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일기 - 인조,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6
작자미상 지음, 김광순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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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욕지거리가 나온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도대체 위정자라는 인간들은 어디에 있는가? 한 나라를 책임진 위치에 있는 자들이 훗날을 기약한다는 말로 도망가는 모습에 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명을 섬기듯 조선을 섬기고 주자를 존경한 만큼 백성을 존경하고 아꼈다면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DNA는 언제나 백성을 말하지만 언제나 백성보다 한 발 앞서 부를 축적하고 두세 발 앞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다.

정묘호란에 이어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결국 인조는 청 황제에게 세 번 무릎 굻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 자업자득, 자승자박이다. 그들을 위해 분노가 일어나거나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다. 최소한 위정자들은 목숨을 건졌고, 그들의 부를 유지했으며 그들의 자손을 보호했다. 그런데 조선의 백성은 어떠한가? 볼모로 인질로 노비로 그리고 첩으로 청에 끌려갔다. 여기서 화냥년, 호로자식이라는 말이 유래했으니 과연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분노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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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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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부른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는 것, 인류가 진화해 왔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고전문학이라는 항목을 더 넣고 싶다. 문학이라는 것이 단순히 그 시대의 사항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미시적으로 보는듯한 느낌이다. 이번 고전인 주홍글자가 더욱 거기에 확신을 가지게 해 주었다. 비록 청교도혁명으로 뉴잉글랜드로 이주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같은 내용을 여러 가지 각도로 분석이 가능해 인류가 가진 문제점들을 제대로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홍글자를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먼저, 종교가 우선시 되고 목사라는 존재가 높이 평가되던 시대에 왜 목사 ‘딤스데일’이라는 인물이 간통이라는 대죄를 저지르는 인물로 묘사되는가? 둘째, 여성보다는 남자가 우선시 되던 때에 왜 여성이 작품의 주인공인 ‘헤스터’로 등장하게 되는지 이다.

 

 문학이라는 작품자체가 역사적 사실이나, 시대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왜 딤스데일이 목사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청교도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적 의견의 차이에 의해 영국에서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사 ‘딤스데일’은 청교도인으로써 뉴잉글랜드로 건너가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며, ‘헤스터’는 그 신대륙을 대표하는 인물인 것 같다. 여러 소설에서 보면 대지를 여성으로 대표해서 쓰는 경우를 보더라도 여성인 헤스터가 현재의 미국을 나타낸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설에서 헤스터는 간통이라는 대죄를 저지르고 주홍글자로 된 A라는 상징을 항상 달고 다닌다. 이것은 죄의 상징인 것이다. 즉, 영국사람들의 눈으로는 종교적 의견의 차이로 나라를 버리는 사람들이 천벌을 받을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며, 씻을 수 없는 주홍글자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고 여길 것이다. 반면, 헤스터는 기존의 규칙과 규범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청교도인의 눈으로 보면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동시에 목사인 ‘딤스데일’은 자신의 나라를 버린 죄책감, 종교적 갈등을 야기시킨 죄인이라는 가슴 속의 주홍글자를 품고 살아간다. (여기서 가슴 속의 주홍글자라고 쓴 이유는 비록 주홍글자를 몸에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항상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고 다니는 모습에서 이미 마음속에 주홍글자를 새긴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헤스터를 인정하지 않고 헤스터와의 사랑의 열매인 펄을 공개석상에서 한 번도 안아주지 않으면서 내부적으로 죄책감과 갈등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결국, 마지막에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표명함으로써 영국과의 애증의 관계를 끊고 당당히 한 나라의 시민으로써 인정받기를 원한다. 여기에 의사인 ‘칠링워스’는 구대륙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딤스데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는 역할을 맡게 된다.


