였다. 하여 그의 주장대로 이렇듯 자기 표절로 충만한 '쇼호스트'의 책을,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느라 애쓴 역자의 '계산법'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쇼호스트의 쇼호스트?). 궁금하지는 않지만 기이하다는 생각은 든다. '지젝으로의 복귀'인가, 아니면 자학에의 열정(혹은 향락)인가? 여하튼 나로선 '라캉 정신분석학의 실천적 곤경'(201쪽)을 염려하기에 앞서서 역자가 대면해야 했던 것이 '번역의 곤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혹은 역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07. 05.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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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라캉과 정치의 합류점

평상시에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습성이 있다. 필요에 얽매이지 않은 경우에 그런데, 간혹 그런 필요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릴 때도 있다. 차가워진 날씨 때문에 외출을 자제한 어제오늘이 그렇다. 프로프의 <민담형태론>의 서문과 <라캉과 정치>의 서문, 그리고 <스피박 넘기>의 서두 등이 그렇게 읽은 대목들인데, 시간이 나는 대로 정리해두도록 한다. 이 페이퍼는 <라캉과 정치>의 서문에 대한 것이다.

 

 

 

 

원래 서문은 '라캉과 정치를 연관지을 수 있는 가능한 논의를 위한 몇몇 예비 질문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부제 자체는 라캉적인 것이다(<에크리>에서 정신병을 다루는 한 장의 제목이 비슷한 식이다). 그걸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을 순 없으므로 간단히 '라캉과 정치의 합류점'이라고 해둔다. 저자인 야니 스타브라카키스가 제기하고 있는 것은 '라캉과 정치적인 것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인바, 이 표제에 대한 해제가 서문의 내용을 이룬다.

저자는 먼저, '라캉과 정치'라는 타이틀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의심들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그 의심이란 사회/정치적 심급을 정신분석이라는 개인심리학적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언제나 사회적인 수준 즉 '객관적인' 수준을 개인의 수준, 즉 '주관적인 수준'에서의 분석으로 환원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은 정당한 것이기도 한데, 그간에 정신분석학적 환원주의, 곧 사회는 집합적 무의식 또는 초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며 그로 인해 사회를 정신병리적 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처럼 다루는 태도는 그간에 오명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인용하고 있는 뒤르켐의 발언은 그리하여 원칙적으로 옳다: "사회현상이 심리현상에 의해 직접적으로 설명될 때마다 우리는아마도 그 설명이 틀렸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14쪽) 국역본에는 이 발언의 출처가 누락됐는데,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한 회의론에 맞장구를 치는 이들이 또한 다름아닌 정신분석가들이다. 라캉의 사위이자 상속자 자크 알랭-밀러(*'밀레'나 '밀레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는 이렇게 묻는다: 정신분석가들은 자신들에게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정치를 말하는 것이 남용인지 아닌지를 자문해 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분석에 들어서는 것은 고도로 개인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15쪽)

하지만, "정신분석학은 초연한 이론도 고립된 개인에 관한 심리학도 아니며(라캉은 어떠한 형태의 원자론적인 심리학에도 반대하였다), 더더욱 분석주체는 '고독한 방랑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석주체는 다른 사람과, 즉 분석적 세팅 안에서 분석가와 연결됨으로써만 이 분석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분석주체'는 'analysand'의 번역어이며, '환자' 곧 '피분석자'를 가리킨다. 분석적 세팅 안에서 피분석자가 갖는 능동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주체(analysand)'라고 부른다. '분석가'는 물론 'analyst'를 가리킨다. 그리고 밀러 자신이 분석에서 이 양자간의 관계를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적 결속'이라고 불렀다. 프로이트 자신이 정신분석학적인 사회-정치적 분석 작업을 다양하게 남겨놓기도 했고(<환영의 미래>나 <문명 속의 불만>, <왜 전쟁인가> 등은 대표적이다).

