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기술속사상] #3 기술 발전 거역할 자유도 허하라
[기술속사상] 기술 발전 거역할 자유도 허하라!/손화철 |
‘기술비관론자’ 자크 엘륄의 진단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 기술은 인간 통제 벗어나 자유 억압하면서 ‘효율성의 법칙’ 따라 발전 더 빠른 컴퓨터, 더 얇은 휴대폰 기술이 필요 창출…그의 대안은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
기술 속 사상/③ 기술 시스템과 자율적 기술 - 쟈크 엘륄
인간복제나 생각하는 로봇의 생산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가?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면서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바램과 무관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다. 실제로 대학 수업 시간에 물어보면 학생들 중 2/3 이상은 인간복제같이 찬반이 분분한 기술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은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긍정인데, 그 가운데 묘한 체념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술발전과 그에 따른 변화들은 ‘시대의 흐름’이고 거기에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지하철 곳곳에 붙은 소프트웨어 광고가 심상치 않다. “당신도 OOOOO만큼 진화하셨습니까?”
기술발전이란 시대의 흐름 앞에 수동적이 되는 것은 과학자, 공학자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기술발전을 직접 이끌어가는 전문가들에게도 기술발전의 완급이나 방향을 조절한 권한은 없다. 자기의 전문 영역 외에는 잘 모를 뿐 아니라 자기가 개발하는 기술이 장차 어떻게 쓰일지도 모른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살벌한 시장 경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 혹은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라는 말이 좀 허탈하게 들린다.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이 맞긴 한데, 발전시키지 않을 자유도 사용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인가, 하인인가?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학자 쟈크 엘룰(Jacques Ellul, 1912-1992)은 이러한 현대사회의 상황을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뒤틀려진 기독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등 1990년대 젊은 기독교인들이 많은 읽었던 책들의 저자로만 알려졌으나, 엘룰은 과격한 현대기술 비판론자로 더 유명하다. 1964년 미국에서 <기술사회>(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출판된 이래 엘룰은 ‘기술비관론자’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1954년에 나온 프랑스어판 <기술 혹은 우리 세기의 도박(내기)>(Technique ou l'enjeu du siecle)을 번역한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별로 빛을 못 보았지만 영문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제목의 번역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기술사회(technological society)’라는 말이 현대를 표현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이후 출판된 <기술 시스템>(The Technological System)과 <기술담론의 허세>(The Technological Bluff)도 프랑스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많이 읽혔다고 한다.
엘룰은 현대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전혀 다른 특징들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우선 전통 기술은 상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다른 활동들 (예를 들어 종교적 활동)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현대에는 기술의 발전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또 기술의 제작에 있어서는 자동화를 통해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면서, 사용에 있어서는 사용하지 않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엄청난 발전의 속도와 지역의 문화와 상관없이 전지구적으로 사용가능한 보편성, 그리고 여러 기술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는 것도 현대기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시스템은 자연을 대상으로 했던 전통적인 기술의 영역을 넘어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으로 침투해 간다. 엘룰은 정부의 조직이나 회사의 마케팅과 광고, 그리고 대도시의 놀이시설 같은 것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기술’이라 부른다.
이러한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은 철저히 관찰에 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관심은 추상적인 본질에 있지 않고 현실의 정확한 파악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기술사회의 현실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 기술의 발전도 한 개인이나 집단이 완전히 통제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과거 기술의 발달은 매우 느렸고 공간적 제약이 많아서 사람들은 그 변화에 억지로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현대 기술사회의 문제는 컴퓨터와 핸드폰과 은행카드를 사용해야만 하고, 때가 되면 바꿔야만 하고, 바꾸면서 나의 삶이 더욱 나아진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술이 ‘자율적’이라는 표현은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거나 기계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기술발전이 기술 시스템의 관성에 의해 지속되고, 그 과정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술사회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인간들에 의해 조정되기보다는 ‘효율성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고 발전한다.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다. 더 빠른 컴퓨터와 더 얇은 핸드폰이 꼭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의해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를 창출한다. 누가 지하철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던가?
물론 기술 개발에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되기도 하고, 특정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기술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그와 같은 개별 사례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아가, 앞서 본 것과 같이 기술발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뿐 아니라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까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사회 전반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술발전을 모두 포기하고 산업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기술이 자율적이라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는가? 엘룰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말년에는 “이제 기술사회에 사는 인간에게는,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자유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술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도 없고, 그 구성원은 이미 자유롭지도 못하다고 하니, 그를 따라다니는 ‘기술비관론’의 꼬리표는 거의 정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엘룰 자신은 비관론자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비관론자의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가 남긴 50여 권의 저서와 1000여 편의 논문은 자기의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의 산물이다. 그 외에도 엘룰은 90 평생을 시골 목사, 레지스탕스, 보르도 대학 교수, 사회학자, 정치학자, 평신도 신학자, 보르도 시장, 청소년 운동가, 환경운동가 등으로 활약하며 그야말로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갔다.
기술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우울한 시각과 그의 적극적인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삶을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말로 정리했다고 한다. 학자로서 현대 기술사회 전체를 폭넓게 조망하고 분석한 결과 비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론 때문에 자기가 속한 삶의 터전에서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평생을 보낸 고향 보르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운동가의 삶을 살면서 작은 일에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기술사회가 확 변할 것이라는 환상을 경계하면서도, 자신의 작은 노력들을 통해 기술사회가 위협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개인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엘룰의 사상과 행적을 그가 믿었던 기독교와 연관시키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자신은 기술사회에 대항하는 개인적 노력이 신앙과 상관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엘룰의 저서를 읽고 평생을 자기 마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 사람도 있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후에 일본 소니(SONY)의 세계 경영 전략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같은 제품을 팔더라도 각 지역의 문화와 전통, 구매자의 요구사항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대기술을 비판한 대표적 학자가 좌우명으로 삼은 말이 첨단 전자기술 회사의 모토로 둔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엘룰이 경고하는 기술 시스템의 무서운 힘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19433.html
* 자크 엘룰은 나에게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내 방 책 꽃이 어딘가에 꽂혀져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유명한 학자라는 사실은 이제서야 알게되었다. 뭐 이것도 큰 행운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