 잘은 모르지만, 그 당시 미국소설에서 여성을 이렇게 당당하고 심지가 굳은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된다. 여성에 비해 육체적인 우월감 뿐 만아니라, 사회적인 지위에서도 우월한 남성을 대표하는 목사 ‘딤스데일’(여기서도 목사라는 지위는 남성의 지위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은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며 자신의 딸 펄에 대한 사랑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반면에 여성의 대표주자인 ‘헤스터’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사람들에게 받게 되는 멸시와 차별을 순순히 이겨낸다. 또한 혼자서 딸 펄을 키우며, 목사를 걱정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면에서는 로마로부터의 탄압과 고행을 이겨내며 살아간 예수를 빗대어 헤스터라는 인물을 묘사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책의 마지막 결말을 보면 “앞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천사요 사도는 모름지기 여자일 것이로되, 고귀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더욱 커져간다. 다시 말해, ‘주홍글자’라는 소설은 그 당시에 흔치 않은 여성에 대한 권리 즉, 페미니즘을 발현한 작품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잘못을 했을 때에는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 쯤이야 누구나 저지르는 잘못이라 하며 안위한다. 목사 ‘딤스데일’은 우리 평범한 인간을 대표한다. 자신의 가슴에 품은 주홍글자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그 죄를 만회하기 위해 더 열심히 목사로서의 역할과 봉사를 하며 명성과 덕성을 얻어가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주홍글자의 크기는 커져만 간다. 이에 의사인 ‘칠링워스’는 인간내면의 또 다른 하나인 악마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나간다. 목사는 자신의 주홍글자를 깨끗이 지우기 위해 공개적인 발표를 강행하지만, 의사는 그런 그를 강하게 만류한다. 결국 목사는 자신의 죄를 이야기하고 의사는 빠르게 약해지면서 이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소설 ‘주홍글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책감과 거기에 맞서는 악마적인 감정을 대비시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을 때에 한 인간으로서 평온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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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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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빔밥을 좋아한다. 갖은 야채와 채소가 빨간 고추장 그리고 참기름이 더해져 나오는 매우면서도 고소한 맛 그리고 밥과 함께 잘 버무려진 야채와 채소의 질감은 언제나 나를 군침돌게 한다. , 그 맛은 여러 가지 재료가 부족하지 않으며 넘치지도 않고 잘 어울려졌을 때만 나올 수 있다. 문학이라는 장르도 그런 것 같다. 우리내의 삶을 담고 있기에 단순할 수 없으며 언제나 복잡하다. 인간의 감정, 그 속의 개인의 감정과 사람들 간의 감정, 사회적 문제, 종교적 의문점 등 너무나 많은 재료들이 문학이라는 음식 안에서 버무려지기 때문에 너무 짤 수도 너무 매울 수도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은 이 모든 요소들이 얼마나 잘 한 작품에 녹아내려 맛있게 버무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복잡한 작품이다. 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심리상태, 변화하는 감정들, 그리고 사회적 사건 등은 처음에 나를 너무 혼동에 빠뜨렸다. 하지만 글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그들의 감정이 그들의 생각이 이해되고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 작품이 평범한 우리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창해서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삶이나 존경심과 경외심을 갖고 우러러 봐야할 인물이 아닌 나의 이야기, 나의 친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잡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쉬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흑백TV과 아닌 컬러TV라고 생각해 왔다. 절대 이분법적으로 모 아니면 도라고 딱 잘라 결정내릴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의 경계가 모호할 때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읽고 있는 동안에도 나도 모르게 나는 등장인물 중 누가 나쁜 사람인지 누가 악한 존재인지를 찾으려고 했고 그를 비난하려고 들었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악당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내가 느낀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우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며 잘못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으며 비난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분법적인 사고로 너는 나쁜 놈,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후회하고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내가 꼭 어제의 나와 같을 수는 없다. 어제의 나의 실수와 잘못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후회와 반성를 통해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처럼 변할 수도 있다. 그들을 판단하고 심판한다는 생각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마음, 그들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야 한다. 이 소설은 그 점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도 몰랐던 나의 나쁜 습관을 알게 해 주었다.

 