라캉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자신의 영감과 사유방식, 그리고 자신의 기술의 무기고를 이와 같은 연구들에서 찾아내었다. 그는 또한 이것들을 정신분석학 교육의 조건으로 만드는 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과잉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16쪽)

참고로,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But he also regarded it as a necessary condition in any teaching of psychoanalysis."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것을 모든 정신분석 교육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했다"라는 '평이한' 내용 같은데, "그는 또한 이것들을 정신분석학 교육의 조건으로 만드는 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과잉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라고 불필요할 정도로 복잡하게 옮겨진 이유는 모르겠다. 인용의 출처는 쉐리단의 <에크리> 영역본인데, 설마 이후에 나온 핑크의 완역본 <에크리>를 참조한 탓일까?(역자는 후기에서 핑크의 번역본도 참조했다고 적어놓았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발언을 직접 들어보는 게 유익하겠다: "사회학은 심리학이 사회속에서의 사람들의 행동을 다루는 것과 같이 (...) 사람들의 행동을 다루기 때문에, 사회학은 응용심리학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엄격히 말해서 두 개의 과학만이 있을 뿐이다. 심리학, 즉 순수심리학과 응용심리학 그리고 자연과학."(17-8쪽) 재인용의 출처는 <새로운 정신분석강의>이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라면 이 심리학마저 사회생물학에 '통섭'된다고 말할 법하다.

하지만 "라캉은 정신분석학적인 사회분석의 설득력과 정당성에 관해서는 프로이트와 의견을 같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강한 '환원주의적' 접근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18쪽) 대신에 라캉은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서 존재하는 쌍방향의 운동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가 제시하게 되는 것인 새로운 주체성의 개념이다.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정치적인 주체성 개념'.(이에 대한 설명이 책의 1장을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캉의 이론이 중요한 것은 정신분석학과 사회-정치 분석 간의 진정한 함축 또는 상호함축을 허용한다는 점이다."(20쪽) 그리고 이러한 주체성 개념으로부터 객관성(객관적인 수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안된다(이에 대한 설명이 2장이다).

잠시 덧붙이자면, 책의 1장 '라캉의 주체'에 대해서는 저자도 참조하고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1995)가 필독서이다. 이 책의 국역본은 올 상반기에 나올 예정인 것으로 안다. 스타브라카키스의 보다 중요한 기여는 따라서 2장 '라캉의 객체'에서 찾아진다(물론 이 대목도 지젝의 저작들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간취할 수 있다. 스타브라카키스는 보다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의 문제제기에 이어지는 내용은 소위 '애로사항'이다. 라캉과 정치적인 것의 합류점을 사고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미리 짚어보고 있는데, 첫번째 문제는 "라캉의 담론의 복잡성과 그의 바로크적인 복잡한 문체와 관련이 있다."(22쪽) 사실 라캉에 대한 많은 비난이 바로 이러한 모호한 그의 문체적 스타일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며, 영화 <지젝!>에서 지젝은 이러한 수사적 제스처를 과감하게 배제하고 라캉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라캉은 "청중들 속에서 새로운 독해 문화를 배양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이 보인다 - 그의 텍스트는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쓰여지는텍스트이지, 읽혀지는 텍스트가 아니다."(23쪽). 여기서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은 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그것은 '쓰여지는 텍스트(writerly text)'와 '읽혀지는 텍스트(readerly text)'란 말의 출처가 롤랑 바르트라는 것을 친절하게 보충해준다(나의 친절은 22쪽에서 'Lacan in Samuels'의 's'가 탈자되었다고 보고하는 정도이다). <문제적 텍스트 롤랑/바르트>(앨피, 2006)에서 이 두 용어는 각각 '작가적 텍스트'와 '독자적 텍스트'로 옮겨졌는데, '작가적 텍스트'란 텍스트의 의미지평이 열려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뭔가를 계속 끄적거리고 싶도록 만드는 텍스트이다.

여하튼 이러한 어려움을 낳는 라캉의 스타일을 저자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캉의 담론이 지닌 모호함은 사실상 모든 독자에 대한 도전이며,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도전이고, 떠맡아야만 하는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그의 담론의 비환원적인 모호함과 비결정성을 인정할 때에만 우리는 라캉의 담론을 가지고 작업할 욕망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우리에게 건네는 도전이다."(24쪽)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인문 번역서를 읽을 때 '비환원적인 모호함' 같은 표현에 주눅들면 안된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비환원적'이란 말은 'irreducible'의 번역이고 이 단어는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더 이상 약분할 수 없는'[수학] 등의 뜻을 갖는다. 수학에서의 의미가 여기서는 이해에 더 용이하겠다. 라캉의 담론이 (보기엔 굉장히 크고 복잡한데) 더이상 약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 즉 그 모호함이 더 이상 축소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이 거꾸로 우리에게 라캉을 읽고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설명하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긴다는 얘기이다.