  여기에는 등장인물이 꽤 많이 나온다. 거기다. 러시아 작품이다보니 이름도 생소하고 역시나 기억하는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두 인물을 비교해 보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인물은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콘스탄친 드미트리치 레빈. 두 인물은 삶을 보는 관점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당연히 사랑에 대한 그들의 생각도 많이 다르다. 브론스키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며 항상 주위에 사람을 끌고 다니는 성격이다. 거기다 변화의 시대에 있던 당시 러시아에서 개방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반면 레빈은 내향적이며 자기만의 생각이 깊으며 밖으로 그것들을 풀어내는 게 쉽지 않은 인물이다. 남 앞에서 쉽게 얼굴을 붉히고 자책을 하며 보수적인 인물이다. 여기에 두 여인이 등장한다. 안나 카레니나, 카체리나(키티) 알렉산드로브나가 그들이다. 한 남자의 아내였던 안나는 과감히 남편과 별거를 하고 주위의 시기와 비난에도 브론스키와 동거한다. 그리고 브론스키와 레빈사이에서 고민하던 키티는 레빈과 결혼하게 된다. 여기에 남녀간의 감정의 충돌이 일어난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질투는 무엇이며, 증오와 시기심은 무엇인가? 이런 감정의 충돌과 감정의 변화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으킬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이며 빛과 그림자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강렬하게 타오르면서 차츰 꺼져가는 사랑이었다. 격렬했던 만큼 그들은 서로를 원했고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브론스키에게는 남자로서의 삶, 즉 사교생활을 청산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사랑이 그 인생의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브론스키는 그녀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린 그 갈망......존중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가 그를 사랑의 올가미로 얽매려 애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 만약 점점 더 강해져가는 이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더라면, 모임이나 경주를 위해 도시로 가야 할 때마다 법석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이 없었더라면 브론스키는 자신의 생활에 충분한 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3p.199”. 그의 사랑만을 원하고 항상 확인하고 싶어하는 안나, 밖으로 자신의 능력과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브론스키, 그 둘은 사랑하면서도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자유에 대한 권리를 표현할 때의 시선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언제나처럼 한 가지 결론, 즉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 어디든 떠날 권리가 있어. 떠날 뿐 아니라 나를 버리고 갈 권리지. 그는 모든 권리를 갖고 있지만 나에게 아무 권리도 없어..... 3p.243”

반면 키티와 레빈의 사랑은 조금씩 불타오르는 사랑이었다. 청혼을 거절당한 레빈의 수치심과 부끄러움도 결국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을 잠재울 수 없었으며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녀 또한 그녀의 사랑이 누구인 줄 알게 된다. 엇갈린 듯 한 그들의 사랑은 이렇게 맺어진다. 소심하고 쉽게 오해하고 고민하며 조심스러운 레빈 그리고 그것을 알고 이해하고 받아주는 키티 사이에서는 브론스키와 안나 사이에서와 같은 갈등과 충돌은 있을지언정 그들과 같은 불화와 불행한 결말은 없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간의 희생과 이해로 더욱 견고해졌다.

 

  이 소설은 19세기 쓰여 졌지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인간으로서 언제나 사랑에 취하고 사랑에 아파하며 시기하고 질투한다. 결국 레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거창한 말로 세상을 분석하고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정의내릴려고 하지만 시대에 상관없이 언제나 그 답은 우리 주위에 있다. 우리 삶 속에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일에 상관없이, 이제 나의 삶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 3p.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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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먹는 법 - 든든한 내면을 만드는 독서 레시피 땅콩문고
김이경 지음 / 유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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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왜 읽지? 깊이 있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때에는 추리소설, 고등학생 때에는 무협지 등 주로 뇌에 즐거움을 주는 재미위주의 책들을 읽었다. 그 당시에도 왜 책을 읽는지는 나에게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주위에서 책을 읽으라고 강요한다는 것, 그리고 재미있으니까 라는 이유 정도일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역사는 옛날 우리의 이야기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도가 이유였다. 결국 나는 책을 뚜렷한 목적 없이 큰 방향 없이 읽고 있었다. ‘책 먹는 법이라는 이 책은 책이란 나에게 무엇이며 왜 내가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책이란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픽션보다는 논픽션의 책을 선호하면서 거기서 알게 된 정보를 젠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책이 나에게 가진 매력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깊이 있는 학습보다는 수박 겉핥기식의 책읽기였으며 학습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책읽기를 통해 단순히 안다는 것을 넘어 의식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었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때려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p.63” 저자는 카프카의 말을 인용해서 책읽기를 통한 자기 의심하는 자아, 반성하는 독서를 강조한다.