모호함을 의도적/적극적으로 창출해내는 라캉의 수사적 전략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라캉주의 문헌 속에는 라캉 담론의 복잡함을 모방함으로써 재생산되는 몽매주의자들의 비체계주의적인 전통이 존재하며, 다른 수준에서는 라캉이 비판했던 자아-심리학의 문제가 존재한다"(25쪽)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만약 라캉의 전략이 전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 마지막 인용문도 모호한데, 우리말로는 전체부정으로 읽히지만 의미는 부분부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라캉의 전략이 전적으로 성공하못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정도가 적합하지 않나 싶다(그러니까 그것이 절반의 성공에 머문 이유는 이런 때문이다, 란 뜻이다).  

"라캉의 담론 상태와 관련된 두번째 어려움은 라캉의 개인적인 문체에서 비롯될 뿐만 아니라, 시간에 따른 라캉 담론의 급진적인 발전에서도 비롯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라캉의 저작에서는 '라캉에게 맞서는 라캉 Lacan contra Lacan'이라는 투쟁적 계기는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26쪽)

그러니까 라캉은 시작부터 체계적이고 완전무결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 게 아니었고, 조금씩 수정하고 대체하고 방점을 이동시키는 식으로 그의 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래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것은 다면적 얼굴의 라캉이며, 때로 이 라캉'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라캉 vs 라캉'이란 표어가 억지가 아닌 것이다(라캉에 대한 국내의 많은 비판은 대개 이런 점들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일반적으로 라캉 이론의 진화는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로 방점이 차츰 옮겨간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라캉 자신이 이 세 등록소(register) 혹은 초점이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병행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이론가'라면 다들 그렇게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그가 (*1940년대에) 상상계에 두었던 이론적 무게만큼 다른 차원에 동일한 무게를 두지 않았던 이유는 그 당시 청중들이 상상계 차원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7쪽) 

인용문에서 '상상계 차원'은 원문에서 그냥 대명사 'it'이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역자가 '상상계 차원'이라고 바꿔놓았는데, 내 생각에 이 번역서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오역인 듯싶다. 전후맥락은 이렇다.

"Lacan argues, for instance, that references to the role of the signifier were present in his discourse and his papers from the 1940s - the same applies to the concept of the real which is already present in his first seminars. The reason he didn't invest these demensions with th same theoretical weight that he did with the imaginary is, according to his view, that his listeners were not yet ready to accept it at that time."(6-7쪽)

기표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다르게 말하면 '상징계'에 대한 강조이다. 내가 보기엔 이 두 문장엔 라캉과 스타브라카키스 두 사람의 주장이 겹쳐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나의 심증으로 "references to the role of the signifier were present in his discourse and his papers from the 1940s"라고 지적한 건 라캉이고,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the same applies to the concept of the real which is already present in his first seminars."라고 덧붙인 건 스타브라카키스이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라캉의 발언을 옮긴 "his listeners were not yet ready to accept it at that time"에서 'at that time'은 1940년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거울단계'를 핵심으로 한 '상상계'에 대한 이론정립에 골몰하던 1940년대에도 라캉은 '상징계'를 언급했지만, 더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청중들이 그것(상징계)을 수용할 준비가 안돼 있었다는 것.

스타브라카키스는 이러한 변호가 상징계-실재계에서도 반복된다고 덧붙인다. 즉, 1951년의 첫번째 세미나에서도 '실재계'란 말은 등장하지만 라캉은 더 발전시키지 않았다. 왜? 청중들이 아직 그걸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도 역자는 'it'가 단수이기 때문에 앞에 나오는 'the imaginary'를 받는 걸로 보았을 텐데, 내가 보기엔 의미상 'these demensions'를 받아야 한다. 라캉에게는 '상징계'만을 뜻했을 'it'이지만 두 가지 사례가 포개져서 'these demensions'(상징계와 실재계)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라캉을 읽는 어려움이야 다 말할 수도 없겠다. 그저 독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도리밖에: "라캉의 독자들 모두에게 제기되는 도전은 라캉의 사유의 복잡함을 특정한 층화작용으로 환원함 없이 그리고 재현 안에서의 실재의 흔적으로 보전되어 있는 비결정성을 봉합함 없이 자기 자신의 독해를 구성하는 것이다."(28쪽)

'특정한 층화작용'이라는 건 침전시켜서 걸러낸다는 것인데, 알맹이들만 골라낸다는/환원한다는 의미겠다. 비결정성을 봉합한다는 건 제거하거나 무시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쉽겠다. 요는 그 복잡함과 비결정성을 보존하면서 자신의 독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모방이 아니라 최종적인 라캉을 추구하지 않는 실재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즉, 라캉적인 실재계의 구성력에 우리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원문 역시 간추리면, "Simply put, instead of imitation we need interpretation, an interpretation which is not searching for the real definitive Lacan... and chooses to concentrate on the constitutivity of the Lacanian real..."(7쪽) 

역자의 '해석'이 많이 반영된 대목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라캉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해석해야 한다. 그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해석은 라캉의 어떤 고정적인 실체를 찾는 작업이 아니라 (의미작용의 확실성을 교란시키는) 라캉적 실재(계)의 구성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어야 한다. 표상되지도 환원되지도 축소되지도 않는 '라카니언 리얼'에 언제나 유의해야 한다는 당부이겠다.

이 서문의 마지막 대목은 라캉에 관한 '전기적 스케치'이다. 그건 그냥 읽어보면 되겠다. 그 이전에 저자는 라캉 읽기의 어려움이 어떤 보상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 그게 또한 독자의 마지막 몫이어야 하겠다.

"최근의 유토피아 정치의 위기는 실망과 정치적 염세주의의 원인이 되는 대신에 조화와 환상의 윤리학이 부과한 구속으로부터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해방'시킬 기회를 창조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 네오파시즘, 민족주의적 배타주의와 근본주의가 다시금 그들의 추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시대에 정치적인 상상력의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라캉의 이론은 이러한 정치적 '해방'의 촉매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정치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비-근거적인(*비정초적) 윤리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34-5쪽, 강조는 나의 것) 

07. 01. 07 -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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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논술은 나의 힘} #1 : 제 1장 : 논술에 대한 오해와 이해

제 1장 : 논술에 대한 오해와 이해

질문 1 : 논술에서 '나'라는 말을 쓰면 안 되는가?

* 나의 주장을 관철하고 그것이 합당하다는 것(*논리적으로) 을 밝히는 시험이기 때문에 상관없다. 나의 주장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나'라고 표현하는 방식은 자신(*논자)의 주체적이고 도전적인 사유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이 '나'라는 말은 정확히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요즘 자주 출제되는 짧은 논술 문제, 즉 제시된 지문들을 비교, 분석하여 그를 바탕으로 150자 내외로 정리하라고 하는 문제는 굳이 '나'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질문 2 : 주장은 반드시 '단정적'으로 해야 하는가?

* 주장은 단정적으로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 '단정적'이라는 것을 아무 곳에서나 적용시켜서는 결코 안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글은 구체적인 상황이나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극히 단정적으로 표현한 경우이다. 

   - "요즘 길거리에 나가보면 온통 외래어 간판 투성이다."

   - "현대인들은 이기적이다."

*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논술이 '단정적'인 표현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책에 제시된 '98년도 성균관대 논술 문제'에서의 출제 교수의 예시 답안은 이를 잘 드러낸다. 그는 짧은 단락에서 "~듯하다"와 같은 추정적 판단을 나타내는 표현을 세 번이나 사용했지만 이는 결코 무리가 없는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논술에서의 주장은 단정적으로 하느냐 마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자기 주장을 정확히 하느냐, 유보적 태도로 판단하느냐, 혹은 추정하여 판단하느냐 하는 것에 있다.

질문 3: 논술에서 의문문을 사용하면 안 되는가?

 * 의문문은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문문을 사용해서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보다 명확하게 하거나 선명하게 할 수 있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의 적절하게 사용된 의문문은 글의 초점을 분명히 해 주거나, 특정 내용을 강조해 주는 효과가 있다. 