 

책은 주위의 현상과 사물을 보는 눈을 키워준다. 하지만 인간은 익숙함과 친숙함에 약한 동물인지라 자신과 가까운 지식을 선호하게 되고 한 쪽으로 기울은 정보를 지속적으로 습득한다.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키클롭스처럼 세상을 보는 외눈만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과연 내 책장은 내가 믿고 싶어 하는 작가의 책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증명해 주는 위주의 책을 읽게 되고 폭넓은 생각과 깊이 있는 사고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굳히게 되는 방향으로 사고의 폭을 좁혀갔다. 책 읽기야말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의 한 방법이지요. 책을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세계와 견해를 접하고 이를 거울삼아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독서가 가진 의미입니다. 이때 자신을 돌아본다는 건 자기 안의 허위와 편견을 들여다보는 것이며, 최대한 투명한 눈으로 자신과 세계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p.44” 책읽기는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지식의 강을 얼게 하기위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고이거나 얼지 않는 유연한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냥 읽기는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해서는 낯설고 손이 가지 않는 책들에게도 구원의 손을 내밀 줄 알아야 한다. 낯설고 손이 가지 않는 책이란 어렵고 쉽게 이해가지 않는 책이다. 그래서 저자는 불편한 독서를 하기를 권한다. 그 방법으로 반복 독서, 쓰면서 읽는 법등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저자는 어려운 책을 읽기를 강조한다.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은, 어렵다고 여겼던 앎을 얻는 기쁨만이 아니라 내 안의 세포를 깨워 한계를 넓히는 드문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모르는 세상, 내가 모르고 외면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물론이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나를 찾기 위해서도 반드시 어려운 책을 읽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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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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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다른 배경을 가진 다른 환경에서 자란 서로 다른 부모님에게 태어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다. 다른 부모,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는 말은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비슷한 사고를 한다. 그 단적인 예가 성공에 대한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해 일명 sky라는 대학교를 나와서 의사, 판사, 변호사 등의 전문 직업이나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삶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규정하고 선망한다. 도대체 우리는 왜 다른 사고를 가지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음에도 비슷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비슷한 성공을 꿈꾸는가? 같은 한국 땅에서 같은 문화권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도대체 그 문화는 누가 만든 것인가?

생각의 좌표라는 책은 이런 질문에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을 포함해 학교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서 특정 정보를 올바른 정보로 인식시키고 다수를 이루지 못한 소수의 지식은 틀리고 도덕적이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더 큰 문제는 누구도 거기에 의문을 제시하지 않으며, 자각하지도 못한 채 각자가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자발적 복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고 존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p 72-73”

 

누구나 우울한 현실에 변화의 씨앗을 심고 싶어한다. 수직 상승하는 전세값과 집값, 쉴 새 없이 오르는 물가. 미동도 없는 월급. 3포세대를 넘어 5포세대로 향해가는 비참한 사회. 하루에도 수십 번 벗어나고 싶으며 바꾸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제자리 걸음이다. 아니 조금씩 후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다수에 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피똥 싸게 노력하고 는 언제나 그 다수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소수는 의 의식 언저리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무능력자, 또는 위험인물로 입력되어있다. 다수를 이루고 있는 조중동은 대표적인 언론기관인 반면 소수인 한겨레는 구독해 본적도 없지만 언제나 빨간 딱지가 붙어 있는 신문이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가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한겨레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것으로다.... 이미 부정적으로 의식화 되어 있다. 진보정당은 어떤가?.... 물론 대부분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접근해선 안되거나 접근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p.91”

 

이 책은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고... 당연히 내 생각은 헤게모니 승리자들의 것이다. 학생 때는인 서울하기 위해 눈물 나게 단어외우고 수학 문제 풀며 역사 연대를 외우고, 사회에서는 다수에 편입되기 위해 토익학원가고 치열한 취업경쟁에 뛰어들며,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폼 나는 폰을 구입하려고 한다. 그것이 나의 자발적인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조차 없다. 그래서 지은이는 탈의식하자고 주장한다. 사람에게는 이기적 선택을 하도록 하는 동물적 본능이 있다. 존재 또는 처치가 의식을 규정하는 일차적 이유다. 그러나 지배세력은 제도교육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꾀한다. 그래야 원활한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사회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을 위한 의식이라고 굳게 믿게 만든다. 이러한 의식들은 라는 이기적이고 개별적인 여과망을 통과해서 저장된다. 그러나 여과망이 있다고 해서 철저히 개인적 특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과망 자체가 국가나 사회의 의도에 따라 조작되거나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 교육이나 사회적 통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p.20”

인문학 즉, 사람에 대한 공부,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를 공부하는 인문사회학이 중요한 이유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자발적 복종의 상태에서 벗어나 내 생각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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