질문 4: 논술에서 '비유'를 사용하면 안 되는가?

 * "논술에서 비유는 절대 안 된다는 법칙은 없다."는 것이 논술에 대한 비유의 사용 원칙이다. 논술문 전체를 관통하지 않으면서 글의 한 부분에서 짧게 인용되는 비유는 글쓴이의 논지를 전체적으로 쉽게 전달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유추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유가 됐든, 유추가 됐든 엄밀한 논증에 사용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단지 논술문에서는 부분적으로 사용되어야 효과적이다.

질문 5: '~에 대해 살펴 보겠다'라고 문제 제기를 하면 안 되는가?

* 이러한 표현이 사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문제는 이러한 표현이 적절한 곳에서, 글의 맥락에 맞게, 사고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게 제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질문 6: 논술에서 영화 이야기를 인용하면 안 되는가?

* 논술에서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인문과학/사회과학적 개념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것과 그 반대로 일상생활에서의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인문과학/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를 논술에서 자신의 논리를 구체화시키거나 혹은 명확하게 하는데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꽤 괜찮은 전략이다. 문제는 영화 이야기를 원용하는 것이 자신의 논지나 논리 전개를 흩트러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질문 7: 서론은 왜 그토록 중요한가?

 * 논술에서 서론을 쓰는 방법만을 강조하는 것은 정말 무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출제자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제시문을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정확히 독해한 바탕 위에서 그것을 다각도로 깊이 있게 논술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修辭)로만 가득 찬 서론 쓰기가 아니라 본문의 내용 및 주제를 암시하는, 그러면서도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짧고 효과적인 서론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질문 8: 교과서적인 결론은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 논술의 결론을 쓸때는 기존의 고답적이고 인습적인 결론을 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새로운 사회적 조건 속에서 기존의 방식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방식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글쓴이의 창의적 생각이 파생된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적 조건 속에서 기존의 방식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끊임없이 모색해 보는 태도가 결연된 상태로 창의적 글쓰기를 하고 그에따라 결론을 쓰는 학생들이 많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태도이다.

질문 9: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논술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 독창적인 논술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다. 진지한 성찰이라는 것은 문제를 다각도로 깊이 있게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6년 6월의 고려대 논술 모의고사에서 "'기술만능주의의 입장'에서'친환경주의적 입장 또는 생태주의적 입장'을 반박하라"라는 문제는 하나의 문제에 대한 다각적인 관점을 취할 것을 요구한다. 한편, 연세대학교의 2006학년도 정시 문제의 주제는 "불안의 생산성, 항존성이 어떻게 사회 문화의 역동성으로 작동하는가?"를 묻고 있는데 이 또한 기존의 고답적이고 관습적이며 기존의 관성이나 타성에 매몰된 생각으로는 도저히 풀수 없는 문제이다.

질문 10: 배경 지식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 독창적 논술은 배경 지식을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가능하기도 하다. 논술에서는 광범위한 배경 지식의 활용이 요구되는데 지금가지 배운 지식들을 하나의 통일된 주제 속에 통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질문 11: '베껴 쓰기'가 논술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가?

* 좋은 논술문을 베껴 쓰기는 단기적으로 문장력과 구성력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유용하다. "글을 베낄 때는 늘 그 글 속에 담긴 생각의 흐름을 놓치지 않아야 하며 글 속에 담긴 생각의 지도를 머릿속에 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질문 12: '서론-본론-결론 만이 왕도는 아니다. 

* 형식에 얽메여서 자신의 논리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벗어나면서도 논리적 일관성이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논술문은 일정한 형식없이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시켜 나가는 것, 그러면서도 글의 완결성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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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퍼온글] 우리시대의 명저 50

연초부터 각 매체마다 책읽기에 유난한 관심들을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의 '사회적 독서' 운동에 이어서 한국일보에서는 '우리시대의 명저 50' 시리즈를 연재한다고 한다. '명저'라고는 돼 있지만 목록을 보면, 당대의 베스트셀러들도 많이 망라돼 있다. '명저'라는 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책이란 뜻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한 듯싶다. 아무튼 이 50권에 대한 해제가 다 게재되면 올 한해도 다 가는 게 아닌가 싶다(하냥 섭섭할까?). 50권의 면면들을 구경해볼까라는 '무모한' 욕심도 품어봄 직하지만, 이미 펌글에 도서(상품) 이미지를 집어넣지 말도록 재차 당부를 받은 터라 자제하기로 한다(이러한 펌글도 가급적 자제할 예정이다). 맨숭맨숭하긴 하지만, 목록만을 한번 일람해보는 것으로 '책구경'을 대신해야겠다(시간이 남아서 좋긴 하군).  

한국일보(07. 01. 04) 우리시대의 명저 50

우리 저술의 숲은 건강하고 우람했다. 지성의 숲을 거니는 일은, 굳이 한 그루 한 그루의 결을 더듬고 껴안아보지 않고서도, 황홀하고 뿌듯했다. 책의 전문가들이 전해온 목록의 갈피에서 밀려오던 희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또 저자와 책이 갖는 이름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기획팀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고통마저도 행복했다.

추천ㆍ자문단과 기획팀은 선행 연구로 불모의 땅을 일군 선구적 저서와 학문적으로 고전의 무게를 지닌 책, 지식 대중화를 선도한 책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또 특정 저서의 가치 못지않게 해당 저자가 우리 지성사에 미친 영향을 높이 산 경우도 있다. 시대적 담론과 이슈의 중심에 섰던 문제적 저작들도 놓치지 않으려고 고심했다.

식민지 사관과 실증 사학을 넘어 지배집단의 교체라는 독자적 사관으로 한국사를 정립한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고난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로 나아가고자 했던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서양 신학과 전통 종교사상을 대비하며 우리 문화의 보편적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한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재야 학자로서 학문적 엄밀성과 함께 역사의 빈틈을 성실히 메워준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서양고대철학 연구의 수원지로 여전히 마를 기미 없이 푸르게 출렁이는 박홍규의 <희랍철학논고>, 우리 역사에서 ‘자생적 근대화론’ ‘자본주의 맹아론’의 학술적 근거를 실증해 그 문제 의식을 지금까지 이어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해당 분야에서 아직도 이들의 업적을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김두종, 전상운, 김용준, 유민영 등의 노작들이 그렇게 선정됐다.

암울한 군사독재의 억압을 뚫고 비판적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지성의 균형점을 잡아준 리영희, 1980년대의 질곡에 <민중신학>이라는 독보적인 신학적 응답을 제시했던 안병무, <전태일 평전>으로 1970년대와 80년대 변혁운동의 맥을 이어준 조영래, 마당극이라는 전통 연희의 현대적ㆍ변혁적 연구와 실천으로 당대 문화의 큰 정신을 구축했던 채희완, 억압의 시절을 몸으로 살았고 몸의 고백으로 시대를 움직인 서준식 정수일 홍세화의 저작들도 놓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로 꼽혔다.

경제학이 강단을 벗어나 어떻게 현실과 만날 수 있는지를 가슴으로 보여준 정운영의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고도의 과학 전문 연구분야를 대중적 글쓰기로 선도한 최재천의 <개미 제국의 발견>, 20세기 신화 열풍을 주도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동양미술의 오주석, 서양미술의 이주헌, 한시의 정민, 미학의 진중권 등은 인문학 대중화의 전범으로 꼽혔다. 또 우리 글과 우리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아프게 일깨운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우리 문학의 오랜 딜레마였던 ‘근대’의 숙제를 성실히 풀고자 한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 등도 목록에 들었다.

기획팀의 어두운 눈과 선택의 편의로 막판에 누락된 소중한 책들도 수두룩하다. 이들 책에 대한 응당한 예우는 눈 밝은 독자들의 몫으로 넘기고자 한다. 우리는 저자들이 먼저 닦은 저 편한 길을 최대한 힘들여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고자 한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지성의 독자들과 함께.

● 추천 위원 기고: 무엇이 책을 숨쉬게 하는가

광복 이후 '나라 세우기'와 상응하는 '학문의 토대 쌓기'는 광복 직후의 혼란상과 한국전쟁의 상흔 탓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김원룡의 <한국미술사>,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 등이 대표적이다. 수용자, 즉 독자 측면에서 보면 60년대는 전집 출판의 전성기였다. 외판원에게 구입한 문학이나 사상 전집을 거실에 꽂아두는 허영심이 팽배했으나, 그 허영심이란 바꿔 말하면 일종의 지적 허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의 60년대는 배만 고팠던 게 아니다.

특기할 만 한 것은 1970, 71년에 나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다.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내발적(內發的) 근대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김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도 김용섭의 연구 성과에 크게 자극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0년대는 근대화의 기치 아래 개발 독재와 정치적 억압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출판과 책도 그러한 시대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과학의 시대로도 불리는 1980년대에는 좌파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많은 지식인들이 정당성 없는 권력의 폭압적 전횡에 맞서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한완상의 <민중사회학>, 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되찾은 우리 글과 말로 토대를 쌓고 틀을 짓는 시기, 어떤 의미에서는 각 분야에서 개척자적 노력이 요구되었던 시기가 1950, 60년대라면 1970, 80년대는 학문과 출판과 책이 시대와 현실의 요청에 충실히 응답하려 했던 시기다. 무너뜨려야 할 우상도, 싸워야 할 대상도, 이뤄야 할 목표도 분명했던 시대, 그래서 일종의 전선(戰線) 시대라 칭해도 좋을 그런 시대였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전선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잃은 것은 전선이었고 얻은 것은 다양성이었다. 우리 출판과 책의 지형도는 매우 다채로워진 것은 물론 훨씬 더 독자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개성 넘치는 문장 스타일, 입말에 가까운 글쓰기, 엄숙한 강의가 아니라 정겨운 수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저자들이 부각됐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미학 오디세이>의 진중권이 그러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윤기가 그러했다.

최근 들어와 많은 이들이 책을 걱정한다. 그들이 보기에 독자들은 더 이상 책의 존엄을 경외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의 얼개와 뜻을 깊이 파고드는 책은 좀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 책의 위기, 책의 죽음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출판과 책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책은 위기였다. 다만 위기 속에서도 시대의 중추를 정확히 건드리며 한 획을 그은 소수의, 아니 극소수의 책들이 있었기에 책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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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기술속사상] #3 기술 발전 거역할 자유도 허하라

[기술속사상] 기술 발전 거역할 자유도 허하라!/손화철
‘기술비관론자’ 자크 엘륄의 진단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
기술은 인간 통제 벗어나 자유 억압하면서 ‘효율성의 법칙’ 따라 발전
더 빠른 컴퓨터, 더 얇은 휴대폰 기술이 필요 창출…그의 대안은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기술 속 사상/③ 기술 시스템과 자율적 기술 - 쟈크 엘륄

인간복제나 생각하는 로봇의 생산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가?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면서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바램과 무관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다. 실제로 대학 수업 시간에 물어보면 학생들 중 2/3 이상은 인간복제같이 찬반이 분분한 기술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은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긍정인데, 그 가운데 묘한 체념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술발전과 그에 따른 변화들은 ‘시대의 흐름’이고 거기에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지하철 곳곳에 붙은 소프트웨어 광고가 심상치 않다. “당신도 OOOOO만큼 진화하셨습니까?”

기술발전이란 시대의 흐름 앞에 수동적이 되는 것은 과학자, 공학자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기술발전을 직접 이끌어가는 전문가들에게도 기술발전의 완급이나 방향을 조절한 권한은 없다. 자기의 전문 영역 외에는 잘 모를 뿐 아니라 자기가 개발하는 기술이 장차 어떻게 쓰일지도 모른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살벌한 시장 경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 혹은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라는 말이 좀 허탈하게 들린다.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이 맞긴 한데, 발전시키지 않을 자유도 사용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인가, 하인인가?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학자 쟈크 엘룰(Jacques Ellul, 1912-1992)은 이러한 현대사회의 상황을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뒤틀려진 기독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등 1990년대 젊은 기독교인들이 많은 읽었던 책들의 저자로만 알려졌으나, 엘룰은 과격한 현대기술 비판론자로 더 유명하다. 1964년 미국에서 <기술사회>(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출판된 이래 엘룰은 ‘기술비관론자’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1954년에 나온 프랑스어판 <기술 혹은 우리 세기의 도박(내기)>(Technique ou l'enjeu du siecle)을 번역한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별로 빛을 못 보았지만 영문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제목의 번역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기술사회(technological society)’라는 말이 현대를 표현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이후 출판된 <기술 시스템>(The Technological System)과 <기술담론의 허세>(The Technological Bluff)도 프랑스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많이 읽혔다고 한다.

엘룰은 현대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전혀 다른 특징들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우선 전통 기술은 상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다른 활동들 (예를 들어 종교적 활동)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현대에는 기술의 발전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또 기술의 제작에 있어서는 자동화를 통해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면서, 사용에 있어서는 사용하지 않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엄청난 발전의 속도와 지역의 문화와 상관없이 전지구적으로 사용가능한 보편성, 그리고 여러 기술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는 것도 현대기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시스템은 자연을 대상으로 했던 전통적인 기술의 영역을 넘어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으로 침투해 간다. 엘룰은 정부의 조직이나 회사의 마케팅과 광고, 그리고 대도시의 놀이시설 같은 것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기술’이라 부른다.

이러한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은 철저히 관찰에 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관심은 추상적인 본질에 있지 않고 현실의 정확한 파악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기술사회의 현실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 기술의 발전도 한 개인이나 집단이 완전히 통제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과거 기술의 발달은 매우 느렸고 공간적 제약이 많아서 사람들은 그 변화에 억지로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현대 기술사회의 문제는 컴퓨터와 핸드폰과 은행카드를 사용해야만 하고, 때가 되면 바꿔야만 하고, 바꾸면서 나의 삶이 더욱 나아진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술이 ‘자율적’이라는 표현은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거나 기계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기술발전이 기술 시스템의 관성에 의해 지속되고, 그 과정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술사회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인간들에 의해 조정되기보다는 ‘효율성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고 발전한다.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다. 더 빠른 컴퓨터와 더 얇은 핸드폰이 꼭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의해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를 창출한다. 누가 지하철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던가?

물론 기술 개발에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되기도 하고, 특정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기술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그와 같은 개별 사례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아가, 앞서 본 것과 같이 기술발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뿐 아니라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까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사회 전반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술발전을 모두 포기하고 산업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기술이 자율적이라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는가? 엘룰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말년에는 “이제 기술사회에 사는 인간에게는,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자유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술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도 없고, 그 구성원은 이미 자유롭지도 못하다고 하니, 그를 따라다니는 ‘기술비관론’의 꼬리표는 거의 정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엘룰 자신은 비관론자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비관론자의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가 남긴 50여 권의 저서와 1000여 편의 논문은 자기의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의 산물이다. 그 외에도 엘룰은 90 평생을 시골 목사, 레지스탕스, 보르도 대학 교수, 사회학자, 정치학자, 평신도 신학자, 보르도 시장, 청소년 운동가, 환경운동가 등으로 활약하며 그야말로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갔다.

기술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우울한 시각과 그의 적극적인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삶을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말로 정리했다고 한다. 학자로서 현대 기술사회 전체를 폭넓게 조망하고 분석한 결과 비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론 때문에 자기가 속한 삶의 터전에서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평생을 보낸 고향 보르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운동가의 삶을 살면서 작은 일에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기술사회가 확 변할 것이라는 환상을 경계하면서도, 자신의 작은 노력들을 통해 기술사회가 위협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개인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엘룰의 사상과 행적을 그가 믿었던 기독교와 연관시키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자신은 기술사회에 대항하는 개인적 노력이 신앙과 상관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엘룰의 저서를 읽고 평생을 자기 마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 사람도 있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후에 일본 소니(SONY)의 세계 경영 전략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같은 제품을 팔더라도 각 지역의 문화와 전통, 구매자의 요구사항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대기술을 비판한 대표적 학자가 좌우명으로 삼은 말이 첨단 전자기술 회사의 모토로 둔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엘룰이 경고하는 기술 시스템의 무서운 힘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19433.html

* 자크 엘룰은 나에게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내 방 책 꽃이 어딘가에 꽂혀져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유명한 학자라는 사실은 이제서야 알게되었다. 뭐 이것도 큰 행운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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